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 사회…발암물질 야근

입력 2017.03.19 (22:52) 수정 2017.03.1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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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를 넘겨서도 계속되는 업무.

처리할 일은 아직도 산더미입니다.

<녹취> "희진 씨, 기옥 씨, 급여 신고액! (아니오) 상태 씨! (아니오) 다들 완료 안 됐으면 안타깝지만 오늘 날 새고 퇴근입니다."

드라마가 그린 직장인의 모습인데, 현실은 어떨까요?

밤에도 불을 밝히고 있는 이곳은 경기도 성남의 판교 테크노밸리 일대입니다.

야근이 잦은 이곳의 직장인들은 자신들의 회사를 판교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잡이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요, 야근을 할 때 불을 켜놓는데 야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불이 주변까지 밝게 비출 정도라는 겁니다.

<리포트>

그래픽 디자이너 이 모 씨는 한 회사의 간판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각종 디자인을 전담합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운전을 하던 도중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면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습니다.

<녹취> 이○○(그래픽 디자이너) : "(차에서) 나와서 걸어가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바로 걷질 못하겠는 거예요. 우측 머리 쪽이 답답하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있으면서 약간의 통증이 있더라고요."

30대 후반의 나이로 평소 건강했던 이 씨의 병명은 뇌경색.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한달 내내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한 뒤였습니다.

<녹취> 이○○(그래픽 디자이너) : "평소에 5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시간외 근무를 하고 그날 토요일 날이었는데, 토요일날 나와서 일하고…. 너무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 왔다고 생각하니까 좀 막막했죠. 감기처럼 바로 낫는 병이 아니잖아요. 잘못하면 장애가 올 수도 있는 병이고."

이런 야근이 많은 대표적인 업종은 게임업계, 유행이 자주 바뀌는 모바일 게임이 주류가 되면서 개발 기간도 수 개월 단위까지로 짧아졌기 때문입니다.

<녹취> 게임 개발자(29살/음성변조) : "모바일 게임이 좀 특이한 경우인데 서비스를 하고 계속 고객들이 살 물건들을 진열대에 갖다놔야 되잖아요. 그래서 크런치하고."

크런치는 '깨물어 부순다'는 뜻으로 '크런치 모드'는 마감 일자를 맞추려고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상황을 빗댄 말입니다.

<녹취> 게임 개발자(32살/음성변조) : "크런치 모드로 심하게 했을 때는 퇴근시각이 보통 (밤) 10시 아니면 11시, 12시 많이 했었거든요. 그리고 주말 출근도 한 6~8시간씩 했었고 그걸 한 달 좀 넘게 했었어요. 심하게 했을 때는. 그 정도로 하면 사람이정말 상당히 많이 지치고, 팀 전체가 많이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폐해지죠."

국내 1위의 이 모바일 게임업체에선 지난해 2,30대 직원 2명이 돌연사했습니다.

회사 측은 직원 사망에 업무 연관성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달 야근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나오던 불빛이 저녁 8시에 갑자기 꺼집니다.

일을 그만하라는 회사측의 소등 조치입니다.

<녹취> 서장원(넷마블게임즈 부사장) : "이제는 승인을 하지 않으면 야근을 안하는 상황이 된 거고요. 주말 근무도 마찬가지고요. 점점 더 제도가 정착돼가지고 당연히 그렇게 되면 인원 충원도 필요할 수 있겠죠."

그런데 소등 후에도 불이 다시 켜지고, 늦게 퇴근하는 직원들의 모습도 포착됐습니다.

<녹취> "(회사 지금 퇴근 하신 거예요?) 네. (원래 지금 퇴근하세요? 8시에 소등한다고 그러던데?) 그때 그때 달라요."

회사 측은 업무 특성상 사전 승인하에 야근을 하는 경우가 있고, 야근 이후 휴가를 쓰게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게임업체만의 일일까?

지난달 집배원 44살 조만식 씨는 일요일 저녁에도 출근해 우편 분류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찾아와보니 조 씨는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녹취> 김홍태(주민) : "연락이 안되니까 직원 분들이 문을 따라고 했어요, 119 불러가지고. 그래서 따서 보니까 돌아가셨더라고요."

1차부검 소견은 돌연사 증상의 하나인 동맥경화에 의한 심정지.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고 우체국 근처에 방을 따로 얻어 살면서 늦은 나이에 맞이한 신혼 생활도 즐기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조영욱(故 조만식 집배원 형) : "아침 7시 출근해서 저녁 7시, 8시 돼서 (우체국에) 들어와가지고 또 그때부터 그 다음날 배달할 걸 분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고나면 10시, 11시 어쩔때는 새벽까지 이렇게…. 그리고 또 아침에 나와서 배달하고. 하루 이틀 그런 게 아니라 계속 그런다 이거예요."

1년 새 조 씨를 포함해 집배원 7명이 돌연사했습니다.

<녹취> 최민(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 "특별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발생한 사망을 돌연사라고 하는데요. 돌연사의 경우 대부분 70~80% 이상이 심근경색 혹은 심장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시간 노동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뇌출혈 환자와 건강한 사람 3천명을 비교 분석한 결과 하루 13시간 이상 근무자는 뇌출혈 위험이 2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36시간 연속 근무 뒤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60대 초반 경비원의 뇌 사진입니다.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출혈 부위입니다.

<인터뷰> 김범준(분당서울대병원 뇌신경센터 교수) : "일을 많이 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 혈압 관리가 잘 안되고,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혈압이 순식간에 상승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 때문에 노동시간이 길고 노동 중에서도 격렬한 활동을 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 뇌출혈 위험성이 많이 증가하죠."

야근은 발암물질로도 분류돼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야근을 살충제 성분인 DDT와 나란히 '2군 발암물질'에 올렸습니다.

야근이 생체 리듬을 교란시키면서 암의 간접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판단입니다.

<녹취> 임세원(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부소장) : "야근이나 이런 부분들이 스트레스를 증가시키고, 증가된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노출됨으로 인해서 암의 발병 가능성이 커지는 중간에 매개되는 것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정신 건강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직장인 20만 명을 조사했더니 4시간 이하로 잘 때 자살 생각을 할 확률은 2.5배, 우울증 위험도는 4배 높았습니다.

하지만 과로 후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받기는 힘든 게 현실입니다.

숨진 집배원 조만식 씨의 형은 동생을 잃은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습니다.

과로사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근무 기록과 같은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겁니다.

<인터뷰> 조영욱(故 조만식 집배원 형) : "근무 기록표 좀 보자고 해도 바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보통 다른 회사들 같은 경우는 유가족이 와서 이렇게 보자고 하면 컴퓨터에 다 저장 돼 있으니까 그냥 바로 나오잖아요.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연간 노동시간 OECD 국가 2위일 정도로 과로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지만,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4명 가운데 1명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인터뷰> 정병욱(변호사) : "객관적인 기준이 좀 애매모호하다고 해야할까요? 그런 것 때문에 산재, 특히 과로로 인한 경우에는 좀 산재 인정에 있어서 법원이 들쭉날쭉 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로사에 대한 정의 규정을 명확하게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근 관행이 뿌리깊은 일본, 한 신입사원의 자살을 계기로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도쿄대를 나와 일본 최대 광고회사인 덴츠에 입사한 24살 다카하시 마츠리 씨가 숨지기 전 SNS에 남긴 글입니다.

"자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감정을 잃었다"

"하루 20시간 회사에 있으니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

한 달 초과근무만 105시간.

53시간 연속 근무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말 과로사 산재가 인정됐고, 사측의 근무시간 기록 축소가 드러나면서 일본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월 80시간 이상 초과 근무한 기업 명단을 공개하고, 야근을 제한하는 방안도 추진중입니다.

<인터뷰> 故 다카하시 씨 어머니 : "기업의 노무관리가 개혁되고, 정부도 기업 지도를 신속히 실행하기를 원합니다."

과로사가 문제가 되면서 우리나라도 노동부가 IT와 게임업체 100곳에 대한 근로 감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1회성 관리감독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단순히 일하는 시간대만 바꾸는 게 아니라 채용을 늘리면서 업무 시간을 단축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터뷰> 김종진(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 "우리나라 기업은 한 명 채용하는 것 보다는 연장근무 초과근무 수당을 주는 게 더 비용이 남습니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이런 구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개입은 국가 정부가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거든요.부서 팀의 업무량이 이렇게 쌓여있는데 하루 쉰다거나 조기 퇴근 한다면 실효성이 없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근무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 기업의 적정 업무량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서 인력 투여가 전제되지 않는 노동시간 단축의 제도는 실효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7,80년대 노동 집약적인 산업에서 시작해 기술과 정보를 활용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들어선 요즘.

아직도 OECD 평균보다 1년에 43일 더 일하는 한국인은 더 빨리 시들고 있습니다.

회사에 오래 머무르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도 노동생산성은 꼴찌 수준입니다.

결국 일자리를 나누고 초과 근무를 줄이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 회복도 이끄는 첫 걸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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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로 사회…발암물질 야근
    • 입력 2017-03-19 22:57:33
    • 수정2017-03-19 23:42:03
    취재파일K
밤 11시를 넘겨서도 계속되는 업무.

처리할 일은 아직도 산더미입니다.

<녹취> "희진 씨, 기옥 씨, 급여 신고액! (아니오) 상태 씨! (아니오) 다들 완료 안 됐으면 안타깝지만 오늘 날 새고 퇴근입니다."

드라마가 그린 직장인의 모습인데, 현실은 어떨까요?

밤에도 불을 밝히고 있는 이곳은 경기도 성남의 판교 테크노밸리 일대입니다.

야근이 잦은 이곳의 직장인들은 자신들의 회사를 판교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잡이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요, 야근을 할 때 불을 켜놓는데 야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불이 주변까지 밝게 비출 정도라는 겁니다.

<리포트>

그래픽 디자이너 이 모 씨는 한 회사의 간판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각종 디자인을 전담합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운전을 하던 도중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면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습니다.

<녹취> 이○○(그래픽 디자이너) : "(차에서) 나와서 걸어가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바로 걷질 못하겠는 거예요. 우측 머리 쪽이 답답하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있으면서 약간의 통증이 있더라고요."

30대 후반의 나이로 평소 건강했던 이 씨의 병명은 뇌경색.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한달 내내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한 뒤였습니다.

<녹취> 이○○(그래픽 디자이너) : "평소에 5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시간외 근무를 하고 그날 토요일 날이었는데, 토요일날 나와서 일하고…. 너무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 왔다고 생각하니까 좀 막막했죠. 감기처럼 바로 낫는 병이 아니잖아요. 잘못하면 장애가 올 수도 있는 병이고."

이런 야근이 많은 대표적인 업종은 게임업계, 유행이 자주 바뀌는 모바일 게임이 주류가 되면서 개발 기간도 수 개월 단위까지로 짧아졌기 때문입니다.

<녹취> 게임 개발자(29살/음성변조) : "모바일 게임이 좀 특이한 경우인데 서비스를 하고 계속 고객들이 살 물건들을 진열대에 갖다놔야 되잖아요. 그래서 크런치하고."

크런치는 '깨물어 부순다'는 뜻으로 '크런치 모드'는 마감 일자를 맞추려고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상황을 빗댄 말입니다.

<녹취> 게임 개발자(32살/음성변조) : "크런치 모드로 심하게 했을 때는 퇴근시각이 보통 (밤) 10시 아니면 11시, 12시 많이 했었거든요. 그리고 주말 출근도 한 6~8시간씩 했었고 그걸 한 달 좀 넘게 했었어요. 심하게 했을 때는. 그 정도로 하면 사람이정말 상당히 많이 지치고, 팀 전체가 많이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폐해지죠."

국내 1위의 이 모바일 게임업체에선 지난해 2,30대 직원 2명이 돌연사했습니다.

회사 측은 직원 사망에 업무 연관성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달 야근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나오던 불빛이 저녁 8시에 갑자기 꺼집니다.

일을 그만하라는 회사측의 소등 조치입니다.

<녹취> 서장원(넷마블게임즈 부사장) : "이제는 승인을 하지 않으면 야근을 안하는 상황이 된 거고요. 주말 근무도 마찬가지고요. 점점 더 제도가 정착돼가지고 당연히 그렇게 되면 인원 충원도 필요할 수 있겠죠."

그런데 소등 후에도 불이 다시 켜지고, 늦게 퇴근하는 직원들의 모습도 포착됐습니다.

<녹취> "(회사 지금 퇴근 하신 거예요?) 네. (원래 지금 퇴근하세요? 8시에 소등한다고 그러던데?) 그때 그때 달라요."

회사 측은 업무 특성상 사전 승인하에 야근을 하는 경우가 있고, 야근 이후 휴가를 쓰게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게임업체만의 일일까?

지난달 집배원 44살 조만식 씨는 일요일 저녁에도 출근해 우편 분류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찾아와보니 조 씨는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녹취> 김홍태(주민) : "연락이 안되니까 직원 분들이 문을 따라고 했어요, 119 불러가지고. 그래서 따서 보니까 돌아가셨더라고요."

1차부검 소견은 돌연사 증상의 하나인 동맥경화에 의한 심정지.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고 우체국 근처에 방을 따로 얻어 살면서 늦은 나이에 맞이한 신혼 생활도 즐기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조영욱(故 조만식 집배원 형) : "아침 7시 출근해서 저녁 7시, 8시 돼서 (우체국에) 들어와가지고 또 그때부터 그 다음날 배달할 걸 분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고나면 10시, 11시 어쩔때는 새벽까지 이렇게…. 그리고 또 아침에 나와서 배달하고. 하루 이틀 그런 게 아니라 계속 그런다 이거예요."

1년 새 조 씨를 포함해 집배원 7명이 돌연사했습니다.

<녹취> 최민(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 "특별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발생한 사망을 돌연사라고 하는데요. 돌연사의 경우 대부분 70~80% 이상이 심근경색 혹은 심장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시간 노동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뇌출혈 환자와 건강한 사람 3천명을 비교 분석한 결과 하루 13시간 이상 근무자는 뇌출혈 위험이 2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36시간 연속 근무 뒤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60대 초반 경비원의 뇌 사진입니다.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출혈 부위입니다.

<인터뷰> 김범준(분당서울대병원 뇌신경센터 교수) : "일을 많이 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 혈압 관리가 잘 안되고,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혈압이 순식간에 상승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 때문에 노동시간이 길고 노동 중에서도 격렬한 활동을 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 뇌출혈 위험성이 많이 증가하죠."

야근은 발암물질로도 분류돼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야근을 살충제 성분인 DDT와 나란히 '2군 발암물질'에 올렸습니다.

야근이 생체 리듬을 교란시키면서 암의 간접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판단입니다.

<녹취> 임세원(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부소장) : "야근이나 이런 부분들이 스트레스를 증가시키고, 증가된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노출됨으로 인해서 암의 발병 가능성이 커지는 중간에 매개되는 것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정신 건강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직장인 20만 명을 조사했더니 4시간 이하로 잘 때 자살 생각을 할 확률은 2.5배, 우울증 위험도는 4배 높았습니다.

하지만 과로 후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받기는 힘든 게 현실입니다.

숨진 집배원 조만식 씨의 형은 동생을 잃은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습니다.

과로사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근무 기록과 같은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겁니다.

<인터뷰> 조영욱(故 조만식 집배원 형) : "근무 기록표 좀 보자고 해도 바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보통 다른 회사들 같은 경우는 유가족이 와서 이렇게 보자고 하면 컴퓨터에 다 저장 돼 있으니까 그냥 바로 나오잖아요.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연간 노동시간 OECD 국가 2위일 정도로 과로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지만,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4명 가운데 1명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인터뷰> 정병욱(변호사) : "객관적인 기준이 좀 애매모호하다고 해야할까요? 그런 것 때문에 산재, 특히 과로로 인한 경우에는 좀 산재 인정에 있어서 법원이 들쭉날쭉 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로사에 대한 정의 규정을 명확하게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근 관행이 뿌리깊은 일본, 한 신입사원의 자살을 계기로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도쿄대를 나와 일본 최대 광고회사인 덴츠에 입사한 24살 다카하시 마츠리 씨가 숨지기 전 SNS에 남긴 글입니다.

"자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감정을 잃었다"

"하루 20시간 회사에 있으니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

한 달 초과근무만 105시간.

53시간 연속 근무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말 과로사 산재가 인정됐고, 사측의 근무시간 기록 축소가 드러나면서 일본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월 80시간 이상 초과 근무한 기업 명단을 공개하고, 야근을 제한하는 방안도 추진중입니다.

<인터뷰> 故 다카하시 씨 어머니 : "기업의 노무관리가 개혁되고, 정부도 기업 지도를 신속히 실행하기를 원합니다."

과로사가 문제가 되면서 우리나라도 노동부가 IT와 게임업체 100곳에 대한 근로 감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1회성 관리감독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단순히 일하는 시간대만 바꾸는 게 아니라 채용을 늘리면서 업무 시간을 단축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터뷰> 김종진(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 "우리나라 기업은 한 명 채용하는 것 보다는 연장근무 초과근무 수당을 주는 게 더 비용이 남습니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이런 구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개입은 국가 정부가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거든요.부서 팀의 업무량이 이렇게 쌓여있는데 하루 쉰다거나 조기 퇴근 한다면 실효성이 없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근무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 기업의 적정 업무량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서 인력 투여가 전제되지 않는 노동시간 단축의 제도는 실효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7,80년대 노동 집약적인 산업에서 시작해 기술과 정보를 활용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들어선 요즘.

아직도 OECD 평균보다 1년에 43일 더 일하는 한국인은 더 빨리 시들고 있습니다.

회사에 오래 머무르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도 노동생산성은 꼴찌 수준입니다.

결국 일자리를 나누고 초과 근무를 줄이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 회복도 이끄는 첫 걸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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