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초대석]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입력 2021.04.03 (21:16) 수정 2021.04.0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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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4·3 73주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기간 3번째로 추념식에 참석해서 '국가 폭력에 빼앗긴 것들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으로 국가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죠.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과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강요배 화백 그림과 현기영 선생 소설 한 구절입니다. 아직도 4·3을 모르시거나 혹은 반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좀 어려운 질문이지만 4·3은 한 마디로 어떤 사건일까요?

[답변]

1948년 미 군정 시절인데요. 4·3은 제주도민 탄압에 대한 저항, 그 당시 단독 선거가 있었는데, 남한 만의 단독 선거, 그것을 반대는 하는 운동 한마디로 말해서 통일운동으로 정리할 수가 있죠. 그래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앵커]

그 과정에서 굉장히 무고한 희생이 많았는데, 현재까지 공식 희생자가 1만 4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보다 더 많겠죠?

[답변]

네, 우리 정부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고요. 현재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4·3위원회에 신청에서 확정된 1만 4천533명, 그런데 지금 추가 신고를 계속 받고 있어서 희생자 숫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앵커]

당시 제주 인구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인 거죠?

[답변]

그러니까 거의 10분의 1에 희생이 됐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앵커]

도내 10분의 1이 희생됐다, 이게 사실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이 행불 희생자라고 하는 분들이 4천 명이 넘고 지금도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답변]

그렇습니다. 지금 세월이 7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유해를 찾지 못한 행방불명 희생자가 무려 4천 명이 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가족의 유해를 찾아서 묘소를 마련한 유족의 한과 아직도 자신의 가족의 시신을 못 찾아서, 진짜 그 유족들의 한은 다르죠. 그래서 저희들이 계속 끊임없이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고, 지금까지 408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에 의뢰해서 그 가운데 133구의 신원을 확인하기도 했죠. 그리고 엊그제 바로 표선 가시리라는 마을에서 초토화 작전에 희생된 가족 3구의 유해를 발굴한 바도 있습니다.

[앵커]

제주를 주로 관광들을 자주 가시는데, 그 관광객들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 공항인데, 공항에서도 유해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됐었죠?

[답변]

그러니까 활주로가 있는데, 활주로에서 150m 너머로 파고 들어갔는데, 무려 387구가 쏟아져 나온 거예요. 그걸 그냥 놔두고 우리는 60여 년, 70여 년 동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런 세월을 보내온 거죠.

[앵커]

참 기막힌 역사인 것 같습니다. 이게 4·3이 알려진 건 사실 얼마 안 됐습니다. 지역 언론의 역할이 참 컸는데, 이사장님께서는 제민일보죠. 4·3 취재반장을 하셨습니다. 당시 어려움이 있으셨죠?

[답변]

33년 전, 1988년에 4·3 취재반장을 받아서 이 이 역사에 진실을 찾아 나서는 작업을 시작했죠. 그래서 신문 연재를 무려 12년간, 연재 횟수만 513회, 아마 한국 언론사에 새로운 신기록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끊임없는 작업을 해왔죠. 바로 그런 작업이 하나의 토대가 되어서, 4·3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그 후에 대통령 사과, 국가 기념일 지정, 이번 법이 개정되면서 피해자들에게 배·보상, 또 수형자들은 명예회복, 그런 길이 마련돼서 나름대로 보람도 느끼고 있습니다.

[앵커]

언론인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아까 잠시 소개해드린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 삼촌'도 큰 역할을 했죠?

[답변]

그렇죠. 1978년에 4·3 참혹한 것을 소설로 세상에 알렸죠. 세상은 깜짝 놀랐죠. 그리고 그 작가는 군 보안부대에 끌려가서 매우 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앵커]

4·3을 알리는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도 고초를 겼었죠.

[답변]

소설뿐만 아니라 시를 써도, 4·3을 연구해도, 자료를 모아도,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그런 죄목을 씌워서 구속 시켰죠.

[앵커]

이제 시간이 흘러서 최근에 4·3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가 됐습니다. 지금 이사장님께서 계신 4·3평화재단이 앞으로 상당히 할 일이 많아졌는데, 어떤 일을 해야 되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좀 설명해주시죠.

[답변]

먼저 추가 진상 조사인데요. 2003년에 우리나라 과거사로서는 처음으로 4·3 진상 조사 보고서가 나옵니다. 그 보고서로 그 결과로 인해서 대통령이 사과까지 한 거죠. 그 후에 뜸했는데, 이번에 법 개정을 통해서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4·3위원회에서 다시 추가 진상 조사하도록 그렇게 이번에 규정이 됐습니다. 다만 실무 작업은 저희 4·3평화재단에서 하게 되는데, 저 나름대로 그동안 좀 미진했던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실태를 철저히 조사해야 되겠다, 그리고 또 미군의 책임 문제도 다루어야겠다, 연좌제 피해,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4·3의 바른 이름, 즉 정명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 그런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앵커]

유해 발굴 같은 경우는 지금 4·3평화재단 규모로 가능합니까?

[답변]

지금 정부가 지원을 하고요. 제주도하고 평화재단이 합심해서 금년에도 8억7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서 유해 발굴, 발굴된 유해에 대한 신원 확인 작업, 이것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바쁘셔야 희생자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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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03 21:16:52
    • 수정2021-04-03 22: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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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4·3 73주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기간 3번째로 추념식에 참석해서 '국가 폭력에 빼앗긴 것들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으로 국가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죠.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과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강요배 화백 그림과 현기영 선생 소설 한 구절입니다. 아직도 4·3을 모르시거나 혹은 반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좀 어려운 질문이지만 4·3은 한 마디로 어떤 사건일까요?

[답변]

1948년 미 군정 시절인데요. 4·3은 제주도민 탄압에 대한 저항, 그 당시 단독 선거가 있었는데, 남한 만의 단독 선거, 그것을 반대는 하는 운동 한마디로 말해서 통일운동으로 정리할 수가 있죠. 그래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앵커]

그 과정에서 굉장히 무고한 희생이 많았는데, 현재까지 공식 희생자가 1만 4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보다 더 많겠죠?

[답변]

네, 우리 정부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고요. 현재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4·3위원회에 신청에서 확정된 1만 4천533명, 그런데 지금 추가 신고를 계속 받고 있어서 희생자 숫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앵커]

당시 제주 인구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인 거죠?

[답변]

그러니까 거의 10분의 1에 희생이 됐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앵커]

도내 10분의 1이 희생됐다, 이게 사실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이 행불 희생자라고 하는 분들이 4천 명이 넘고 지금도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답변]

그렇습니다. 지금 세월이 7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유해를 찾지 못한 행방불명 희생자가 무려 4천 명이 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가족의 유해를 찾아서 묘소를 마련한 유족의 한과 아직도 자신의 가족의 시신을 못 찾아서, 진짜 그 유족들의 한은 다르죠. 그래서 저희들이 계속 끊임없이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고, 지금까지 408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에 의뢰해서 그 가운데 133구의 신원을 확인하기도 했죠. 그리고 엊그제 바로 표선 가시리라는 마을에서 초토화 작전에 희생된 가족 3구의 유해를 발굴한 바도 있습니다.

[앵커]

제주를 주로 관광들을 자주 가시는데, 그 관광객들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 공항인데, 공항에서도 유해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됐었죠?

[답변]

그러니까 활주로가 있는데, 활주로에서 150m 너머로 파고 들어갔는데, 무려 387구가 쏟아져 나온 거예요. 그걸 그냥 놔두고 우리는 60여 년, 70여 년 동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런 세월을 보내온 거죠.

[앵커]

참 기막힌 역사인 것 같습니다. 이게 4·3이 알려진 건 사실 얼마 안 됐습니다. 지역 언론의 역할이 참 컸는데, 이사장님께서는 제민일보죠. 4·3 취재반장을 하셨습니다. 당시 어려움이 있으셨죠?

[답변]

33년 전, 1988년에 4·3 취재반장을 받아서 이 이 역사에 진실을 찾아 나서는 작업을 시작했죠. 그래서 신문 연재를 무려 12년간, 연재 횟수만 513회, 아마 한국 언론사에 새로운 신기록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끊임없는 작업을 해왔죠. 바로 그런 작업이 하나의 토대가 되어서, 4·3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그 후에 대통령 사과, 국가 기념일 지정, 이번 법이 개정되면서 피해자들에게 배·보상, 또 수형자들은 명예회복, 그런 길이 마련돼서 나름대로 보람도 느끼고 있습니다.

[앵커]

언론인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아까 잠시 소개해드린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 삼촌'도 큰 역할을 했죠?

[답변]

그렇죠. 1978년에 4·3 참혹한 것을 소설로 세상에 알렸죠. 세상은 깜짝 놀랐죠. 그리고 그 작가는 군 보안부대에 끌려가서 매우 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앵커]

4·3을 알리는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도 고초를 겼었죠.

[답변]

소설뿐만 아니라 시를 써도, 4·3을 연구해도, 자료를 모아도,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그런 죄목을 씌워서 구속 시켰죠.

[앵커]

이제 시간이 흘러서 최근에 4·3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가 됐습니다. 지금 이사장님께서 계신 4·3평화재단이 앞으로 상당히 할 일이 많아졌는데, 어떤 일을 해야 되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좀 설명해주시죠.

[답변]

먼저 추가 진상 조사인데요. 2003년에 우리나라 과거사로서는 처음으로 4·3 진상 조사 보고서가 나옵니다. 그 보고서로 그 결과로 인해서 대통령이 사과까지 한 거죠. 그 후에 뜸했는데, 이번에 법 개정을 통해서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4·3위원회에서 다시 추가 진상 조사하도록 그렇게 이번에 규정이 됐습니다. 다만 실무 작업은 저희 4·3평화재단에서 하게 되는데, 저 나름대로 그동안 좀 미진했던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실태를 철저히 조사해야 되겠다, 그리고 또 미군의 책임 문제도 다루어야겠다, 연좌제 피해,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4·3의 바른 이름, 즉 정명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 그런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앵커]

유해 발굴 같은 경우는 지금 4·3평화재단 규모로 가능합니까?

[답변]

지금 정부가 지원을 하고요. 제주도하고 평화재단이 합심해서 금년에도 8억7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서 유해 발굴, 발굴된 유해에 대한 신원 확인 작업, 이것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바쁘셔야 희생자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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