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낼 수 있게 될까

입력 2021.04.25 (10:01) 수정 2021.04.2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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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유산
쉼표 모양의 나선문,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국보 제138호 가야금관 및 장신구입니다. 가야금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에서였습니다.


국보 제138호 가야금관 및 장신구, 삼성미술관-리움 소장국보 제138호 가야금관 및 장신구,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가야금관은 호암 이병철 회장의 수집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76년부터 20여 년 동안 삼성가의 문화재 수집과 관리를 담당했던 고고학자 이종선 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병철 회장은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가야금관을 찾아볼 정도로 애착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금관을 몸에 갖다 대며 그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했다고 이종선 씨는 자신의 책 '리 컬렉션'에서 회고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남다른 고미술품 사랑은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와 90년대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특히, 소문난 '백자 마니아'였습니다. 조선 초기 청화백자에 대해 매우 뛰어난 식견을 갖고 있어서 복제품을 여러 개 만든 다음 청화 안료의 푸른색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정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부자의 품 안에 들어온 수집품 가운데 국보급 문화재 일부는 삼성문화재단이 운영 중인 <삼성미술관-리움>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 보관되거나 전시되고 있습니다. 국보 40여 점, 보물 100여 점 등 모두 150여 점에 이릅니다.

여기에다 공개되지 않은 회화, 조각, 서화, 고문서 등을 포함하면 이른바 '리 컬렉션'은 만 3천 점에서 만 5천 점에 이르는 걸로 추산됩니다. 2007년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이 600억 원의 비자금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구매했다며 그 내역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같은 세계적 거장의 작품이 30여 점 정도 포함돼 있어 놀라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리 컬렉션의 가치가 '조 단위'라고 하는데 정확히 얼마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건희 회장 소유로 알려진 샤갈의 '신랑신부의 꽃다발이건희 회장 소유로 알려진 샤갈의 '신랑신부의 꽃다발


■ '리 컬렉션'...그리고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

그런데 리 컬렉션의 일부가 조만간 공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 기사 보고 오기

유족들은 고 이건희 회장 소유 재산 가운데 상속할 재산의 규모, 상속세 납부 방법 등을 정해 이달 말까지 세무 당국에 알려야 하는데, 리 컬렉션의 일부를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하기로 하고 협의를 진행해 온 사실이 최근 한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국립 미술관 같은 '공공단체'에 재산을 넘기면 그 가치만큼 과세 대상 재산은 줄어듭니다.

만 3천여 점에서 만 5천여 점을 헤아리는 전체 리 컬렉션 가운데 몇 %나 기증될지, 기증 미술품이나 문화재는 뭐고 그 가치는 얼마나 될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대중과 만날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요.

삼성가의 미술품 기증과 더불어 주목받고 있는 법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낼 수 있도록 하는 가칭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 즉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입니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보면 전체 상속세의 절반 이상이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일 경우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으로도 상속세를 대신 낼 수 있게 돼 있는데 이 물납 가능 재산에 '미술품이나 문화재'도 넣자는 겁니다.

법안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등진 뒤 한 달이 지난 지난해 11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강원 원주갑)이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의원은 여당의 대표적 친삼성 인사로 꼽힙니다. 4.7 재보궐 선거 다음 날인 이달 8일에는 같은 당 초선인 전용기 의원도 비슷한 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전용기 의원은 1991년생으로 21대 국회 '막내급' 초선 의원(막내 의원은 1992년생인 정의당 류호정 의원)입니다.



■ 미술계가 미술품 물납법을 원하는 이유

미술계에서는 이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술적 가치가 큰 작품들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고 세금 대신 받은 미술품을 전시하면 국민들의 문화 향유권이 커진다는 주장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에서는 제한적으로 시행 중인데 피카소 작품으로 채워진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이 바로 이런 물납제도를 통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되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작품 구입비를 아낄 수 있고, 국가는 상속세 대신 받은 작품 일부를 매각해 현금화해야 하니 미술품 경매 시장이 활성화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얘기가 나왔는데 지난해 삼성 이건희 회장 타계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교과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역대급' 작품이 알고 봤더니 고 이건희 회장 소유였고 이 작품에 천문학적 액수의 상속세가 매겨진다면? '차라리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신 내게 하고 그 미술품을 모두가 감상하는 건 어떻겠냐'며, 미술품 물납 법안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관련 토론회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열렸고 지난달(3월) 초에는 한국화랑협회와 한국미술협회 등 미술 단체 10여 곳과 박양우 전 장관 등 전직 문체부 장관이 함께 대국민 건의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토론회 영상 보기


지난달(3월) 11일에 열린 문화재 미술품 물납제 도입 세미나지난달(3월) 11일에 열린 문화재 미술품 물납제 도입 세미나


■ 미술품 물납 법안, 왜 '특혜 논란'으로 번질까

그러나 미술품 물납 법안 도입의 필요성으로 언급되는 ‘문화유산 해외 유출 방지’, ‘공공 자산화를 통한 문화 향유권 확대’는 특혜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선, ‘문화유산 해외 유출 방지’에서 말하는 ‘문화유산’이 문화재를 뜻하는 듯 보여도 문화재는 될 수 없습니다. 제작/형성된 뒤 50년 이상 되거나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으면 어차피 국외 반출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문화재보호법 60조).

그렇다면 ‘문화유산’은 미술품 등을 말하는 것일 텐데 ‘해외 유출을 막아야 할 정도’의 가치 있는 미술품을 세금 대신 낼 수 있는 납세자는 극소수입니다. 특혜 논란이 제기될뿐더러 극소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미술품의 물납까지 허용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공 자산화를 통한 문화 향유권 확대’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대신 받은 작품을 국민이 ‘향유’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매각하는 대신 갖고 있으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각 지자체 등이 운영하는 공공 미술관에 전시를 맡겨야 합니다. 세금 수입 감소를 통 크게(?) 감내해야 하는 겁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고 이건희 회장 소유 문화재에 대한 기증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고 이건희 회장 소유 문화재에 대한 기증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 미술품 물납 법안의 또 다른 허점들

법안 자체적으로도 허점은 있습니다. 우선, 미술품의 가치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매기는 방법이 포함되지 않았단 겁니다. 가치 평가는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수 없는 객관적 지표에 따라, 당사자 아닌 외부 기관에 의해 이뤄질 때 공정성이 담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 단체들이 감정 담당자를 어떻게 선발/선정하는지, 어떤 과정과 기준으로 감정하며 그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지 등 많은 것들이 공개되지 않은 채 평가자 개인의 지식과 경험, 권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가치가 높게 평가되면 그만큼 국고 손실이 발생하고 반대로 낮게 평가되면 납세자의 이익이 침해받지만, 현재 ‘감정 시스템’으로는 이 두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가치 평가의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면 징수 체계 자체에 대한 신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납세자들과 형평성 문제입니다. 조세 납부의 원칙은 현금 납부입니다. 물납, 즉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으로도 낼 수 있지만, 형평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전체 상속분의 절반 이상일 때만 가능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미술품이 물납 대상이 되려면, 마찬가지로 ‘특정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데 개정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물납제 자체의 문제도 있습니다. 국회 기재위와 입법조사처 자료를 보면 물납 된 재산을 매각해 환수한 금액의 비율이 78.2%(2009년부터 2015년까지)에 불과했습니다. 국세청이 세금 1조 1,500여억 원을 부동산이나 유가 증권으로 받았는데 환수한 돈은 9천여억 원이란 뜻입니다. 2009년부터 2020년 8월까지 이렇게 발생한 국고 손실액이 모두 4,870억 원에 이릅니다. 현금으로 상속세를 받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손실입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은 지난달 초 성명을 내고,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미술품과 문화재 등의 물납은 국고의 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 편법적 상속세 회피의 방편이 될 수도 있는 미술품‧문화재 등 상속세 물납 도입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거장 피카소의 유족들이 상속세 대신 피카소의 작품을 물납해 만들어진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거장 피카소의 유족들이 상속세 대신 피카소의 작품을 물납해 만들어진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


■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과 삼성

이광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줄여서 상증법) 개정안은 지난해 11월에 발의, 회부됐지만 담당 상임위원회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상정되진 않고 있습니다. 전용기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도 회부 단계입니다.

기획재정위원회에 따르면, 세법 개정안 논의는 매년 8월 기획재정부의 세제 개편안이 나오면 9월 정기국회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상증법 개정안이 설사 상정되더라도 본격적인 논의는 오는 9월이 돼서야 시작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회 기재위 복수의 관계자들은 "민주당 당론이 아니라 의원들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알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재용 부회장 등 유족의 상속세 신고 기한은 오는 4월 말까지인데 그 규모가 워낙 커서 5년 동안 분할납부(연부연납)를 할 것이란 전망이 많습니다.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은 앞으로 5년 안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만약 통과된다면 세부적인 시행령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삼성이 법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삼성의 미술품 기증 계획 발표가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또 미술품 물납 법안에 대해 어떤 여론을 만들어 낼지, 또 우리 국회는 우리 사회의 여론을 어떻게 법안으로 담아낼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국민은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 의무를 지고 그 법이 만들어지는 곳은 국회입니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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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은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낼 수 있게 될까
    • 입력 2021-04-25 10:01:50
    • 수정2021-04-25 15:10:11
    취재K


■ 위대한 유산
쉼표 모양의 나선문,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국보 제138호 가야금관 및 장신구입니다. 가야금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에서였습니다.


국보 제138호 가야금관 및 장신구,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가야금관은 호암 이병철 회장의 수집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76년부터 20여 년 동안 삼성가의 문화재 수집과 관리를 담당했던 고고학자 이종선 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병철 회장은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가야금관을 찾아볼 정도로 애착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금관을 몸에 갖다 대며 그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했다고 이종선 씨는 자신의 책 '리 컬렉션'에서 회고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남다른 고미술품 사랑은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와 90년대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특히, 소문난 '백자 마니아'였습니다. 조선 초기 청화백자에 대해 매우 뛰어난 식견을 갖고 있어서 복제품을 여러 개 만든 다음 청화 안료의 푸른색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정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부자의 품 안에 들어온 수집품 가운데 국보급 문화재 일부는 삼성문화재단이 운영 중인 <삼성미술관-리움>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 보관되거나 전시되고 있습니다. 국보 40여 점, 보물 100여 점 등 모두 150여 점에 이릅니다.

여기에다 공개되지 않은 회화, 조각, 서화, 고문서 등을 포함하면 이른바 '리 컬렉션'은 만 3천 점에서 만 5천 점에 이르는 걸로 추산됩니다. 2007년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이 600억 원의 비자금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구매했다며 그 내역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같은 세계적 거장의 작품이 30여 점 정도 포함돼 있어 놀라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리 컬렉션의 가치가 '조 단위'라고 하는데 정확히 얼마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건희 회장 소유로 알려진 샤갈의 '신랑신부의 꽃다발

■ '리 컬렉션'...그리고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

그런데 리 컬렉션의 일부가 조만간 공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 기사 보고 오기

유족들은 고 이건희 회장 소유 재산 가운데 상속할 재산의 규모, 상속세 납부 방법 등을 정해 이달 말까지 세무 당국에 알려야 하는데, 리 컬렉션의 일부를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하기로 하고 협의를 진행해 온 사실이 최근 한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국립 미술관 같은 '공공단체'에 재산을 넘기면 그 가치만큼 과세 대상 재산은 줄어듭니다.

만 3천여 점에서 만 5천여 점을 헤아리는 전체 리 컬렉션 가운데 몇 %나 기증될지, 기증 미술품이나 문화재는 뭐고 그 가치는 얼마나 될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대중과 만날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요.

삼성가의 미술품 기증과 더불어 주목받고 있는 법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낼 수 있도록 하는 가칭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 즉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입니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보면 전체 상속세의 절반 이상이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일 경우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으로도 상속세를 대신 낼 수 있게 돼 있는데 이 물납 가능 재산에 '미술품이나 문화재'도 넣자는 겁니다.

법안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등진 뒤 한 달이 지난 지난해 11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강원 원주갑)이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의원은 여당의 대표적 친삼성 인사로 꼽힙니다. 4.7 재보궐 선거 다음 날인 이달 8일에는 같은 당 초선인 전용기 의원도 비슷한 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전용기 의원은 1991년생으로 21대 국회 '막내급' 초선 의원(막내 의원은 1992년생인 정의당 류호정 의원)입니다.



■ 미술계가 미술품 물납법을 원하는 이유

미술계에서는 이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술적 가치가 큰 작품들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고 세금 대신 받은 미술품을 전시하면 국민들의 문화 향유권이 커진다는 주장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에서는 제한적으로 시행 중인데 피카소 작품으로 채워진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이 바로 이런 물납제도를 통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되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작품 구입비를 아낄 수 있고, 국가는 상속세 대신 받은 작품 일부를 매각해 현금화해야 하니 미술품 경매 시장이 활성화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얘기가 나왔는데 지난해 삼성 이건희 회장 타계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교과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역대급' 작품이 알고 봤더니 고 이건희 회장 소유였고 이 작품에 천문학적 액수의 상속세가 매겨진다면? '차라리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신 내게 하고 그 미술품을 모두가 감상하는 건 어떻겠냐'며, 미술품 물납 법안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관련 토론회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열렸고 지난달(3월) 초에는 한국화랑협회와 한국미술협회 등 미술 단체 10여 곳과 박양우 전 장관 등 전직 문체부 장관이 함께 대국민 건의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토론회 영상 보기


지난달(3월) 11일에 열린 문화재 미술품 물납제 도입 세미나

■ 미술품 물납 법안, 왜 '특혜 논란'으로 번질까

그러나 미술품 물납 법안 도입의 필요성으로 언급되는 ‘문화유산 해외 유출 방지’, ‘공공 자산화를 통한 문화 향유권 확대’는 특혜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선, ‘문화유산 해외 유출 방지’에서 말하는 ‘문화유산’이 문화재를 뜻하는 듯 보여도 문화재는 될 수 없습니다. 제작/형성된 뒤 50년 이상 되거나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으면 어차피 국외 반출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문화재보호법 60조).

그렇다면 ‘문화유산’은 미술품 등을 말하는 것일 텐데 ‘해외 유출을 막아야 할 정도’의 가치 있는 미술품을 세금 대신 낼 수 있는 납세자는 극소수입니다. 특혜 논란이 제기될뿐더러 극소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미술품의 물납까지 허용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공 자산화를 통한 문화 향유권 확대’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대신 받은 작품을 국민이 ‘향유’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매각하는 대신 갖고 있으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각 지자체 등이 운영하는 공공 미술관에 전시를 맡겨야 합니다. 세금 수입 감소를 통 크게(?) 감내해야 하는 겁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고 이건희 회장 소유 문화재에 대한 기증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 미술품 물납 법안의 또 다른 허점들

법안 자체적으로도 허점은 있습니다. 우선, 미술품의 가치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매기는 방법이 포함되지 않았단 겁니다. 가치 평가는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수 없는 객관적 지표에 따라, 당사자 아닌 외부 기관에 의해 이뤄질 때 공정성이 담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 단체들이 감정 담당자를 어떻게 선발/선정하는지, 어떤 과정과 기준으로 감정하며 그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지 등 많은 것들이 공개되지 않은 채 평가자 개인의 지식과 경험, 권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가치가 높게 평가되면 그만큼 국고 손실이 발생하고 반대로 낮게 평가되면 납세자의 이익이 침해받지만, 현재 ‘감정 시스템’으로는 이 두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가치 평가의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면 징수 체계 자체에 대한 신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납세자들과 형평성 문제입니다. 조세 납부의 원칙은 현금 납부입니다. 물납, 즉 유가증권이나 부동산으로도 낼 수 있지만, 형평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전체 상속분의 절반 이상일 때만 가능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미술품이 물납 대상이 되려면, 마찬가지로 ‘특정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데 개정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물납제 자체의 문제도 있습니다. 국회 기재위와 입법조사처 자료를 보면 물납 된 재산을 매각해 환수한 금액의 비율이 78.2%(2009년부터 2015년까지)에 불과했습니다. 국세청이 세금 1조 1,500여억 원을 부동산이나 유가 증권으로 받았는데 환수한 돈은 9천여억 원이란 뜻입니다. 2009년부터 2020년 8월까지 이렇게 발생한 국고 손실액이 모두 4,870억 원에 이릅니다. 현금으로 상속세를 받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손실입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은 지난달 초 성명을 내고,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미술품과 문화재 등의 물납은 국고의 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 편법적 상속세 회피의 방편이 될 수도 있는 미술품‧문화재 등 상속세 물납 도입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거장 피카소의 유족들이 상속세 대신 피카소의 작품을 물납해 만들어진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

■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과 삼성

이광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줄여서 상증법) 개정안은 지난해 11월에 발의, 회부됐지만 담당 상임위원회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상정되진 않고 있습니다. 전용기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도 회부 단계입니다.

기획재정위원회에 따르면, 세법 개정안 논의는 매년 8월 기획재정부의 세제 개편안이 나오면 9월 정기국회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상증법 개정안이 설사 상정되더라도 본격적인 논의는 오는 9월이 돼서야 시작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회 기재위 복수의 관계자들은 "민주당 당론이 아니라 의원들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알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재용 부회장 등 유족의 상속세 신고 기한은 오는 4월 말까지인데 그 규모가 워낙 커서 5년 동안 분할납부(연부연납)를 할 것이란 전망이 많습니다. 상속세 미술품 물납 법안은 앞으로 5년 안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만약 통과된다면 세부적인 시행령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삼성이 법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삼성의 미술품 기증 계획 발표가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또 미술품 물납 법안에 대해 어떤 여론을 만들어 낼지, 또 우리 국회는 우리 사회의 여론을 어떻게 법안으로 담아낼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국민은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 의무를 지고 그 법이 만들어지는 곳은 국회입니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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