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된 소년의 두개골과 고무신…아직 찾지 못한 4.3 희생자 유해

입력 2021.04.02 (07:00) 수정 2021.04.0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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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최대 비극으로 불리는 제주 4·3이 발생한 지 올해로 73년이 됐습니다.
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 3천6백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4백여 구에 불과합니다.

제주에서 유해발굴이 3년 만에야 재개된 가운데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 3구가 발견됐습니다.

50년 홀로 모시고 있는 먼 친척의 제사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강군섭 할아버지는 50년 가까이 정확히 촌수조차 따지지 못하는 먼 친척 여섯 분(강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7촌 이상)의 제사를 홀로 모시고 있습니다.

살아계실 적 마을 리 사무장으로서 마을 일을 도맡아 하셨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입니다.


강 할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제사를 모시는 친척들은 1949년쯤 한날한시에 돌아가셨습니다. 평화롭던 중산간 마을인 표선면 가시리에도 4·3의 광풍이 몰아쳤기 때문입니다.

강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친척들의 뼈 한 줌이라도 찾고자 45년 전부터 가시리 일대를 수소문 하고 다녔고, 지금은 감귤 과수원이 들어선 밭 한가운데 돌무더기 속에 머리뼈 4구가 잠들어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거 강 씨 일가가 움막집을 짓고 살던 일명 '우구리동산'과 멀지 않은 곳입니다.

밭 주인과 상의해 혼자 힘으로 유해를 수습해볼까도 했지만, 혹시나 자신의 친척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해가 나오면 처리할 방도가 없어 수십 년 세월 마음만 삭여왔습니다.

내 땅속에 4·3 희생자 유해가?

15년 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한 감귤밭을 산 김순생 할아버지는 과수원 한가운데 양지바른 곳에 자신의 아버지 묘소를 옮겨왔습니다. 정체불명의 돌무더기 바로 옆입니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정체 모를 돌무더기를 밀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자신에게 밭을 판 사람이 그걸 극구 만류했습니다.

이곳에 4·3 당시 희생당한 주민의 유해 5구가 묻혀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잘못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면사무소에 무연분묘로 신고도 해봤지만, 면사무소는 봉분이 없어 무연분묘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 재개된 4·3 유해발굴 사업…희생자 추정 유해 3구 발견

제주 4·3 평화재단과 제주 4·3연구소는 이러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제주도 내 7곳을 올해 4·3 유해발굴지로 결정했습니다.

4·3 당시 초토화 작전이 펼쳐졌던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를 비롯해 4·3 피난민들이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진 서귀포시 색달동 돌오름 인근 등입니다.



유해발굴 작업은 1948년 12월 초토화 작전이 펼쳐지며 대규모 집단학살이 있었던 표선면 가시리부터 시작됐습니다. 발굴 이전 4·3의 영령을 달래는 개토제를 시작으로 시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굴작업 3일 만에 40cm 정도 깊이의 얕은 땅에서 사람 두개골 모양이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현장에서 확인된 것은 40대 남성과 30대 여성, 10대 소년의 유해로 추정되는 머리뼈 3구와 고무신 한 짝이었습니다. 강군섭 할아버지의 증언이 있던 바로 그곳입니다.


특히, 유해가 나온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토굴 형태의 피난처가 발견됐고, 그곳에서는 숟가락이 발견됐습니다.

발굴조사에 참여한 박근태 일영문화유산연구원장은 "정확한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이번에 발견된 유해는 가시리 초토화 작전 때 토굴을 파고 숨어서 지내다가 토벌대에 발각돼 희생된 주민들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찾지 못한 뼈 한 줌…15년 동안 발굴한 405구의 유해

2019년 12월 나온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73년 전 제주4·3사건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은 3천610명에 이릅니다. 하지만 2006년부터 시작된 제주도 내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발굴한 유해는 405구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행방불명인 10명 가운데 8~9명은 뼈 한 줌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유해를 찾았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굴 유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것은 133구가 고작. 272구는 아직 이름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법의학 기술도 발달하며 조금씩 희망은 보이고 있습니다. 4·3 유해발굴 유전자 감식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법의학연구실은 종전 STR(염기서열반복구간 검사)방식에서 향상된 검사방식인 SNP(단일염기서열다양성 검사)로 검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 친부모나 자식 관계만 판별할 수 있던 유전자 감식 방법은 방계 6촌까지 판별할 수 있도록 확대됐습니다. 다만,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4·3 희생자 유족들의 참여가 절실합니다.

서울대학교 법의학과 이숭덕 교수는 "발굴 유해의 신원확인에는 유가족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며 "올해도 유가족 시료 채취 작업이 진행되는 만큼 주위에도 적극적으로 알려서 좀 더 많은 희생자를 가족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조했습니다.

빨갱이로 몰리며 겪은 억울한 옥살이…행방불명된 수형인들

제주 4·3 당시 일명 빨갱이로 낙인 찍히며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제주도민은 4,327명. 적법한 절차도 없이 내란실행과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군사재판 또는 일반재판에 회부돼 대전과 전주, 대구 등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수형된 이들의 대부분은 1950년 터진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이미 빨갱이로 낙인 찍힌 이들이 한국전쟁에서 북한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며 무차별 학살한 겁니다.

4.3 수형인 희생자 가운데 1천763명은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끌려가 총살된 뒤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만 될 뿐 아직 뼈 한 줌조차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인이 됐습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과 대구 가창골을 비롯해 대전 골령골, 전주 황방산 등은 당시 대구와 대전, 전주 형무소에 수감됐던 이들이 학살된 암매장지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제주 4·3사건 수형인들도 이곳 수형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만큼 해당 학살지의 유해를 찾아보면 4·3사건의 희생자를 찾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건은 국비 확보입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인 만큼 국비 확보가 절실하지만, 현재로써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 지방자치단체 예산 등에만 의존하는 게 현실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해발굴을 담당한 노용석 부경대학교 교수는 "인간의 도리로써 유해발굴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유해발굴할 수 있는 법률적 조건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유해발굴 사업이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다"고 진단합니다.

고령이 된 유족…포기할 수 없는 유해발굴

제주 4·3사건이 발발한 지도 벌써 73년. 4·3사건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유족들도 벌써 73살의 고령이 됐습니다. 이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건 "시간이 많지 않다" 입니다.

전주형무소 4·3 수형인 희생자 유족인 김광우 할아버지는 "우리 부모의 뼈 한마디라도 뼛가루라도 제주도로 모시고 오는 게 남은 인생의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학형 4·3행방불명 수형인 유족 역시 "이제 곧 팔십이 되는 만큼 부모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며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유해발굴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다가오는 제주 4·3은 3일 73주년을 맞이합니다. 21년 만에 4·3 특별법도 전부 개정되는 등 과거 말 못했던 아픔은 이제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때, 진정한 제주의 봄이 시작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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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된 소년의 두개골과 고무신…아직 찾지 못한 4.3 희생자 유해
    • 입력 2021-04-02 07:00:35
    • 수정2021-04-02 10:18:43
    취재K

한국 근현대사의 최대 비극으로 불리는 제주 4·3이 발생한 지 올해로 73년이 됐습니다.
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 3천6백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4백여 구에 불과합니다.

제주에서 유해발굴이 3년 만에야 재개된 가운데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 3구가 발견됐습니다.

50년 홀로 모시고 있는 먼 친척의 제사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강군섭 할아버지는 50년 가까이 정확히 촌수조차 따지지 못하는 먼 친척 여섯 분(강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7촌 이상)의 제사를 홀로 모시고 있습니다.

살아계실 적 마을 리 사무장으로서 마을 일을 도맡아 하셨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입니다.


강 할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제사를 모시는 친척들은 1949년쯤 한날한시에 돌아가셨습니다. 평화롭던 중산간 마을인 표선면 가시리에도 4·3의 광풍이 몰아쳤기 때문입니다.

강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친척들의 뼈 한 줌이라도 찾고자 45년 전부터 가시리 일대를 수소문 하고 다녔고, 지금은 감귤 과수원이 들어선 밭 한가운데 돌무더기 속에 머리뼈 4구가 잠들어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거 강 씨 일가가 움막집을 짓고 살던 일명 '우구리동산'과 멀지 않은 곳입니다.

밭 주인과 상의해 혼자 힘으로 유해를 수습해볼까도 했지만, 혹시나 자신의 친척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해가 나오면 처리할 방도가 없어 수십 년 세월 마음만 삭여왔습니다.

내 땅속에 4·3 희생자 유해가?

15년 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한 감귤밭을 산 김순생 할아버지는 과수원 한가운데 양지바른 곳에 자신의 아버지 묘소를 옮겨왔습니다. 정체불명의 돌무더기 바로 옆입니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정체 모를 돌무더기를 밀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자신에게 밭을 판 사람이 그걸 극구 만류했습니다.

이곳에 4·3 당시 희생당한 주민의 유해 5구가 묻혀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잘못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면사무소에 무연분묘로 신고도 해봤지만, 면사무소는 봉분이 없어 무연분묘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 재개된 4·3 유해발굴 사업…희생자 추정 유해 3구 발견

제주 4·3 평화재단과 제주 4·3연구소는 이러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제주도 내 7곳을 올해 4·3 유해발굴지로 결정했습니다.

4·3 당시 초토화 작전이 펼쳐졌던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를 비롯해 4·3 피난민들이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진 서귀포시 색달동 돌오름 인근 등입니다.



유해발굴 작업은 1948년 12월 초토화 작전이 펼쳐지며 대규모 집단학살이 있었던 표선면 가시리부터 시작됐습니다. 발굴 이전 4·3의 영령을 달래는 개토제를 시작으로 시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굴작업 3일 만에 40cm 정도 깊이의 얕은 땅에서 사람 두개골 모양이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현장에서 확인된 것은 40대 남성과 30대 여성, 10대 소년의 유해로 추정되는 머리뼈 3구와 고무신 한 짝이었습니다. 강군섭 할아버지의 증언이 있던 바로 그곳입니다.


특히, 유해가 나온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토굴 형태의 피난처가 발견됐고, 그곳에서는 숟가락이 발견됐습니다.

발굴조사에 참여한 박근태 일영문화유산연구원장은 "정확한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이번에 발견된 유해는 가시리 초토화 작전 때 토굴을 파고 숨어서 지내다가 토벌대에 발각돼 희생된 주민들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찾지 못한 뼈 한 줌…15년 동안 발굴한 405구의 유해

2019년 12월 나온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73년 전 제주4·3사건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은 3천610명에 이릅니다. 하지만 2006년부터 시작된 제주도 내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발굴한 유해는 405구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행방불명인 10명 가운데 8~9명은 뼈 한 줌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유해를 찾았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굴 유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것은 133구가 고작. 272구는 아직 이름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법의학 기술도 발달하며 조금씩 희망은 보이고 있습니다. 4·3 유해발굴 유전자 감식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법의학연구실은 종전 STR(염기서열반복구간 검사)방식에서 향상된 검사방식인 SNP(단일염기서열다양성 검사)로 검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 친부모나 자식 관계만 판별할 수 있던 유전자 감식 방법은 방계 6촌까지 판별할 수 있도록 확대됐습니다. 다만,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4·3 희생자 유족들의 참여가 절실합니다.

서울대학교 법의학과 이숭덕 교수는 "발굴 유해의 신원확인에는 유가족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며 "올해도 유가족 시료 채취 작업이 진행되는 만큼 주위에도 적극적으로 알려서 좀 더 많은 희생자를 가족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조했습니다.

빨갱이로 몰리며 겪은 억울한 옥살이…행방불명된 수형인들

제주 4·3 당시 일명 빨갱이로 낙인 찍히며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제주도민은 4,327명. 적법한 절차도 없이 내란실행과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군사재판 또는 일반재판에 회부돼 대전과 전주, 대구 등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수형된 이들의 대부분은 1950년 터진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이미 빨갱이로 낙인 찍힌 이들이 한국전쟁에서 북한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며 무차별 학살한 겁니다.

4.3 수형인 희생자 가운데 1천763명은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끌려가 총살된 뒤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만 될 뿐 아직 뼈 한 줌조차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인이 됐습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과 대구 가창골을 비롯해 대전 골령골, 전주 황방산 등은 당시 대구와 대전, 전주 형무소에 수감됐던 이들이 학살된 암매장지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제주 4·3사건 수형인들도 이곳 수형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만큼 해당 학살지의 유해를 찾아보면 4·3사건의 희생자를 찾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건은 국비 확보입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인 만큼 국비 확보가 절실하지만, 현재로써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 지방자치단체 예산 등에만 의존하는 게 현실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해발굴을 담당한 노용석 부경대학교 교수는 "인간의 도리로써 유해발굴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유해발굴할 수 있는 법률적 조건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유해발굴 사업이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다"고 진단합니다.

고령이 된 유족…포기할 수 없는 유해발굴

제주 4·3사건이 발발한 지도 벌써 73년. 4·3사건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유족들도 벌써 73살의 고령이 됐습니다. 이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건 "시간이 많지 않다" 입니다.

전주형무소 4·3 수형인 희생자 유족인 김광우 할아버지는 "우리 부모의 뼈 한마디라도 뼛가루라도 제주도로 모시고 오는 게 남은 인생의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학형 4·3행방불명 수형인 유족 역시 "이제 곧 팔십이 되는 만큼 부모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며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유해발굴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다가오는 제주 4·3은 3일 73주년을 맞이합니다. 21년 만에 4·3 특별법도 전부 개정되는 등 과거 말 못했던 아픔은 이제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때, 진정한 제주의 봄이 시작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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