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꼴로 만나는 5.18 정신…‘박용준체’ 펀딩 시작

입력 2021.04.11 (08:01) 수정 2021.04.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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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회보' 제 6호.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투사 회보' 제 6호.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

"광주 시민 여러분! 현 시국은 단결의 힘만이 필요할 때 입니다. 오늘(26日) 오전 6:30분 계엄군은 탱크를 몰고 돌고개까지 진군하였읍니다."

16절지 종이 가득 반듯한 글씨가 빼곡합니다. 자로 잰 듯 삐뚤지 않은 글씨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1980년 5월 26일, 도청 앞 최후항전을 하루 앞둔 날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광주 시내에 들어왔다는 문장에선 긴박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데요.

위 문서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이 만든 민중 신문 '투사 회보' 제6호 입니다. 회보 속 활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눌러쓴 사람이 박용준 열사입니다.

등사기 앞에서 웃고 있는 박용준 열사.등사기 앞에서 웃고 있는 박용준 열사.

'투사 회보' 속 박 열사의 글씨체를 디지털 글꼴로 만드는 작업이 추진됩니다. 광주 시민단체들이 5.18 41주년을 맞아 마련한 활동인데요. 오월 정신을 다음 세대에 알리고,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시민 모금으로 제작비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제작된 글꼴은 무료로 시민들에게 배포될 예정인데요. 이제 일상 속에서 박 열사의 글씨체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 박용준 열사가 하나 하나 눌러 쓴 '광주의 참상'
'투사 회보' 제 5호.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투사 회보' 제 5호.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

'투사 회보' 를 처음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투사 회보'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만든 민중 신문입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신군부에 의해 모든 언론이 철저히 통제됐습니다. 대부분 언론이 광주의 참상에 대해 침묵하거나 왜곡했습니다. 이런 기존 언론을 대신해 시민들이 만든 게 '투사 회보'입니다. 그 중심엔 광주 노동자들이 1978년 세웠던 노동야학 '들불야학'이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투사 회보' 제작 과정.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투사 회보' 제작 과정.

5.18 당시 '들불야학' 교사였던 박용준 열사는 이때부터 이른바 '필경', 글씨를 옮겨 적는 일을 전담했습니다. 프린터도, 복사기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수천 장의 회보를 발간하는 데 사용했던 건 '등사기'였습니다.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을 새겨 넣고, 이 위를 등사 잉크를 바른 롤러로 밀어내 여러 장을 찍어내는 형식입니다.

박 열사는 윤상원 열사 등이 글을 쓰면, 이를 등사원지에 옮겨 적었습니다. 자꾸 찍어내다 보면 등사원지가 쉽게 닳아버렸는데, 이 때문에 박 열사는 같은 내용을 30여 차례씩 되풀이해서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루에 많게는 5천 장이 넘는 '투사 회보'가 발간됐고, 시민들은 박 열사가 쓴 '투사 회보'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투사 회보' 제작 과정.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투사 회보' 제작 과정.

'투사 회보' 제작에는 4개 조가 투입됐습니다. 물자를 조달하는 조와 배포 전담 조 등이었습니다. 많은 역할 중에 박 열사가 '필경'을 맡게 된 이유는 뭘까요?

바로 박 열사의 '글씨체'가 반듯했기 때문입니다. 박 열사는 고아였습니다. 보육원에서 나온 뒤 학업을 이어갔지만, 생계를 위해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때 일한 곳 중 하나가 '인쇄소'입니다. 박 열사는 인쇄소에서 일하며 등사지에 글씨를 옮겨 적는 일을 배웠습니다.

당시 투사회보 제작에 함께 참여했던 전영호 씨는 "박 열사의 글씨체가 누구보다도 반듯했다"고 말합니다. . 그렇게 박 열사는 1980년 5월 27일, 광주 YWCA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기 전까지 '투사 회보' 제작에 헌신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치열하게 저항한 것입니다.

■ "오월 정신 다음 세대와 공유"...'시민 모금' 시작


'투사 회보' 속에 남은 박 열사의 글씨체가 디지털 글꼴로 재탄생합니다. '지역 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와 '들불야학 기념사업회', '광주 YWCA' 등 3개 단체가 모여 시민 모금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업을 최초로 제안한 광주로 백희정 상임이사는 "투사 회보를 잊힌 채로 두지 말고, 다음 세대와 함께 5·18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자는 뜻에서 제안했다"고 밝혔습니다. 5.18의 정신을 상징하는 '박용준체'가 광주광역시를 대표하는 글씨체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는데요.

'박용준체' 시민 펀딩은 NGO 소셜펀딩플랫폼 '상상트리'에서 다음 달 27일까지 계속됩니다. 목표 금액이 달성되면 '투사 회보' 첫 발간일인 5월 21일,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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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꼴로 만나는 5.18 정신…‘박용준체’ 펀딩 시작
    • 입력 2021-04-11 08:01:07
    • 수정2021-04-11 10:03:40
    취재K
'투사 회보' 제 6호.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
"광주 시민 여러분! 현 시국은 단결의 힘만이 필요할 때 입니다. 오늘(26日) 오전 6:30분 계엄군은 탱크를 몰고 돌고개까지 진군하였읍니다."

16절지 종이 가득 반듯한 글씨가 빼곡합니다. 자로 잰 듯 삐뚤지 않은 글씨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1980년 5월 26일, 도청 앞 최후항전을 하루 앞둔 날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광주 시내에 들어왔다는 문장에선 긴박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데요.

위 문서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이 만든 민중 신문 '투사 회보' 제6호 입니다. 회보 속 활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눌러쓴 사람이 박용준 열사입니다.

등사기 앞에서 웃고 있는 박용준 열사.
'투사 회보' 속 박 열사의 글씨체를 디지털 글꼴로 만드는 작업이 추진됩니다. 광주 시민단체들이 5.18 41주년을 맞아 마련한 활동인데요. 오월 정신을 다음 세대에 알리고,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시민 모금으로 제작비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제작된 글꼴은 무료로 시민들에게 배포될 예정인데요. 이제 일상 속에서 박 열사의 글씨체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 박용준 열사가 하나 하나 눌러 쓴 '광주의 참상'
'투사 회보' 제 5호.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
'투사 회보' 를 처음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투사 회보'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만든 민중 신문입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신군부에 의해 모든 언론이 철저히 통제됐습니다. 대부분 언론이 광주의 참상에 대해 침묵하거나 왜곡했습니다. 이런 기존 언론을 대신해 시민들이 만든 게 '투사 회보'입니다. 그 중심엔 광주 노동자들이 1978년 세웠던 노동야학 '들불야학'이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투사 회보' 제작 과정.
5.18 당시 '들불야학' 교사였던 박용준 열사는 이때부터 이른바 '필경', 글씨를 옮겨 적는 일을 전담했습니다. 프린터도, 복사기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수천 장의 회보를 발간하는 데 사용했던 건 '등사기'였습니다.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을 새겨 넣고, 이 위를 등사 잉크를 바른 롤러로 밀어내 여러 장을 찍어내는 형식입니다.

박 열사는 윤상원 열사 등이 글을 쓰면, 이를 등사원지에 옮겨 적었습니다. 자꾸 찍어내다 보면 등사원지가 쉽게 닳아버렸는데, 이 때문에 박 열사는 같은 내용을 30여 차례씩 되풀이해서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루에 많게는 5천 장이 넘는 '투사 회보'가 발간됐고, 시민들은 박 열사가 쓴 '투사 회보'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투사 회보' 제작 과정.
'투사 회보' 제작에는 4개 조가 투입됐습니다. 물자를 조달하는 조와 배포 전담 조 등이었습니다. 많은 역할 중에 박 열사가 '필경'을 맡게 된 이유는 뭘까요?

바로 박 열사의 '글씨체'가 반듯했기 때문입니다. 박 열사는 고아였습니다. 보육원에서 나온 뒤 학업을 이어갔지만, 생계를 위해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때 일한 곳 중 하나가 '인쇄소'입니다. 박 열사는 인쇄소에서 일하며 등사지에 글씨를 옮겨 적는 일을 배웠습니다.

당시 투사회보 제작에 함께 참여했던 전영호 씨는 "박 열사의 글씨체가 누구보다도 반듯했다"고 말합니다. . 그렇게 박 열사는 1980년 5월 27일, 광주 YWCA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기 전까지 '투사 회보' 제작에 헌신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치열하게 저항한 것입니다.

■ "오월 정신 다음 세대와 공유"...'시민 모금' 시작


'투사 회보' 속에 남은 박 열사의 글씨체가 디지털 글꼴로 재탄생합니다. '지역 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와 '들불야학 기념사업회', '광주 YWCA' 등 3개 단체가 모여 시민 모금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업을 최초로 제안한 광주로 백희정 상임이사는 "투사 회보를 잊힌 채로 두지 말고, 다음 세대와 함께 5·18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자는 뜻에서 제안했다"고 밝혔습니다. 5.18의 정신을 상징하는 '박용준체'가 광주광역시를 대표하는 글씨체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는데요.

'박용준체' 시민 펀딩은 NGO 소셜펀딩플랫폼 '상상트리'에서 다음 달 27일까지 계속됩니다. 목표 금액이 달성되면 '투사 회보' 첫 발간일인 5월 21일,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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