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자금 ‘먹튀’에 80억대 사기대출까지…농협 간부 경찰 수사

입력 2021.04.10 (08:00) 수정 2021.04.1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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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에 사는 원 모 씨는 지인이자 화순 한 농협 간부였던 박 모 씨에게 1억 9천여만 원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는 급성 식도암을 선고받고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원 씨 가족 제공)전남 화순에 사는 원 모 씨는 지인이자 화순 한 농협 간부였던 박 모 씨에게 1억 9천여만 원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는 급성 식도암을 선고받고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원 씨 가족 제공)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사기꾼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한테 그 사람은 거의 살인자나 다름없어요."

취재진과 마주앉은 원 모 씨의 입술이 떨렸습니다. 70살이었던 원 씨의 아버지는 지인인 박 모 씨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박 씨에게 노후자금 1억 9천여만 원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한 겁니다. 박 씨는 원 씨 아버지가 30년간 알고 지내며 조카처럼 여겼던 사람입니다.


돈을 빌려 간 박 씨는 당시 전남 화순의 한 농협 간부였습니다. 이 때문에 원 씨의 아버지는 박 씨가 돈을 갚지 않을 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의 아버지는 급성식도암을 선고받고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었습니다.

유족들이 박 씨를 '사기꾼'이 아닌 '살인마'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박 씨가 저지른 사기행각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KBS 취재 결과, 박 씨가 농협 간부로 재직할 당시 80억 원대 사기대출에도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동산 업자와 공모해 부당 대출을 해준 것인데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인지, 자세히 전해드립니다.


■ 평생 모은 '노후자금' 몽땅 날려…. 급성 식도암으로 세상 떠나

원 모 씨의 통장 사본. 박 씨 측 사람에게 1억 천 만원을 송금했다. (원 씨 가족 제공)원 모 씨의 통장 사본. 박 씨 측 사람에게 1억 천 만원을 송금했다. (원 씨 가족 제공)

원 모 씨의 아버지는 전남 화순에서 작은 사업을 일궈왔습니다. 박 씨에게 빌려준 1억 9천여만 원은 아버지가 평생을 모은 노후자금이자 아들의 결혼자금이었습니다.

박 씨가 원 씨의 아버지에게 접근한 건 지난 2018년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빌라를 하나 지었는데 준공자금을 빌려주면 이자까지 붙여 2억 9천여만 원으로 불려준다고 했습니다. 박 씨는 원 씨 아버지가 지닌 돈이 부족하자, 추가로 대출까지 받게 했습니다.

박 씨가 원 씨에게 돈을 갚겠다며 약속한 공정증서. (원 씨 가족 제공)박 씨가 원 씨에게 돈을 갚겠다며 약속한 공정증서. (원 씨 가족 제공)

하지만 1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박 씨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박 씨는 수차례 공증만 할 뿐 실제로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공증할 때마다 갚겠다는 돈은 늘어났습니다.

공증할 때마다 원 씨의 아버지는 박 씨를 더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그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지인이자 농협 간부였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확인해본 결과 박 씨가 지었다는 제주도 빌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건축물대장도 없는 허위였던 것인데요. 뒤늦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는 급성 식도암을 선고받았습니다.

결국, 투병 3개월만인 지난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 원 씨와 그의 아내. (원 씨 가족 제공)생전 원 씨와 그의 아내. (원 씨 가족 제공)

아들 원 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허망하기 그지없다고 말합니다. 가장 억울한 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박 씨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들 원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이 가시기 전까지도 그 사람을 믿고 있었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라며 "얼마나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그게 다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전남 화순경찰서는 박 씨가 다른 지인들을 상대로도 사기행각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를 미끼로 하거나 사업자금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지인들에게 2억 원이 넘는 돈을 빌려 간 뒤 갚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80억 원대 부당 대출... '간 큰' 농협 간부


박 씨의 사기행각은 더 있습니다. 농협 간부로 있으면서 80억 원대 부당대출을 해준 혐의도 받고 있는데요. 화순의 작은 단위 농협에서 '80억 원'이라니 액수가 어마어마하죠. 경찰이 판단한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부동산 업자 A 씨는 화순의 한 농협에서 지난 2014년부터 4년간 토지담보대출을 받아왔습니다. 횟수만 18차례에 이르고, 금액은 무려 82억 원입니다.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받았는데요. 매매계약서를 위조하거나 담보될 땅의 감정가격을 부풀리는 등의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경찰은 이 과정에 당시 농협 간부였던 박 씨가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감정가격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승인해 줬다는 겁니다. 이렇게 대출받은 82억 원이 어디에 쓰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경찰은 우선 지난해, 부동산업자 A 씨와 박 씨 등 18명을 사기대출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 부당대출 피해…. 조합원 피해로 이어져

박 씨가 사기대출 혐의를 받고 있는 해당 농협의 조합원.박 씨가 사기대출 혐의를 받고 있는 해당 농협의 조합원.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해당 농협의 조합원들은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 몫"이라며 우려하고 있습니다. 부실하게 대출해준 뒤 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조합원들의 적립금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어섭니다.

해당 농협의 조합원 B 씨는 화를 냈습니다. 해당 농협이 이미 연체채권 180억 원 가운데 38억 원 정도를 농협 조합원들의 적립금으로 충당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B 씨는 "몇십 년 동안 5%씩, 3%씩 해서 100% 달성해 놓은 적립금을 빚을 갚는데 써버리면 조합원들에게 피해가 돌아온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경찰은 박 씨가 최근 부동산 아파트 담보대출 과정에서 7억 9천여만 원을 부당하게 대출한 정황을 확인하고 보강수사를 거쳐 검찰에 송치할 예정입니다.

이에 대해 해당 농협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 답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농협 간부였던 박 씨에게도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지인들에게 농협 간부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억 원을 빌린 것도 모자라 수십억 원 대 부당대출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박 씨. 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물론 해당 농협 조합원들의 억울함만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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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후자금 ‘먹튀’에 80억대 사기대출까지…농협 간부 경찰 수사
    • 입력 2021-04-10 08:00:37
    • 수정2021-04-10 14:29:02
    취재K
전남 화순에 사는 원 모 씨는 지인이자 화순 한 농협 간부였던 박 모 씨에게 1억 9천여만 원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는 급성 식도암을 선고받고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원 씨 가족 제공)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사기꾼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한테 그 사람은 거의 살인자나 다름없어요."

취재진과 마주앉은 원 모 씨의 입술이 떨렸습니다. 70살이었던 원 씨의 아버지는 지인인 박 모 씨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박 씨에게 노후자금 1억 9천여만 원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한 겁니다. 박 씨는 원 씨 아버지가 30년간 알고 지내며 조카처럼 여겼던 사람입니다.


돈을 빌려 간 박 씨는 당시 전남 화순의 한 농협 간부였습니다. 이 때문에 원 씨의 아버지는 박 씨가 돈을 갚지 않을 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의 아버지는 급성식도암을 선고받고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었습니다.

유족들이 박 씨를 '사기꾼'이 아닌 '살인마'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박 씨가 저지른 사기행각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KBS 취재 결과, 박 씨가 농협 간부로 재직할 당시 80억 원대 사기대출에도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동산 업자와 공모해 부당 대출을 해준 것인데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인지, 자세히 전해드립니다.


■ 평생 모은 '노후자금' 몽땅 날려…. 급성 식도암으로 세상 떠나

원 모 씨의 통장 사본. 박 씨 측 사람에게 1억 천 만원을 송금했다. (원 씨 가족 제공)
원 모 씨의 아버지는 전남 화순에서 작은 사업을 일궈왔습니다. 박 씨에게 빌려준 1억 9천여만 원은 아버지가 평생을 모은 노후자금이자 아들의 결혼자금이었습니다.

박 씨가 원 씨의 아버지에게 접근한 건 지난 2018년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빌라를 하나 지었는데 준공자금을 빌려주면 이자까지 붙여 2억 9천여만 원으로 불려준다고 했습니다. 박 씨는 원 씨 아버지가 지닌 돈이 부족하자, 추가로 대출까지 받게 했습니다.

박 씨가 원 씨에게 돈을 갚겠다며 약속한 공정증서. (원 씨 가족 제공)
하지만 1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박 씨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박 씨는 수차례 공증만 할 뿐 실제로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공증할 때마다 갚겠다는 돈은 늘어났습니다.

공증할 때마다 원 씨의 아버지는 박 씨를 더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그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지인이자 농협 간부였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확인해본 결과 박 씨가 지었다는 제주도 빌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건축물대장도 없는 허위였던 것인데요. 뒤늦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원 씨는 급성 식도암을 선고받았습니다.

결국, 투병 3개월만인 지난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 원 씨와 그의 아내. (원 씨 가족 제공)
아들 원 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허망하기 그지없다고 말합니다. 가장 억울한 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박 씨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들 원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이 가시기 전까지도 그 사람을 믿고 있었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라며 "얼마나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그게 다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전남 화순경찰서는 박 씨가 다른 지인들을 상대로도 사기행각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를 미끼로 하거나 사업자금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지인들에게 2억 원이 넘는 돈을 빌려 간 뒤 갚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80억 원대 부당 대출... '간 큰' 농협 간부


박 씨의 사기행각은 더 있습니다. 농협 간부로 있으면서 80억 원대 부당대출을 해준 혐의도 받고 있는데요. 화순의 작은 단위 농협에서 '80억 원'이라니 액수가 어마어마하죠. 경찰이 판단한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부동산 업자 A 씨는 화순의 한 농협에서 지난 2014년부터 4년간 토지담보대출을 받아왔습니다. 횟수만 18차례에 이르고, 금액은 무려 82억 원입니다.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받았는데요. 매매계약서를 위조하거나 담보될 땅의 감정가격을 부풀리는 등의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경찰은 이 과정에 당시 농협 간부였던 박 씨가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감정가격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승인해 줬다는 겁니다. 이렇게 대출받은 82억 원이 어디에 쓰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경찰은 우선 지난해, 부동산업자 A 씨와 박 씨 등 18명을 사기대출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 부당대출 피해…. 조합원 피해로 이어져

박 씨가 사기대출 혐의를 받고 있는 해당 농협의 조합원.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해당 농협의 조합원들은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 몫"이라며 우려하고 있습니다. 부실하게 대출해준 뒤 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조합원들의 적립금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어섭니다.

해당 농협의 조합원 B 씨는 화를 냈습니다. 해당 농협이 이미 연체채권 180억 원 가운데 38억 원 정도를 농협 조합원들의 적립금으로 충당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B 씨는 "몇십 년 동안 5%씩, 3%씩 해서 100% 달성해 놓은 적립금을 빚을 갚는데 써버리면 조합원들에게 피해가 돌아온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경찰은 박 씨가 최근 부동산 아파트 담보대출 과정에서 7억 9천여만 원을 부당하게 대출한 정황을 확인하고 보강수사를 거쳐 검찰에 송치할 예정입니다.

이에 대해 해당 농협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 답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농협 간부였던 박 씨에게도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지인들에게 농협 간부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억 원을 빌린 것도 모자라 수십억 원 대 부당대출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박 씨. 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물론 해당 농협 조합원들의 억울함만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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