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먹는 돼지가 운동장을 달릴 수 있으려면?

입력 2021.04.0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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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저렇게 빨랐던가요..?"

축사 외에 마련해 둔 '돼지 운동장'. 돼지 한 마리가 이곳을 가로질러 질주했습니다. 돼지를 처음 보는 취재진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널브러져 초봄 햇볕을 즐기고, 흥미로운 듯 취재진 쪽으로 다가와 코를 벌름대는 돼지도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지금까지 알던 돼지는 대형마트에 진열된 상품으로서의 돼지였습니다. 돼지라기보다는 삼겹살, 목살, 등심을 접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겁니다. 그나마 취재 전 미리 찾아본 '돼지 축사' 자료 화면들엔 앉고 설 수밖에 없는 사육 틀이나 좁은 돈방이 전부였으니, 돼지가 이렇게 잘 뛰는 동물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 운동장 달리는 돼지들

이곳은 경남 거창에 위치한 한 동물복지 농가입니다. 5년 전 돼지 농장으로는 최초로 동물복지 인증을 받았습니다. KBS는 지난달 17일 이 농장을 찾아 직접 돼지들을 만나봤습니다.

'돼지가 돼지답게 클 수 있게 하는 것'. 김문조 씨가 생각하는 동물복지입니다. 그는 동물복지란 돼지한테 모든 것을 맞춰 주거나 생활을 호화롭게 하는 것이 아닌, 돼지의 고유 본능이 발휘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사육 틀을 없애고 돼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면적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돼지가 반려동물이 아닌 축산동물이며, 따라서 생산성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처음 동물복지를 시작한 것도 더운 여름날 좁은 스톨(사육 틀)에서 체온조절을 못 하는 돼지들이 자꾸 죽어 나가자, 폐사율을 낮추기 위해 알아서 시원한 곳을 찾으라고 스톨을 없앤 게 시작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반 돼지 농가에 비해 축사별로 2~3배 큰 공간을 갖췄고, 개별 돼지의 취향에 맞게 움직이라는 뜻에서 돼지 운동장도 조성했습니다. 바닥엔 국내 유기농 농가에서 나오는 왕겨와 보릿짚을 가득 깔았습니다. 심심할 때 씹고 머리를 박고 잠도 자니, 최고의 놀잇감이자 잠자리입니다. 스트레스가 줄고 면역력이 높아 항생제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그랬더니 남은 돼지들은 마리당 더 높은 생산성으로 보답했습니다.

일반 농가에서는 100마리가 태어나면 출하 단계까지 일반적으로 10마리가량이 죽는데 김 씨 농가는 2마리로 적은 편입니다. 또 1kg을 찌우는 데 일반 돼지는 3.37kg의 사료를 먹여야 한다면, 이곳 돼지들은 2.7kg 정도만 먹어도 됩니다. 출산 횟수도 늘었습니다. 보통 어미 돼지 한 마리당 6~7번 출산하면 더 이상 새끼를 못 낳는데, 이 농장 돼지들은 8~9번까지도 낳습니다.


물론 매출은 줄었습니다. 만약 일반 농가들처럼 스톨을 썼다면 4천5백 마리를 기를 수 있는 공간에 2천5백 마리만 기르는 데다, 면적에 따른 인건비나 시설비가 추가로 드니 매출 감소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매출이 다소 줄더라도, 오로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죽는 돼지들을 위해 인간이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다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자는 겁니다.

■ "동물복지, 도전하고 싶어도 어려워"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동물복지를 시작하는 것은 모험에 가깝습니다. 장애물은 많고, 그나마 있는 동물복지 인증제도는 인증마크 하나 붙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지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복지 돼지는 높은 생산비용에도 경매장에서의 가격은 일반돼지와 똑같이 책정됩니다. 생협, 대형마트, 직거래 등 다른 유통단계를 뚫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넓은 면적이 동물복지의 기본인데, 사육두수를 유지하면서 면적을 넓히려 해도 가축사육제한지역이 점점 넓어지면서 증축 허가가 거의 안 나는 상황입니다. 도전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겁니다.

■ " 시장에서 요구하면 바뀐다"

'시장이 요구하면 그제야 바뀌더라'. 취재진이 만난 동물복지 농가와 일반 농가가 모두 한목소리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동물복지 제품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동물복지 제품 시장이 형성되면, 아무리 정부가 무관심하고 생산비용이 좀 더 들어도 맞춰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올라가고 이를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고기를 먹는 대체육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누구나 채식을 시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만큼, 동물복지 상품은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동물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분담하고 싶은 소비자들에게 하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6일) KBS 1TV '뉴스9'에서는 인간이 먹는 축산동물의 삶과 동물복지에 대해 기획 보도합니다. 오늘은 '공장식 축산'의 대안인 동물복지 농가를 직접 둘러보고 일반 농가에서 동물복지를 시도하기 어려운 이유와 함께 우리가 먹는 축산동물들의 고통을 분담할 방법을 모색해 봅니다. 결국 동물을 위한 동물복지가 인간에게도 이로운 이유를 함께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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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먹는 돼지가 운동장을 달릴 수 있으려면?
    • 입력 2021-04-06 11:49:32
    취재K

"돼지가 저렇게 빨랐던가요..?"

축사 외에 마련해 둔 '돼지 운동장'. 돼지 한 마리가 이곳을 가로질러 질주했습니다. 돼지를 처음 보는 취재진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널브러져 초봄 햇볕을 즐기고, 흥미로운 듯 취재진 쪽으로 다가와 코를 벌름대는 돼지도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지금까지 알던 돼지는 대형마트에 진열된 상품으로서의 돼지였습니다. 돼지라기보다는 삼겹살, 목살, 등심을 접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겁니다. 그나마 취재 전 미리 찾아본 '돼지 축사' 자료 화면들엔 앉고 설 수밖에 없는 사육 틀이나 좁은 돈방이 전부였으니, 돼지가 이렇게 잘 뛰는 동물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 운동장 달리는 돼지들

이곳은 경남 거창에 위치한 한 동물복지 농가입니다. 5년 전 돼지 농장으로는 최초로 동물복지 인증을 받았습니다. KBS는 지난달 17일 이 농장을 찾아 직접 돼지들을 만나봤습니다.

'돼지가 돼지답게 클 수 있게 하는 것'. 김문조 씨가 생각하는 동물복지입니다. 그는 동물복지란 돼지한테 모든 것을 맞춰 주거나 생활을 호화롭게 하는 것이 아닌, 돼지의 고유 본능이 발휘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사육 틀을 없애고 돼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면적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돼지가 반려동물이 아닌 축산동물이며, 따라서 생산성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처음 동물복지를 시작한 것도 더운 여름날 좁은 스톨(사육 틀)에서 체온조절을 못 하는 돼지들이 자꾸 죽어 나가자, 폐사율을 낮추기 위해 알아서 시원한 곳을 찾으라고 스톨을 없앤 게 시작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반 돼지 농가에 비해 축사별로 2~3배 큰 공간을 갖췄고, 개별 돼지의 취향에 맞게 움직이라는 뜻에서 돼지 운동장도 조성했습니다. 바닥엔 국내 유기농 농가에서 나오는 왕겨와 보릿짚을 가득 깔았습니다. 심심할 때 씹고 머리를 박고 잠도 자니, 최고의 놀잇감이자 잠자리입니다. 스트레스가 줄고 면역력이 높아 항생제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그랬더니 남은 돼지들은 마리당 더 높은 생산성으로 보답했습니다.

일반 농가에서는 100마리가 태어나면 출하 단계까지 일반적으로 10마리가량이 죽는데 김 씨 농가는 2마리로 적은 편입니다. 또 1kg을 찌우는 데 일반 돼지는 3.37kg의 사료를 먹여야 한다면, 이곳 돼지들은 2.7kg 정도만 먹어도 됩니다. 출산 횟수도 늘었습니다. 보통 어미 돼지 한 마리당 6~7번 출산하면 더 이상 새끼를 못 낳는데, 이 농장 돼지들은 8~9번까지도 낳습니다.


물론 매출은 줄었습니다. 만약 일반 농가들처럼 스톨을 썼다면 4천5백 마리를 기를 수 있는 공간에 2천5백 마리만 기르는 데다, 면적에 따른 인건비나 시설비가 추가로 드니 매출 감소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매출이 다소 줄더라도, 오로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죽는 돼지들을 위해 인간이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다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자는 겁니다.

■ "동물복지, 도전하고 싶어도 어려워"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동물복지를 시작하는 것은 모험에 가깝습니다. 장애물은 많고, 그나마 있는 동물복지 인증제도는 인증마크 하나 붙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지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복지 돼지는 높은 생산비용에도 경매장에서의 가격은 일반돼지와 똑같이 책정됩니다. 생협, 대형마트, 직거래 등 다른 유통단계를 뚫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넓은 면적이 동물복지의 기본인데, 사육두수를 유지하면서 면적을 넓히려 해도 가축사육제한지역이 점점 넓어지면서 증축 허가가 거의 안 나는 상황입니다. 도전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겁니다.

■ " 시장에서 요구하면 바뀐다"

'시장이 요구하면 그제야 바뀌더라'. 취재진이 만난 동물복지 농가와 일반 농가가 모두 한목소리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동물복지 제품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동물복지 제품 시장이 형성되면, 아무리 정부가 무관심하고 생산비용이 좀 더 들어도 맞춰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올라가고 이를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고기를 먹는 대체육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누구나 채식을 시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만큼, 동물복지 상품은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동물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분담하고 싶은 소비자들에게 하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6일) KBS 1TV '뉴스9'에서는 인간이 먹는 축산동물의 삶과 동물복지에 대해 기획 보도합니다. 오늘은 '공장식 축산'의 대안인 동물복지 농가를 직접 둘러보고 일반 농가에서 동물복지를 시도하기 어려운 이유와 함께 우리가 먹는 축산동물들의 고통을 분담할 방법을 모색해 봅니다. 결국 동물을 위한 동물복지가 인간에게도 이로운 이유를 함께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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