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와 미술이 만나면?…<2021: 판타지 오디세이>

입력 2021.04.0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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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건이었습니다. SF 작가를 KBS 9시 뉴스에 등장시키다니. 처음엔 저도 이런 기획을 해도 되나 싶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계기는 있었습니다.

한국 SF 작가의, 그것도 SF소설이, 이 장르의 본토인 미국에 판권을 수출한다는 소식이었죠. 어떻게 할까, 한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작가의 소설을 몇 권 사서 읽은 뒤, 아주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KTX에 몸을 싣고 작가를 만나러 강원도 평창으로 향했습니다.

[연관 기사]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SF소설…‘SF 강국’ 美에 첫 판권 수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35851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보영은 그때 이미 한국 SF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였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한국 작가가 최초로 휴고상(가장 권위 있는 SF 문학상의 하나)을 받는다면, 그 주인공은 김보영 작가일 거라고. 소설로 SF를 접하는 데 무지했던 저는 그때부터 김보영을 비롯한 여러 작가의 SF를 부지런히 읽어나갔습니다.

지금이야 SF가 장르문학이란 편견을 딛고 우리 문학계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김보영 작가를 인터뷰할 때만 해도 SF가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몰라보게 달라진 한국 SF의 위상을 실감하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전시회입니다.

김보영 작가가 고른 문장을 재해석한 구현성 작가의 디지털 페인팅김보영 작가가 고른 문장을 재해석한 구현성 작가의 디지털 페인팅

거장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따왔음이 분명한 전시 제목부터 인상적이죠.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라.

입구를 지나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그림과 문구들이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김보영 작가가 골라낸, SF 역사를 빛낸 기념비적인 문장 스물다섯 개 가운데 여섯 개를 골라내, 시각예술가 구현성이 실험 만화 연작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소설의 문장과 그림이 조응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죠. 장밋빛 전망, 경고, 사회비판, 소외된 자들, 모험, 새로운 세상 등 여섯 가지 주제를 골라낸 안목은 역시 김보영답다고 할 만합니다.

구현성 작가의 디지털 페인팅과 작품에 영감을 준 소설의 문장구현성 작가의 디지털 페인팅과 작품에 영감을 준 소설의 문장

이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전시를 체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해당 문구들이 수록된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그 의미가 더 확연히 다가오겠죠. 하지만 원작을 읽지 않은 관람객도 문장들이 가진 힘과 에너지를 느끼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SF와 대단히 친숙합니다. 아니, 어릴 때부터 TV에서 본 공상과학 만화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얼마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마징가 Z>부터 <은하철도 999>까지 SF는 늘 우리 삶의 일부였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루시 매크래 <제작자>, 2012,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분 3초루시 매크래 <제작자>, 2012,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분 3초

게다가 이젠 소설로도 제법 익숙하죠. 김보영 작가가 대표적으로 꼽는 작품이 바로 한국 독자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들입니다.

베르베르의 소설은 SF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죠. 이렇게 영화로 먼저 접하고, 소설로도 이젠 익숙해졌는데, 그렇다면 미술은 어떨까. 미술은 미래를 어떻게 그리는가.

이 전시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글과 이미지를 결합하고, SF적 정서를 탐구한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왜 지금 SF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보게 됩니다. 듀나, 배명훈, 김보영 작가들의 문장을 손에 쥔 미술가들이 회화, 디지털페인팅, 사진, 영상, 사운드, 설치 등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답을 찾아갑니다.

양아치 <태양계>, 2021, 스크린, 사운드, 가변크기양아치 <태양계>, 2021, 스크린, 사운드, 가변크기

코로나 이후에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세계적인 대유행 덕분에 우리는 '미래'를 조금 더 많이, 자주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코로나가 바꾼 것들 가운데 하나죠.

분명한 건 예측 가능성이 더 흐려졌다는 점이죠. 과연 이 길고 지루하고 답답한 유행 상황이 언제쯤 끝날까. 정말 운 좋게 끝난다면 그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의 변화는 SF라는 장르가 가진 상상력의 범위가 우리 삶 안으로 이미 성큼 들어왔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더없이 시의적절하고 충분히 주목해도 좋을 전시회입니다. 또 하나, 이 전시는 순서대로 감상하기보다는 내키는 대로, 끌리는 대로 보아야 더 좋습니다.

SF가 말하는 것이 과연 미래의 이야기일까요? 아니, 그것은 지금, 바로, 여기,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전시 정보
제목: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일시: 2021년 5월 30일(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실 1, 2
작품: 회화, 디지털페인팅, 사진, 영상, 사운드, 설치, 텍스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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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F와 미술이 만나면?…<2021: 판타지 오디세이>
    • 입력 2021-04-06 08:02:58
    취재K
그것은 사건이었습니다. SF 작가를 KBS 9시 뉴스에 등장시키다니. 처음엔 저도 이런 기획을 해도 되나 싶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계기는 있었습니다.

한국 SF 작가의, 그것도 SF소설이, 이 장르의 본토인 미국에 판권을 수출한다는 소식이었죠. 어떻게 할까, 한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작가의 소설을 몇 권 사서 읽은 뒤, 아주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KTX에 몸을 싣고 작가를 만나러 강원도 평창으로 향했습니다.

[연관 기사]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SF소설…‘SF 강국’ 美에 첫 판권 수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35851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보영은 그때 이미 한국 SF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였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한국 작가가 최초로 휴고상(가장 권위 있는 SF 문학상의 하나)을 받는다면, 그 주인공은 김보영 작가일 거라고. 소설로 SF를 접하는 데 무지했던 저는 그때부터 김보영을 비롯한 여러 작가의 SF를 부지런히 읽어나갔습니다.

지금이야 SF가 장르문학이란 편견을 딛고 우리 문학계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김보영 작가를 인터뷰할 때만 해도 SF가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몰라보게 달라진 한국 SF의 위상을 실감하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전시회입니다.

김보영 작가가 고른 문장을 재해석한 구현성 작가의 디지털 페인팅
거장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따왔음이 분명한 전시 제목부터 인상적이죠.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라.

입구를 지나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그림과 문구들이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김보영 작가가 골라낸, SF 역사를 빛낸 기념비적인 문장 스물다섯 개 가운데 여섯 개를 골라내, 시각예술가 구현성이 실험 만화 연작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소설의 문장과 그림이 조응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죠. 장밋빛 전망, 경고, 사회비판, 소외된 자들, 모험, 새로운 세상 등 여섯 가지 주제를 골라낸 안목은 역시 김보영답다고 할 만합니다.

구현성 작가의 디지털 페인팅과 작품에 영감을 준 소설의 문장
이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전시를 체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해당 문구들이 수록된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그 의미가 더 확연히 다가오겠죠. 하지만 원작을 읽지 않은 관람객도 문장들이 가진 힘과 에너지를 느끼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SF와 대단히 친숙합니다. 아니, 어릴 때부터 TV에서 본 공상과학 만화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얼마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마징가 Z>부터 <은하철도 999>까지 SF는 늘 우리 삶의 일부였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루시 매크래 <제작자>, 2012,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분 3초
게다가 이젠 소설로도 제법 익숙하죠. 김보영 작가가 대표적으로 꼽는 작품이 바로 한국 독자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들입니다.

베르베르의 소설은 SF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죠. 이렇게 영화로 먼저 접하고, 소설로도 이젠 익숙해졌는데, 그렇다면 미술은 어떨까. 미술은 미래를 어떻게 그리는가.

이 전시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글과 이미지를 결합하고, SF적 정서를 탐구한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왜 지금 SF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보게 됩니다. 듀나, 배명훈, 김보영 작가들의 문장을 손에 쥔 미술가들이 회화, 디지털페인팅, 사진, 영상, 사운드, 설치 등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답을 찾아갑니다.

양아치 <태양계>, 2021, 스크린, 사운드, 가변크기
코로나 이후에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세계적인 대유행 덕분에 우리는 '미래'를 조금 더 많이, 자주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코로나가 바꾼 것들 가운데 하나죠.

분명한 건 예측 가능성이 더 흐려졌다는 점이죠. 과연 이 길고 지루하고 답답한 유행 상황이 언제쯤 끝날까. 정말 운 좋게 끝난다면 그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의 변화는 SF라는 장르가 가진 상상력의 범위가 우리 삶 안으로 이미 성큼 들어왔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더없이 시의적절하고 충분히 주목해도 좋을 전시회입니다. 또 하나, 이 전시는 순서대로 감상하기보다는 내키는 대로, 끌리는 대로 보아야 더 좋습니다.

SF가 말하는 것이 과연 미래의 이야기일까요? 아니, 그것은 지금, 바로, 여기,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전시 정보
제목: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일시: 2021년 5월 30일(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실 1, 2
작품: 회화, 디지털페인팅, 사진, 영상, 사운드, 설치, 텍스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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