아이를 부모와 떼어 놓으면 ‘제2의 정인이’ 막을 수 있을까?

입력 2021.03.31 (01:08) 수정 2021.03.31 (14:4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세 번의 신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결국 비극을 막지 못한 정인이 사건. 하늘나라로 떠난 정인이를 온 국민들이 바라보며 분노와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비극을 막기 위해 오늘(30일)부터 '학대 피해 아동 즉각분리제도'가 시행됐습니다. 법원의 분리 보호 결정이 있기 전이라도 일정한 요건 하에 자치단체의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의 판단에 따라 학대 피해 아동을 가해 부모와 즉각 분리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즉각 분리 제도의 요건은 크게 4가지입니다.

◎ 1년 이내에 2회 이상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된 아동에게, 현장조사 과정에서 학대피해가 강하게 의심되고 재학대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 보호조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아동에 대하여 아동학대 처벌법상 응급조치 또는 긴급 임시 조치가 종료되었으나 임시 조치가 청구되지 아니한 경우
◎ 현장조사 과정에서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에게 답변을 거부·기피 또는 거짓 답변을 하게 하거나 그 답변을 방해한 경우
◎ 그 밖에 보호 조치를 할 때까지 아동을 일시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인정하는 경우

지금까지는 학대신고가 접수된 아동과 부모를 분리하기 위해 법원의 임시 조치 결정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아동은 법원의 판단 전에도 부모와 바로 분리돼 쉼터나 위탁가정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습니다.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아이를 신속하게 부모와 떨어뜨리고 안전하게 보호해 제 2의 정인이를 만들지 않겠다는 게 제도의 취지입니다.

■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은 턱없이 부족.. 보호 시설도 더 필요해"

문제는 자치단체의 아동학대 전담공무원 인력과 보호 시설 부족입니다. 전담공무원이 아예 없거나 적은 자치단체가 많습니다. 준비도 되기 전에 제도가 먼저 시행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전은 5개 구 가운데 4개 구가 현재 전담공무원이 없고, 충남도 15개 시·군 중 천안과 아산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군들이 전담공무원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1~2명에 불과합니다. 세종시는 전담공무원이 4명 있습니다. 원래 2명이었지만 일이 너무 고돼 한 달 전 2명이 추가 배치됐습니다.


■ "절대 안 하려고 하죠." "저도 모르고 여기 왔어요."

지난해 봄,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6개월 뒤 지자체에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이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동학대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과 함께 출동해 학대 현장을 조사합니다. 이전에는 아동보호 전문기관에서 하던 일입니다.

"(공무원들 누구도) 절대 안 하려고 하죠. 저도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인지 모르고 왔어요. 두 명 추가로 배치받으신 분도 이 일 한다고 하면 안 할까봐 그냥 배치받은 거예요." 취재 차 만난 세종시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대 신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탓에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은 공무원 중 유일하게 24시간 당직체제로 운영됩니다. 경찰도 아니고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아니라 신분은 모호하지만 업무는 경찰과 아동보호 전문기관과 맞먹습니다.

겪는 고충은 상상 이상입니다. "경찰도 아니면서 왜 조사하냐?", "내가 공무원한테 왜 알려줘야 하냐? 너가 뭔데 우리 가족을 갈라놓냐" 같은 말을 매일 듣습니다. 민원 들어오면 2시간 상담은 기본이고, 당직근무는 야간에도 출동해야 하는데 여성 공무원인 경우 아동 학대 가해자가 남성일 때는 더 괴롭습니다. 여경들도 힘들어하는 폭력과 학대 현장에서의 업무를 일반 공무원들이 해야 하니까요.

교육도 잘 이뤄지지 못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선교육 후배치'가 아니라 '선배치 후교육'이 시행되는 게 현실입니다. 아동보호전문기관과 보건복지부에서 마련한 교육과정이 있지만, 교육도 받기 전에 배치돼 선배 전담공무원에게 배우며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이니 행정업무는 행정업무대로 다 해야하고, 공문처리도 모두 본인 몫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직을 서고 나머지 업무까지 하려면 한 달에 초과근무 100시간은 일상이 돼 버렸습니다. "일하다 쓰러지고, 질병 휴직하고.. 기피부서로 낙인찍힌지 오래입니다." 한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의 하소연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 "쉼터가 없어요." "다른 곳으로 가야 해요."

세종시에는 여아 쉼터가 없습니다. 여아가 아동학대 피해를 입으면 다른 지역의 쉼터로 아이를 보내야 합니다.

학대 피해 아동이 장애를 갖고 있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장애 아동 한 명을 돌보려면 일반 아동을 돌볼 때보다 보통 세 배 정도 보육교사의 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해당 지역 아동을 제대로 돌보기에도 쉽지 않은 쉼터에서 타 지역 장애 아동을 받아줄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종에서 학대를 당한 한 장애 여아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한 장애 아동 전문 쉼터에 겨우 입소했습니다. 이 아동은 자신을 받아줄 쉼터를 찾기 전까지 차가운 사무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 아동과 부모를 '분리'만 하면 해결될까?

학대 신고가 접수되고 분리 조치가 이뤄지면 아이는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부모와 떨어져 쉼터에서 지냅니다. 오늘(30일)부터 즉각분리제도가 시행됐습니다. 이제 아이를 부모와 분리하는 최종 판단을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내리게 됩니다.

전담공무원의 책임은 커졌지만, 공무원이 판단을 내림에 있어 다양한 전문가와 협업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은 아직 미흡합니다. 이렇게 제도가 형식적으로 운영될 경우 학대 아동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정수 충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분리가 능사는 아니다"라며, "중요한 건 아동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하고 종합적인 서비스가 함께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때보다 아동학대에 대한 분노 여론이 거셉니다. 여론을 의식한 땜질 처방보다는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신중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자치단체마다 충분한 전담 공무원 인력을 확보하고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전담공무원에게 오롯이 모든 권한과 책임을 넘길 게 아니라 아동 전문 의료진과 심리치료상담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제도가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뒷받침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2, 제3의 정인이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아이를 부모와 떼어 놓으면 ‘제2의 정인이’ 막을 수 있을까?
    • 입력 2021-03-31 01:08:52
    • 수정2021-03-31 14:40:02
    취재K

세 번의 신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결국 비극을 막지 못한 정인이 사건. 하늘나라로 떠난 정인이를 온 국민들이 바라보며 분노와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비극을 막기 위해 오늘(30일)부터 '학대 피해 아동 즉각분리제도'가 시행됐습니다. 법원의 분리 보호 결정이 있기 전이라도 일정한 요건 하에 자치단체의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의 판단에 따라 학대 피해 아동을 가해 부모와 즉각 분리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즉각 분리 제도의 요건은 크게 4가지입니다.

◎ 1년 이내에 2회 이상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된 아동에게, 현장조사 과정에서 학대피해가 강하게 의심되고 재학대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 보호조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아동에 대하여 아동학대 처벌법상 응급조치 또는 긴급 임시 조치가 종료되었으나 임시 조치가 청구되지 아니한 경우
◎ 현장조사 과정에서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에게 답변을 거부·기피 또는 거짓 답변을 하게 하거나 그 답변을 방해한 경우
◎ 그 밖에 보호 조치를 할 때까지 아동을 일시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인정하는 경우

지금까지는 학대신고가 접수된 아동과 부모를 분리하기 위해 법원의 임시 조치 결정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아동은 법원의 판단 전에도 부모와 바로 분리돼 쉼터나 위탁가정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습니다.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아이를 신속하게 부모와 떨어뜨리고 안전하게 보호해 제 2의 정인이를 만들지 않겠다는 게 제도의 취지입니다.

■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은 턱없이 부족.. 보호 시설도 더 필요해"

문제는 자치단체의 아동학대 전담공무원 인력과 보호 시설 부족입니다. 전담공무원이 아예 없거나 적은 자치단체가 많습니다. 준비도 되기 전에 제도가 먼저 시행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전은 5개 구 가운데 4개 구가 현재 전담공무원이 없고, 충남도 15개 시·군 중 천안과 아산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군들이 전담공무원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1~2명에 불과합니다. 세종시는 전담공무원이 4명 있습니다. 원래 2명이었지만 일이 너무 고돼 한 달 전 2명이 추가 배치됐습니다.


■ "절대 안 하려고 하죠." "저도 모르고 여기 왔어요."

지난해 봄,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6개월 뒤 지자체에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이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동학대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과 함께 출동해 학대 현장을 조사합니다. 이전에는 아동보호 전문기관에서 하던 일입니다.

"(공무원들 누구도) 절대 안 하려고 하죠. 저도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인지 모르고 왔어요. 두 명 추가로 배치받으신 분도 이 일 한다고 하면 안 할까봐 그냥 배치받은 거예요." 취재 차 만난 세종시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대 신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탓에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은 공무원 중 유일하게 24시간 당직체제로 운영됩니다. 경찰도 아니고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아니라 신분은 모호하지만 업무는 경찰과 아동보호 전문기관과 맞먹습니다.

겪는 고충은 상상 이상입니다. "경찰도 아니면서 왜 조사하냐?", "내가 공무원한테 왜 알려줘야 하냐? 너가 뭔데 우리 가족을 갈라놓냐" 같은 말을 매일 듣습니다. 민원 들어오면 2시간 상담은 기본이고, 당직근무는 야간에도 출동해야 하는데 여성 공무원인 경우 아동 학대 가해자가 남성일 때는 더 괴롭습니다. 여경들도 힘들어하는 폭력과 학대 현장에서의 업무를 일반 공무원들이 해야 하니까요.

교육도 잘 이뤄지지 못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선교육 후배치'가 아니라 '선배치 후교육'이 시행되는 게 현실입니다. 아동보호전문기관과 보건복지부에서 마련한 교육과정이 있지만, 교육도 받기 전에 배치돼 선배 전담공무원에게 배우며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이니 행정업무는 행정업무대로 다 해야하고, 공문처리도 모두 본인 몫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직을 서고 나머지 업무까지 하려면 한 달에 초과근무 100시간은 일상이 돼 버렸습니다. "일하다 쓰러지고, 질병 휴직하고.. 기피부서로 낙인찍힌지 오래입니다." 한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의 하소연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 "쉼터가 없어요." "다른 곳으로 가야 해요."

세종시에는 여아 쉼터가 없습니다. 여아가 아동학대 피해를 입으면 다른 지역의 쉼터로 아이를 보내야 합니다.

학대 피해 아동이 장애를 갖고 있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장애 아동 한 명을 돌보려면 일반 아동을 돌볼 때보다 보통 세 배 정도 보육교사의 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해당 지역 아동을 제대로 돌보기에도 쉽지 않은 쉼터에서 타 지역 장애 아동을 받아줄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종에서 학대를 당한 한 장애 여아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한 장애 아동 전문 쉼터에 겨우 입소했습니다. 이 아동은 자신을 받아줄 쉼터를 찾기 전까지 차가운 사무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 아동과 부모를 '분리'만 하면 해결될까?

학대 신고가 접수되고 분리 조치가 이뤄지면 아이는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부모와 떨어져 쉼터에서 지냅니다. 오늘(30일)부터 즉각분리제도가 시행됐습니다. 이제 아이를 부모와 분리하는 최종 판단을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내리게 됩니다.

전담공무원의 책임은 커졌지만, 공무원이 판단을 내림에 있어 다양한 전문가와 협업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은 아직 미흡합니다. 이렇게 제도가 형식적으로 운영될 경우 학대 아동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정수 충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분리가 능사는 아니다"라며, "중요한 건 아동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하고 종합적인 서비스가 함께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때보다 아동학대에 대한 분노 여론이 거셉니다. 여론을 의식한 땜질 처방보다는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신중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자치단체마다 충분한 전담 공무원 인력을 확보하고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전담공무원에게 오롯이 모든 권한과 책임을 넘길 게 아니라 아동 전문 의료진과 심리치료상담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제도가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뒷받침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2, 제3의 정인이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