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입구에 택배 상자 수천 개 쌓인 이유는?

입력 2021.04.02 (14:37) 수정 2021.04.03 (10:3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요약

아파트 단지 ‘택배차량 지상 출입 거부’ 갈등
택배 물량 ‘수천 개’ 출입구에…도난·손상 우려
택배 트럭 높이 2.5m인데 지하주차장 높이는 2.3m
‘다산신도시 택배대란’ 그후…법 개정에도 갈등 여전


어제(1일) 낮 4시쯤,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모습입니다. 다양한 크기의 택배 상자 수천 개가 출입구에 탑처럼 쌓여있습니다. 널브러진 상자 행렬 가운데, 한 택배 기사가 힘에 부친 듯 고개를 숙이고 쭈그려 앉아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5천 세대 규모의 대단지 신축 아파트 출입구가 마치 택배 물류장처럼 변해버린 이 상황,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현장을 찾아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 "택배 차량 지상출입 제한" 손수레 끌고, 자전거타고…

이 아파트는 어제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겠다'고 택배회사 측과 입주민에게 공지했습니다. 입주자들과 관리센터 측이 '안전상'의 이유로 내린 결정입니다. 택배 차량이 지상으로 다니면 아파트 시설물을 파손하거나 아이들이 다칠 우려가 있다는 게 주된 이유입니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택배 기사들은 출입구에 택배를 쌓아두고, 고객들에게 전화로 택배를 찾아가라고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53동 규모로, 신축 아파트가 늘어선 고덕지구에서도 가장 큰 대단지에 속합니다. 출입구와 반대쪽에 있는 주민의 경우 왕복 1.4km를 걸어야 택배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당장 입주민의 불편이 이어졌습니다. 전날까지 문 앞에서 택배를 받던 주민들은 택배를 직접 찾으러 와야 한단 설명에 당황한 모습이었습니다. 현장에선 "언제까지 이렇게 하느냐", "너무 불편하다", "반품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의가 이어졌습니다. 일부 주민은 아예 손수레나 자전거를 챙겨와 택배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택배 기사는 "입주민들에게 전화와 문자로 상황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직 택배를 반도 전달하지 못한 상태"라며 "남은 짐은 우리가 다시 물류창고로 가지고 갔다가 다음날 들고 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업무량이 배로 늘어가게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어제(1일)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은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어제(1일)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은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

■ 지하주차장 높이 2.3m…"진입조차 못해"

단지 양쪽이 '불편함'만 감수하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택배를 아파트 출입구에 쌓아둘 경우, 분실 위험이 커지고 비가 오면 물건이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엔 코로나19로 외식을 줄이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택배로 음식물을 시키기도 하는데, 실온에 장시간 둘 경우 내용물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측은 택배로 생기는 모든 문제는 택배 기사의 책임이라는 입장입니다. 택배 회사 쪽에 아파트 지침을 미리 알렸던 만큼, 문제에 따른 대안을 마련해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파트 관리센터 직원은 "택배 기사들이 책임감 없이 택배 물건을 입구에 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측의 요구처럼 택배 기사가 지하로 출입하기엔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구 높이는 2.3m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택배 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트럭의 높이는 2.5m이고, 냉장기능을 갖춘 탑차는 2.7m에 달했습니다. 대부분 지하주차장에 진입조차 못 하는 겁니다.

아파트 측은 택배 기사가 작은 차를 이용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코로나19로 늘어난 물량을 고려하지 않은 요구라고 택배 기사들은 말합니다. 한 택배 기사는 "작은 트럭엔 물량을 다 싣지 못해 물류센터에 여러 번 다시 가야 하는데, 그럴 경우 하루 안에 일을 다 끝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택배 기사 역시 "우리는 개인사업자기 때문에 차를 바꾸는 건 택배 기사가 개인 부담을 해야 하는데 이 아파트로 배송하기 위해 차를 바꾸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습니다.

아파트 주민이 택배기사에게 받은 안내문자(왼쪽) / 제한높이가 2.3m인 해당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 모습(오른쪽)아파트 주민이 택배기사에게 받은 안내문자(왼쪽) / 제한높이가 2.3m인 해당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 모습(오른쪽)

■곳곳서 택배갈등…제2, 제3의 다산신도시 사태

신도시나 신축 아파트의 택배 차량 출입 문제로 인한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8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신도시에서 아파트 입주민들이 택배 차량 진입을 거부했던 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파트 입주민들의 '갑질' 문제로까지 확장된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다산 신도시에서 지상층 차량 진입 금지를 시행한 단지는 10여 곳으로 늘었고, 인천 송도 신도시에서도 택배 차량 출입 제한으로 기사들이 출입구에서 택배를 전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도권 신도시 위주로 이어져 오던 문제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서울 강동 고덕지구까지 번진 겁니다.

정부는 과거 다산 신도시에서 문제가 발생한 이후, 지상공원형 아파트에 한해 지하주차장 입구 높이를 2.7m로 상향하도록 법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강동 고덕지구 아파트처럼 개정 이전에 승인을 받아 놓은 아파트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바뀐 법과 현실이 엇박자를 내며, 곳곳에서 갈등이 불거지는 모습입니다.

택배 기사들의 현실과 아파트 입주민들의 불안감을 고려한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 걸까요. 강민욱 택배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택배 기사들의 과로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요즘, 이런 상황은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며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내린 조치라면, 아파트 차원에서 택배를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택배보관소'를 설치하는 등 여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아파트 입구에 택배 상자 수천 개 쌓인 이유는?
    • 입력 2021-04-02 14:37:46
    • 수정2021-04-03 10:39:20
    취재K
아파트 단지 ‘택배차량 지상 출입 거부’ 갈등<br />택배 물량 ‘수천 개’ 출입구에…도난·손상 우려<br />택배 트럭 높이 2.5m인데 지하주차장 높이는 2.3m<br />‘다산신도시 택배대란’ 그후…법 개정에도 갈등 여전

어제(1일) 낮 4시쯤,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모습입니다. 다양한 크기의 택배 상자 수천 개가 출입구에 탑처럼 쌓여있습니다. 널브러진 상자 행렬 가운데, 한 택배 기사가 힘에 부친 듯 고개를 숙이고 쭈그려 앉아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5천 세대 규모의 대단지 신축 아파트 출입구가 마치 택배 물류장처럼 변해버린 이 상황,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현장을 찾아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 "택배 차량 지상출입 제한" 손수레 끌고, 자전거타고…

이 아파트는 어제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겠다'고 택배회사 측과 입주민에게 공지했습니다. 입주자들과 관리센터 측이 '안전상'의 이유로 내린 결정입니다. 택배 차량이 지상으로 다니면 아파트 시설물을 파손하거나 아이들이 다칠 우려가 있다는 게 주된 이유입니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택배 기사들은 출입구에 택배를 쌓아두고, 고객들에게 전화로 택배를 찾아가라고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53동 규모로, 신축 아파트가 늘어선 고덕지구에서도 가장 큰 대단지에 속합니다. 출입구와 반대쪽에 있는 주민의 경우 왕복 1.4km를 걸어야 택배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당장 입주민의 불편이 이어졌습니다. 전날까지 문 앞에서 택배를 받던 주민들은 택배를 직접 찾으러 와야 한단 설명에 당황한 모습이었습니다. 현장에선 "언제까지 이렇게 하느냐", "너무 불편하다", "반품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의가 이어졌습니다. 일부 주민은 아예 손수레나 자전거를 챙겨와 택배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택배 기사는 "입주민들에게 전화와 문자로 상황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직 택배를 반도 전달하지 못한 상태"라며 "남은 짐은 우리가 다시 물류창고로 가지고 갔다가 다음날 들고 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업무량이 배로 늘어가게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어제(1일)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은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
■ 지하주차장 높이 2.3m…"진입조차 못해"

단지 양쪽이 '불편함'만 감수하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택배를 아파트 출입구에 쌓아둘 경우, 분실 위험이 커지고 비가 오면 물건이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엔 코로나19로 외식을 줄이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택배로 음식물을 시키기도 하는데, 실온에 장시간 둘 경우 내용물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측은 택배로 생기는 모든 문제는 택배 기사의 책임이라는 입장입니다. 택배 회사 쪽에 아파트 지침을 미리 알렸던 만큼, 문제에 따른 대안을 마련해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파트 관리센터 직원은 "택배 기사들이 책임감 없이 택배 물건을 입구에 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측의 요구처럼 택배 기사가 지하로 출입하기엔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구 높이는 2.3m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택배 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트럭의 높이는 2.5m이고, 냉장기능을 갖춘 탑차는 2.7m에 달했습니다. 대부분 지하주차장에 진입조차 못 하는 겁니다.

아파트 측은 택배 기사가 작은 차를 이용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코로나19로 늘어난 물량을 고려하지 않은 요구라고 택배 기사들은 말합니다. 한 택배 기사는 "작은 트럭엔 물량을 다 싣지 못해 물류센터에 여러 번 다시 가야 하는데, 그럴 경우 하루 안에 일을 다 끝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택배 기사 역시 "우리는 개인사업자기 때문에 차를 바꾸는 건 택배 기사가 개인 부담을 해야 하는데 이 아파트로 배송하기 위해 차를 바꾸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습니다.

아파트 주민이 택배기사에게 받은 안내문자(왼쪽) / 제한높이가 2.3m인 해당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 모습(오른쪽)
■곳곳서 택배갈등…제2, 제3의 다산신도시 사태

신도시나 신축 아파트의 택배 차량 출입 문제로 인한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8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신도시에서 아파트 입주민들이 택배 차량 진입을 거부했던 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파트 입주민들의 '갑질' 문제로까지 확장된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다산 신도시에서 지상층 차량 진입 금지를 시행한 단지는 10여 곳으로 늘었고, 인천 송도 신도시에서도 택배 차량 출입 제한으로 기사들이 출입구에서 택배를 전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도권 신도시 위주로 이어져 오던 문제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서울 강동 고덕지구까지 번진 겁니다.

정부는 과거 다산 신도시에서 문제가 발생한 이후, 지상공원형 아파트에 한해 지하주차장 입구 높이를 2.7m로 상향하도록 법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강동 고덕지구 아파트처럼 개정 이전에 승인을 받아 놓은 아파트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바뀐 법과 현실이 엇박자를 내며, 곳곳에서 갈등이 불거지는 모습입니다.

택배 기사들의 현실과 아파트 입주민들의 불안감을 고려한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 걸까요. 강민욱 택배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택배 기사들의 과로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요즘, 이런 상황은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며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내린 조치라면, 아파트 차원에서 택배를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택배보관소'를 설치하는 등 여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