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남자 김무성이 사는 법.txt

때는 2015년 1월 26일. 최저기온 영하 9도의 살 떨리게 춥던 그날, 새누리당에선 훈훈한 행사 하나가 열렸다. 그 이름은 무려 '레드파워 여성포럼'. 김무성 당시 대표는 기분이 좋았는지 훈훈한 멘트 하나를 던졌다.


"우리 모두가 박 대통령의 선거 공약을 위해서 몸을 불사를 각오가 돼 이쓰요."


당 대표도 하고 나름 잘나가던 그. 줄도 잘 잡았겠다, 한 번이었나? 여권 대선주자 지지율 1위도 한 적 있겠다, 파란 집 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2년도 되지 않아 그는 꿈을 접었다.


2016년 11월 23일, 김 전 대표는 기자를 급하게 불러 모아 말한다. "대선 출마를 포기합니다. 새누리당 내에서 탄핵 발의를 앞장서기로 했습니다."


요사이 정치에 관심을 좀 가졌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김 전 대표가 계속 사이 나빴던 걸로 알겠지만 사실 이 둘은 10년 동안 절친했던 사이. 그간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까지 온 걸까.


김 전 대표는 2005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하면서 당시 박근혜 대표를 보좌하면서 연을 맺었다. 2년 뒤 대선 캠프에 참여해 박 대통령 뒤를 팍팍 밀어주며 확실한 친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당내 경선에서 박 대통령이 이명박 후보에게 지면서 고생길에 접어들고, 다음해 총선(2008년)에서 MB의 공천 학살로 친박끼리 모여서 당을 탈출해야 했다. 이어 무소속으로 당선돼 재기하는가 싶더니, 2012년 총선 때 박근혜 체제에서 또 공천에 탈락했다.


하지만 2012년 박근혜 대선 캠프에 총지휘자 역할(총괄선대본부장)로 합류하면서 연을 다시 이어간다. 그런 기운을 받아 2014년엔 새누리당 대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서는 위치가 달라지니 풍경도 달라진 걸까.


김 전 대표는 2016년 총선에서 친박계와 선을 그으며 상향식 공천(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주장했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자 옥새(공천 승인 도장)를 들고 부산으로 '튀었다'. 결국 같은 편인 유승민·이재오는 지켰지만.. 총선에서 망했다.


김 전 대표는 패배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얼마 뒤 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 집안싸움이 격하게 벌어졌다. 그는 결국 2016년 11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의 탈당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탄핵 주도세력이 됐다.

대쪽 vs 대쪽

결국 누군가는 부러질 운명이었다. 먼저 부러진 사람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였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터였다.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시계를 1년 반 전으로 되돌려보자.


2015년 2월, 정치권은 법조문 하나를 두고 몇날며칠을 싸웠다. 그것도 '같은 편'끼리 싸웠다. 국회법 개정안 때문이다. 개정안 요지는 '국회가 만든 법, 정부 너네 멋대로 주무르지 말라'는 것. 법 아래의 개념인 시행령으로 박 대통령이 계속 법의 취지를 훼손하자 국회가 낸 대응방안이었다.


'배신의 정치'란 말이 이때 나왔다. 이걸 야당에 합의해준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를 콕 집어 박 대통령이 쓴 말이다. "박근혜 대표 끝까지 지키고 아무리 위기가 오더라도 끝까지 지킬 사람이 누굽니까 여러분!"이라고 외치던 호위무사 유승민은 주군 등에 칼 꽂은 반란병이 됐다. 단단히 찍힌 그는 결국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둘이 애틋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을 하며 서로 '눈이 맞았다'. 그 후로 유 전 원내대표는 꽃길만 걸었다. 국회의원 당선(2005), 박근혜 대선캠프 활동(2007)까지. 유력 대권주자인 박 대통령과 '네 맘 내 맘' 하던 그는 단숨에 3선 고지에 올랐다.


너무 가까워서였을까. 서로 등을 돌린 후엔 피의 보복이 시작됐다. 먼저 부러진 쪽은 복수를 감내해야 했다.


2016년 4월 총선이 절정이었다. 후보 등록 마감 날까지 유 전 원내대표의 공천이 보류됐다. 말려죽이기 작전이었다. 결국 그는 후보 마감 직전, 탈당을 선언했다. 무소속 유승민은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를 가볍게 제압했다.


이제 반격의 시간. 당선 후 당에 복귀한 그는 다시 김무성 전 대표와 힘을 합쳤다. 11월, 최순실로 나라가 뒤흔들리던 그 시기, 새누리당 비상시국회의에서 그는 담백하게 말했다. "대통령도 당도 모든 걸 던져버려야 할 때"라고.


한 달 뒤인 12월 21일, 그는 김 전 대표와 함께 정중앙에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탈당을 결의했다.

"이게 다 경민이 때문이다"

또랑또랑한 목소리, 논리정연한 말투, 쉴 틈 주지 않는 압박.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연을 맺게 된 것도 ‘말’ 덕분이었다. 2007년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이 당내 경선을 할 때 박 대통령의 ‘입’으로 활동했다. 그때의 대변인 경력을 계기로 자타공인 원조 친박이 됐다.


2012년 총선, 강남3구 현역의원 배제론으로 공천 탈락했을 때도 그 마음은 변함 없었다. 당시 종합상황실장으로 여론을 살피고 선거를 지휘했다. “필요할 때만 친박인 척하지 않았다”, “대통령 만드느라 10년 넘게 고생했다”는 자기자랑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박 대통령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혜훈의 입이 박근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민’이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대선 승리 이후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를 후퇴시키자, 경제통 이 의원은 청와대를 계속 불편하게 했다. 그 공약을 후퇴시켜선 안 된다 직언하면서. 2012년 총선 직후, 그가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된 것도 경제민주화를 밀었던 덕이다.


“강성 친박이라고 알려진 지도부”와 “저희 같은 일반적인 의원”. 이혜훈은 TV를 통해 이별 통보를 했다. MBN <아궁이>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에.


그 다음 달, 쐐기를 박았다. 이 의원은 박 대통령 탄핵 찬성의원에게 협박 전화가 돌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너 배신자" "더 많은 배신자 필요함"

남경필 경기지사는 강성 친박도, 원조 친박도 아니다. 한때 "경기도의 아들 남경필이 대한민국의 딸 박근혜를 지켜내겠습니다"라며 박근혜 ‘누님’을 지지하긴 했다. 그러나 그는 계파색 옅기로 유명했으며 지금은 오히려 친박을 조폭과 광신교에 비유한다.


그런 그를 친박은 배신자라 불렀다. 당을 가장 먼저 나가서만은 아니다. 당으로부터 받은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6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떨어진 경험은 전무하다.


정계 입문 과정도 부드러웠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가 급작스레 별세한 뒤, 지역구를 물려받아 내리 5선을 했다. 꽃길만 걸은 남경필, 그의 동안(童顔) 비결은 동글동글한 얼굴과 꿀피부에만 있지 않다.


하지만 새누리당 내 ‘좌파’로 불리는 그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가장 먼저 탈당했다. 비주류 집단탈당 결의 한 달 전, 이미 친구 김용태 의원과 함께 당을 나갔다.


1주일 뒤 “탄핵을 흔들림 없이 해줄 것을 강력히 국회에 요청”했으며, 또 1주 뒤엔 과거 박근혜 지지를 호소했던 연설에 대해 사과했다. 최근 비박계가 집단 탈당을 선언하자 “더 많은 배신자가 생겨야 한다”고 덕담도 빼놓지 않았다.

“더 이상 널 보호해주기엔 내 마음이, 내 가슴이..”

나경원 의원과 박근혜 대통령은 마음을 ‘나누는’ 사이였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 대통령은 나 의원이 "장애아동을 위해 애쓰는 따뜻한 마음으로 서울 시정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 말했다.


이에 화답하듯 나 의원은 2012년 대선 때 박 대통령을 ‘마음의 정치인’이라 부르며 "대통령은 말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명박 후보 대변인이었지만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그뿐만 아니라 야당 대변인들이 박근혜 후보를 수첩 공주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고 수첩은 약속의 출발점이라 반박했다.


그로부터 약 4년이 흐른 2016년 11월 15일 그는 의원 총회가 끝나고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새누리당이 탄핵에 대해서 회피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가르침은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지난 대선, 이준석 전 혁신위원장은 말 그대로 침 튀기면서 박근혜 대통령 지원유세를 했다. 배움에 도가 튼 청년이어서였을까. 그가 유세 때 말한 것은 박 대통령의 ‘가르침’이었다.


"박근혜 위원장이 제게 가르쳐 준 건 딱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국민의 세금을 거둘 땐 겸손하게 거두라. 두 번째, 그 세금을 쓸 때는 더더욱 겸손하게 쓰라."


그가 박 대통령과 연을 맺게 된 것도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 전 위원장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봉사단체를 운영하던 중 교육현장을 방문한 박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박 대통령의 교육철학과 열정에 감명받아 "그 2시간 얘기 들은 것 때문에 2년을 다 바쳤다"고 말할 정도다.


이후에도 새누리당 혁신위원장(2014년)을 맡으며 쓴소리를 했고, 2016년 총선 때는 서울 노원병 지역에 출마해 안철수와 맞붙었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키즈도 스승과 결별한다.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올해 그의 발언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치기 어린 박근혜 키즈의 반항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2016.11.13)


"너도 박근혜 대통령 도왔던 사람인데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2016.11.15)


"대통령을 등에 업고 위세 부렸던 세력을 청산해야 합니다.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켰던 사람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2016.11.23.)

그런데


남경필 도지사에 이어 2016년 12월 21일 김무성, 유승민, 나경원, 이혜훈 의원도 새누리당 탈당을 공식화했다.


김무성 의원은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불통 정치가 헌법 유린으로 이어졌다."며 현 시국을 막지 못한 점에 대해서 사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친박한 비박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친박'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