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절단도 ‘수술 거부’…HIV감염인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입력 2021.04.20 (06:04) 수정 2021.04.2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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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절단, 13시간 동안 수술할 병원 찾아 헤매

HIV(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 A 씨가 지난해 9월 겪은 일입니다. A 씨는 수도권의 한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았지만, 13시간 동안 찾지 못했습니다. 구급대원이 병원에 전화를 돌려봤지만, 20여곳이 거부했습니다.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가능하다고 했던 병원도 'HIV 감염' 얘기만 꺼내면 말이 달라졌습니다. "HIV 감염인을 치료할 의료진과 시스템이 없다", "코로나19 전담병원이라 안 된다" 등의 이유였습니다.

겨우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은 건 13시간 만이었습니다. 골든타임을 놓쳤습니다. 결국, A 씨는 손가락을 제대로 구부리지 못해 제대로 일하기 힘듭니다.

A 씨만의 문제일까요.

또 다른 HIV 감염인 한울 씨는 지난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했습니다. 식사를 받았는데, 식판에 검은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HIV감염자라는 이유였습니다.

"몸이 아픈 것보다 검은 비닐을 봤을 때의 고통이 10배, 20배 느껴졌어요" 한울 씨의 말입니다. 병원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이 너무 많아, 몸이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 "HIV 감염자 수술 거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인권위 진정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한국 HIV/AIDS 감염인연합회 KNP+ 등이 어제(19일) 오후 국가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20여 곳의 병원들이 HIV감염인의 수술을 거부한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A씨는 병원에 봉합은 바라지 않으니 묶어만 달라고 했지만 이조차 거부당했다"며 "신체의 일부가 유실되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는 일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 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과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라며 HIV 감염인도 감염 순간부터 치료 기회의 제약, 직장생활의 배제 등 장시간에 걸쳐 차별과 편견을 경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HIV 감염을 '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로 인정하고 차별은 구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 "차별받지 않기 위해" 장애 인정을 요구하는 현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많은 나라들이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간주하고 차별 금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라며 "HIV 감염인이 꼭 장애인일 필요는 없지만 이들이 겪는 차별을 시정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도 제정이 안 되고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대표도 "어디에도 HIV 감염인을 보호할 국가제도가 없기 때문에 장애인차별금지법 상 차별로 인정해달라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 차별'로 인정되면 실효적인 구제조치가 가능한데, 이때문에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어긴 것으로 판단할 때 나오는 인권위 시정 권고 결정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법무부가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 진정인은 법원에 구제조치를 청구할 수도 있습니다.

■ 2년 전 장애인으로 인정한 사례 있어

HIV감염인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인정한 사례도 실제 있습니다. 지난 2019년 5월, HIV 감염인 B 씨는 면역력 저하로 시력이 손실되고 편마비를 갖게 됐습니다.

재활 치료를 받기 위해 국립재활원을 찾았지만, ‘역격리(감염 우려가 큰 환자를 격리해 보호)가 필요한 응급상황 발생 시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이유로 입원을 거부당했습니다.

당시 인권위는 “B씨가 등록장애인은 아니지만, 편마비와 시력상실로 일상·사회생활 모든 영역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의 정의에 포함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인권위는, HIV감염인과 AIDS 환자를 모두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검토를 더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 기자회견에선 "HIV감염인도 사람이다"라는 구호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인권위 진정과 권고가 나왔지만, HIV감염인의 인권은 여전히 보호의 테두리 밖에 있다는 겁니다. HIV 감염인은 장애인차별법상 장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 차별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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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가락 절단도 ‘수술 거부’…HIV감염인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 입력 2021-04-20 06:04:39
    • 수정2021-04-20 15:03:48
    취재K

■ 손가락 절단, 13시간 동안 수술할 병원 찾아 헤매

HIV(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 A 씨가 지난해 9월 겪은 일입니다. A 씨는 수도권의 한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았지만, 13시간 동안 찾지 못했습니다. 구급대원이 병원에 전화를 돌려봤지만, 20여곳이 거부했습니다.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가능하다고 했던 병원도 'HIV 감염' 얘기만 꺼내면 말이 달라졌습니다. "HIV 감염인을 치료할 의료진과 시스템이 없다", "코로나19 전담병원이라 안 된다" 등의 이유였습니다.

겨우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은 건 13시간 만이었습니다. 골든타임을 놓쳤습니다. 결국, A 씨는 손가락을 제대로 구부리지 못해 제대로 일하기 힘듭니다.

A 씨만의 문제일까요.

또 다른 HIV 감염인 한울 씨는 지난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했습니다. 식사를 받았는데, 식판에 검은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HIV감염자라는 이유였습니다.

"몸이 아픈 것보다 검은 비닐을 봤을 때의 고통이 10배, 20배 느껴졌어요" 한울 씨의 말입니다. 병원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이 너무 많아, 몸이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 "HIV 감염자 수술 거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인권위 진정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한국 HIV/AIDS 감염인연합회 KNP+ 등이 어제(19일) 오후 국가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20여 곳의 병원들이 HIV감염인의 수술을 거부한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A씨는 병원에 봉합은 바라지 않으니 묶어만 달라고 했지만 이조차 거부당했다"며 "신체의 일부가 유실되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는 일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 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과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라며 HIV 감염인도 감염 순간부터 치료 기회의 제약, 직장생활의 배제 등 장시간에 걸쳐 차별과 편견을 경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HIV 감염을 '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로 인정하고 차별은 구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 "차별받지 않기 위해" 장애 인정을 요구하는 현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많은 나라들이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간주하고 차별 금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라며 "HIV 감염인이 꼭 장애인일 필요는 없지만 이들이 겪는 차별을 시정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도 제정이 안 되고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대표도 "어디에도 HIV 감염인을 보호할 국가제도가 없기 때문에 장애인차별금지법 상 차별로 인정해달라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 차별'로 인정되면 실효적인 구제조치가 가능한데, 이때문에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어긴 것으로 판단할 때 나오는 인권위 시정 권고 결정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법무부가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 진정인은 법원에 구제조치를 청구할 수도 있습니다.

■ 2년 전 장애인으로 인정한 사례 있어

HIV감염인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인정한 사례도 실제 있습니다. 지난 2019년 5월, HIV 감염인 B 씨는 면역력 저하로 시력이 손실되고 편마비를 갖게 됐습니다.

재활 치료를 받기 위해 국립재활원을 찾았지만, ‘역격리(감염 우려가 큰 환자를 격리해 보호)가 필요한 응급상황 발생 시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이유로 입원을 거부당했습니다.

당시 인권위는 “B씨가 등록장애인은 아니지만, 편마비와 시력상실로 일상·사회생활 모든 영역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의 정의에 포함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인권위는, HIV감염인과 AIDS 환자를 모두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검토를 더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 기자회견에선 "HIV감염인도 사람이다"라는 구호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인권위 진정과 권고가 나왔지만, HIV감염인의 인권은 여전히 보호의 테두리 밖에 있다는 겁니다. HIV 감염인은 장애인차별법상 장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 차별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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