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노벨평화상 탔지만 ‘콜롬비아 내전 종식’은 진행형

입력 2016.10.08 (21:49) 수정 2016.10.0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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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오랫동안 내전이 계속돼온 남미 콜롬비아에서 정부와 반군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52년간의 내전이 종식될 것으로 기대됐었는데요,

국민투표 인준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국민들, 과반수가 평화협정에 반대했는데요, 이유가 뭘까요?

박영관 특파원이 현지에 가봤습니다.

<리포트>

지난달 26일, 콜롬비아 정부와 최대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은 4년 가까운 협상 끝에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했습니다.

<인터뷰> 산토스(콜롬비아 대통령) : "우리는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은 그만'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엿새 뒤 치러진 국민 투표, 관심은 국민투표 통과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찬성표가 나올 될 것이냐는 데 쏠려 있었습니다.

<인터뷰> 두란(평화협정 찬성운동본부 대표) : "큰 차이로 이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투표 이후 진행될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콜롬비아 국민들에게 더 큰 신뢰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찬성 49.8%, 반대 50.2%로 평화협정이 부결된 것입니다.

<인터뷰> 바론(평화협정 지지자) : "무엇보다도 콜롬비아 평화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는데,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국민투표 다음날, 보고타 시내의 한 회사에서 콜롬비아 직장인들을 만났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6명 가운데 평화협정에 찬성한 사람은 2명, 반대한 사람은 4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국민투표에서 평화협정이 부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카밀라(평화협정 반대 직장인) : "반대라고 하면 사람들이 평화를 싫어하느냐고 다그치니까, 그냥 찬성한다고 말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게 나라가 찬성과 반대로 갈라졌어요."

콜롬비아 국민들은 왜 반세기 만에 만들어진 평화협정안에 반대표를 던진 걸까?

콜롬비아 제3의 도시 칼리는 과거 반군에 의한 피해가 심했던 지역 중 하나입니다.

지난 2002년 4월 11일 콜롬비아무장혁명군 게릴라들이 이 건물에 난입해 회의 중이던 주 하원의원 12명을 납치했습니다.

게릴라들은 하원의원들을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산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정부에 체포된 반군 포로들과 교환하기 위해 인질로 잡은 것입니다.

지루한 협상이 이어지면서 하원의원들은 5년 동안 억류돼 있었고, 결국, 2007년에 12명 중 11명이 살해됐습니다.

휴대전화 속에 간직한 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챠레 씨, 아버지를 살해한 반군과 정부의 평화협상을 지켜보며 챠레 씨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고 말합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결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챠레(살해된 하원의원 딸) : "전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아픔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은 제 마지막 기대마저 빼앗아 갔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셨어야 했어요."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1964년 농민 반란을 시작으로 정부와 내전을 이어왔습니다.

52년 동안 26만 명이 숨지고, 47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반군 게릴라들은 특히 1980년대 이후 마약 거래로 조직을 확장했고, 납치와 고문, 살해 등 갖가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인터뷰> 레트버그(로스안데스대학 교수) : "콜롬비아 국민 대부분이 콜롬비아 무장혁명 군을 싫어하고, 그들이 (평화협정 이후) 시민 정당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반군 게릴라들은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부터 조직원 교육을 시작합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2살에 반군에 들어간 마림 씨는 14살부터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마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고민 끝에 19살에 탈출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반군의 목표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왜 가난한 자신의 고향 마을을 공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인터뷰> 마림(전 반군 조직원) : "게릴라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폭탄과 무기로 제가 상처를 주고 있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서 이탈한 조직원은 약 만 6천 명, 이제 남아 있는 조직원은 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정부는 탈출한 반군 조직원들의 사회 복귀를 돕고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신변 안전도 문제입니다.

<인터뷰> 에라쏘(평화연합 팀장) : "이들은 무장 반군에서 탈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군으로부터) 전화 주척을 당하거나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내전은 반군에 의한 희생자뿐 아니라, 반군과 일반 국민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베 전 대통령 등 이번 평화협정에 반대한 사람들도 모두 평화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과거 반군의 범죄를 대부분 사면하기로 한 평화협정 조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리에뇨(평화협상 반대 투표자) : "이번 협정에는 정의가 빠져있습니다. 범죄자들은 교도소에 보내는 것이 정의입니다."

과거 반군의 범죄를 그냥 묻고 갈 수 없다는 국민들의 반대 속에 평화협정안은 부결됐지만, 산토스 대통령은 내전 종식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인터뷰> 산토스(콜롬비아 대통령) : "제게 이 상을 준 이유는 국민투표 이후 생긴 상황과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루 빨리 찾으라는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새운 평화의 길을 찾는 것이 52년 내전을 끝내기 위한 남은 과제입니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박영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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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리포트] 노벨평화상 탔지만 ‘콜롬비아 내전 종식’은 진행형
    • 입력 2016-10-08 22:44:26
    • 수정2016-10-08 23:10:24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앵커 멘트>

오랫동안 내전이 계속돼온 남미 콜롬비아에서 정부와 반군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52년간의 내전이 종식될 것으로 기대됐었는데요,

국민투표 인준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국민들, 과반수가 평화협정에 반대했는데요, 이유가 뭘까요?

박영관 특파원이 현지에 가봤습니다.

<리포트>

지난달 26일, 콜롬비아 정부와 최대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은 4년 가까운 협상 끝에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했습니다.

<인터뷰> 산토스(콜롬비아 대통령) : "우리는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은 그만'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엿새 뒤 치러진 국민 투표, 관심은 국민투표 통과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찬성표가 나올 될 것이냐는 데 쏠려 있었습니다.

<인터뷰> 두란(평화협정 찬성운동본부 대표) : "큰 차이로 이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투표 이후 진행될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콜롬비아 국민들에게 더 큰 신뢰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찬성 49.8%, 반대 50.2%로 평화협정이 부결된 것입니다.

<인터뷰> 바론(평화협정 지지자) : "무엇보다도 콜롬비아 평화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는데,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국민투표 다음날, 보고타 시내의 한 회사에서 콜롬비아 직장인들을 만났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6명 가운데 평화협정에 찬성한 사람은 2명, 반대한 사람은 4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국민투표에서 평화협정이 부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카밀라(평화협정 반대 직장인) : "반대라고 하면 사람들이 평화를 싫어하느냐고 다그치니까, 그냥 찬성한다고 말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게 나라가 찬성과 반대로 갈라졌어요."

콜롬비아 국민들은 왜 반세기 만에 만들어진 평화협정안에 반대표를 던진 걸까?

콜롬비아 제3의 도시 칼리는 과거 반군에 의한 피해가 심했던 지역 중 하나입니다.

지난 2002년 4월 11일 콜롬비아무장혁명군 게릴라들이 이 건물에 난입해 회의 중이던 주 하원의원 12명을 납치했습니다.

게릴라들은 하원의원들을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산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정부에 체포된 반군 포로들과 교환하기 위해 인질로 잡은 것입니다.

지루한 협상이 이어지면서 하원의원들은 5년 동안 억류돼 있었고, 결국, 2007년에 12명 중 11명이 살해됐습니다.

휴대전화 속에 간직한 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챠레 씨, 아버지를 살해한 반군과 정부의 평화협상을 지켜보며 챠레 씨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고 말합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결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챠레(살해된 하원의원 딸) : "전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아픔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은 제 마지막 기대마저 빼앗아 갔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셨어야 했어요."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1964년 농민 반란을 시작으로 정부와 내전을 이어왔습니다.

52년 동안 26만 명이 숨지고, 47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반군 게릴라들은 특히 1980년대 이후 마약 거래로 조직을 확장했고, 납치와 고문, 살해 등 갖가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인터뷰> 레트버그(로스안데스대학 교수) : "콜롬비아 국민 대부분이 콜롬비아 무장혁명 군을 싫어하고, 그들이 (평화협정 이후) 시민 정당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반군 게릴라들은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부터 조직원 교육을 시작합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2살에 반군에 들어간 마림 씨는 14살부터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마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고민 끝에 19살에 탈출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반군의 목표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왜 가난한 자신의 고향 마을을 공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인터뷰> 마림(전 반군 조직원) : "게릴라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폭탄과 무기로 제가 상처를 주고 있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서 이탈한 조직원은 약 만 6천 명, 이제 남아 있는 조직원은 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정부는 탈출한 반군 조직원들의 사회 복귀를 돕고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신변 안전도 문제입니다.

<인터뷰> 에라쏘(평화연합 팀장) : "이들은 무장 반군에서 탈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군으로부터) 전화 주척을 당하거나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내전은 반군에 의한 희생자뿐 아니라, 반군과 일반 국민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베 전 대통령 등 이번 평화협정에 반대한 사람들도 모두 평화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과거 반군의 범죄를 대부분 사면하기로 한 평화협정 조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리에뇨(평화협상 반대 투표자) : "이번 협정에는 정의가 빠져있습니다. 범죄자들은 교도소에 보내는 것이 정의입니다."

과거 반군의 범죄를 그냥 묻고 갈 수 없다는 국민들의 반대 속에 평화협정안은 부결됐지만, 산토스 대통령은 내전 종식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인터뷰> 산토스(콜롬비아 대통령) : "제게 이 상을 준 이유는 국민투표 이후 생긴 상황과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루 빨리 찾으라는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새운 평화의 길을 찾는 것이 52년 내전을 끝내기 위한 남은 과제입니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박영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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