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미크로 간 고려인들의 사연은?

입력 2017.08.13 (22:56) 수정 2017.08.1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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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 알렉산드르(박 바실리 3남) : "14살까지 우즈베키스탄에 살다가 1965년 여름에 칼미크로 왔습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고려인들이 농업을 갖고 온 겁니다. 칼미크인들은 농사도 못하고 채소도 못키워요."

<인터뷰> 최 마리아 : "여긴 늙은이들만 살아. 젊은이들은 모두 외국이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일하러 갔고요."

이곳은 러시아의 남쪽, 카스피해와 인접한 칼미크 공화국입니다.

초원과 반사막지대가 대부분이어서 목축업이 위주인 이 땅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1937년 러시아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던 고려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은 어떤 연유로 이곳 칼미크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머나 먼 이국땅 칼미크에 사는 고려인들의 사연과 애환을 취재했습니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300km.

서쪽으로 카프카스 산맥, 오른쪽에 카스피해와 인접한 칼미크 자치 공화국입니다.

몽골족의 후예인 칼미크인들이 주축인 나라로 국토 대부분이 반사막지대여서 목축업이 중심인 곳입니다.

수도 엘리스타에서 280km 떨어진 악짜브리스키 주의 보스호트 농장입니다.

200헥타르가 넘는 광활한 들판을 수놓은 이 녹색식물은 바로 벼입니다.

<녹취> "이것은 보야린이라는 벼 종자인데요, 여기서 100 헥타르 논에 자라고 있죠."

햇살이 작렬하는 한여름.

낮기온이 섭씨 40도를 훌쩍 넘어서는 이맘때쯤엔 논에 제때 적절히 물을 대주는게 일입니다.

<인터뷰> 코르니코프(농장 수석 관리자) : "몇 주 있으면 벼 이삭이 나올텐데요. 관리인이 논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죠. 벼가 자랄 때에는 수위를 높입니다."

간혹 논의 둑이 무너져 내려서 중장비로 긴급 보수하기도 합니다.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은 60km 떨어진 볼가강에서 끌어옵니다.

관개 수로는 이미 50년 전부터 잘 발달돼 있습니다.

<녹취> 코르니코프(농장 수석 관리자) : "농장이 커 나갈 때 취수장이 건설됐는데,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때 새 취수장을 짓고 논을 키워나갔습니다."

해마다 4톤 정도의 수확을 올리는 이곳 벼농사를 시작한 주인공이 바로 고려인이라는 설명입니다.

농장 근처에 있는 보스호트 마을입니다.

극동에서 온 고려인들이 '해가 뜨는 마을'이라는 뜻의 보스호트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마을엔 현재 140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습니다.

74살 김 나데즈다 할머니는 1943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27살 되던 1970년, 이곳으로 이사 와서 농장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김 나데즈다(보스호트 고려인) : "가축도 몇 마리 있고, 작은 채소밭도 있었죠. 돼지 치기도 하고 닭도 치고, 그 전에는 새도 치고 그렇게 살았지."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 나데즈다(보스호트 고려인) : "길이 없어서 아주 안 좋았어요. 아스팔트 길이 없었단 말입니다. 길이 없어 고생했죠."

김 할머니 집 앞에 나 있는 길이 최초 고려인 이주민들이 닦았던 마을의 거리입니다.

이름하여 'KIM 거리'라 불립니다.

<인터뷰> 헨 루드밀라(보스호트 행정 책임자) : "농업전문가들, 수석 회계사, 농장 지도자들이 사는 최초의 집들이 이 거리를 따라 지어졌습니다. 이곳이 첫 번째 거리입니다."

칼미크로의 이주를 주도했던 박 바실리가 살던 집도 온전히 보존돼 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볼고그라드에 살고 있는 박 바실리의 아들들을 만나 자세한 사연을 들었습니다.

1908년 러시아 극동 하산에서 태어나 수력학을 공부했던 박 바실리는 29살이던 1937년 강제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당했습니다.

우즈벡 목화 생산에 공을 세워 1948년, 당시 가장 큰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칼미크 고위 인사가 새로운 기회를 제안했습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칼미크에서 땅과 모든 걸 주겠다면서 무얼 하겠냐고 물었죠. 아버지는 벼를 경작하자고 했습니다. 거기엔 물도 있고 필요한게 다 있다는 거였죠."

마침내 57살이던 1965년 박 바실리는 10여 명의 농업전문가들과 함께 칼미크 땅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척박한 땅에 물은 있었지만 목축업 밖에 몰랐던 칼미크 인들은 농사를 잘 짓는 고려인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고려인들이 농업을 갖고 온 겁니다. 칼미크 인들은 농사도 모르고 채소 키울 줄도 몰라요. 고려인들이 그들을 가르쳤어요. 벼 뿐만 아니라 채소, 사료 재배법을 가르쳤습니다."

정착 초기, 마을에 길이 없다는게 생각보다 큰 고통이었습니다.

<인터뷰> 박 알렉산드르(박 바실리 3남) : "겨우 흙길 밖에 없었는데, 날씨가 안 좋으면 집에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죠. 그냥 흙길이 마를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악조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한 끝에 3년 만에 최대 벼 수확량을 기록해 또한번 레닌 훈장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고려인들은 책임감이 강합니다. 다른 민족이 칼미크에 왔었다면 실패했을 겁니다. 오직 고려인만 해냈고 성공했어요."

보스호트 마을 한복판에 고려인 문화 센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난 1997년 뜻있는 고려인들이 한국 문화를 전수하기 위해 이 센터를 건립했습니다.

<인터뷰> 장 스베틀라나(고려인문화센터장) : "우리는 한국 전통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요. 제 어머니가 선생님이어서 한글을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최근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지만, 재정난 때문에 지난 3년 동안 문을 닫았다가 최근에야 내부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방치된 결과 문화센터는 창고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사무실 곳곳에 먼지가 뿌옇게 내려 앉았습니다.

<인터뷰> 장 스베틀라나(고려인문화센터장) : "우리는 책도 교과서도 없고요. 건물이 위험한 상태라서 공부를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수리할 만한 자금이 부족해요."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않으려는 고려인들의 노력은 지금 벽에 부딪혔습니다.

한때 1500명 정도로 번성했던 고려인 공동체는 이제 100여 명으로 줄어들어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청년층과 중장년층이 모두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과거 소련 시절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뤄졌던 것에 비해 이제는 농업에도 경제 논리가 적용된 것이 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인터뷰> 헨 루드밀라(보스호트 행정 책임자) : "소련 시절과 달리 이젠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땅도 물도 모기약도 비료도 사야 되죠. 농장은 그럴만한 돈이 없어서 경작지가 자꾸 줄어드는 거예요. 그러니 인구가 줄어드는 거죠."

수도 엘리스타에서 만난 칼미크 공화국의 행정 수반은 위기에 처한 고려인 문화 센터 소식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 소수민족 고유의 글과 문화를 지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몫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인터뷰> 알렉세이 올로프(칼미크 공화국 행정 수반) : "그 민족 공동체에서 기금과 자선, 후원, 사업가를 찾아서 고유의 말을 가르치도록 지원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이곳 고려인들에게도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칼미크의 고려인 공동체는 규모가 너무 작고, 그들의 뿌리인 한국에서는 칼미크의 고려인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60대 고려인 할머니들.

마을에서 유일하게 사물놀이를 할 줄 아는 분들인데,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반가와하며 한바탕 흥을 돋웁니다.

해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신명나는 사물놀이로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인자(보스호트 고려인/69살) : "한국 사람들이 여기 와서 사물놀이 노는거 보고 멜로디를 듣고 그걸 따라서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고국과 동포들을 향한 마음은 애틋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터뷰> 리 아리나(보스호트 고려인/67살) : "우리는 반갑죠. 당신들 와서 우리 모르는 것도 배워주고 고려말도 온전하게 배워주고..."

<인터뷰> 강 루드밀라(보스호트 고려인/63살) : "코레아(한국) 사람들이 전쟁 없이 잘 살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극동에서 원치않게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다시 칼미크에 와서 삶의 터전을 닦은 고려인들.

그들이 평생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은 것처럼 이제는 한국이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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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미크로 간 고려인들의 사연은?
    • 입력 2017-08-13 22:52:38
    • 수정2017-08-13 23: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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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 알렉산드르(박 바실리 3남) : "14살까지 우즈베키스탄에 살다가 1965년 여름에 칼미크로 왔습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고려인들이 농업을 갖고 온 겁니다. 칼미크인들은 농사도 못하고 채소도 못키워요."

<인터뷰> 최 마리아 : "여긴 늙은이들만 살아. 젊은이들은 모두 외국이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일하러 갔고요."

이곳은 러시아의 남쪽, 카스피해와 인접한 칼미크 공화국입니다.

초원과 반사막지대가 대부분이어서 목축업이 위주인 이 땅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1937년 러시아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던 고려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은 어떤 연유로 이곳 칼미크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머나 먼 이국땅 칼미크에 사는 고려인들의 사연과 애환을 취재했습니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300km.

서쪽으로 카프카스 산맥, 오른쪽에 카스피해와 인접한 칼미크 자치 공화국입니다.

몽골족의 후예인 칼미크인들이 주축인 나라로 국토 대부분이 반사막지대여서 목축업이 중심인 곳입니다.

수도 엘리스타에서 280km 떨어진 악짜브리스키 주의 보스호트 농장입니다.

200헥타르가 넘는 광활한 들판을 수놓은 이 녹색식물은 바로 벼입니다.

<녹취> "이것은 보야린이라는 벼 종자인데요, 여기서 100 헥타르 논에 자라고 있죠."

햇살이 작렬하는 한여름.

낮기온이 섭씨 40도를 훌쩍 넘어서는 이맘때쯤엔 논에 제때 적절히 물을 대주는게 일입니다.

<인터뷰> 코르니코프(농장 수석 관리자) : "몇 주 있으면 벼 이삭이 나올텐데요. 관리인이 논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죠. 벼가 자랄 때에는 수위를 높입니다."

간혹 논의 둑이 무너져 내려서 중장비로 긴급 보수하기도 합니다.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은 60km 떨어진 볼가강에서 끌어옵니다.

관개 수로는 이미 50년 전부터 잘 발달돼 있습니다.

<녹취> 코르니코프(농장 수석 관리자) : "농장이 커 나갈 때 취수장이 건설됐는데,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때 새 취수장을 짓고 논을 키워나갔습니다."

해마다 4톤 정도의 수확을 올리는 이곳 벼농사를 시작한 주인공이 바로 고려인이라는 설명입니다.

농장 근처에 있는 보스호트 마을입니다.

극동에서 온 고려인들이 '해가 뜨는 마을'이라는 뜻의 보스호트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마을엔 현재 140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습니다.

74살 김 나데즈다 할머니는 1943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27살 되던 1970년, 이곳으로 이사 와서 농장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김 나데즈다(보스호트 고려인) : "가축도 몇 마리 있고, 작은 채소밭도 있었죠. 돼지 치기도 하고 닭도 치고, 그 전에는 새도 치고 그렇게 살았지."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 나데즈다(보스호트 고려인) : "길이 없어서 아주 안 좋았어요. 아스팔트 길이 없었단 말입니다. 길이 없어 고생했죠."

김 할머니 집 앞에 나 있는 길이 최초 고려인 이주민들이 닦았던 마을의 거리입니다.

이름하여 'KIM 거리'라 불립니다.

<인터뷰> 헨 루드밀라(보스호트 행정 책임자) : "농업전문가들, 수석 회계사, 농장 지도자들이 사는 최초의 집들이 이 거리를 따라 지어졌습니다. 이곳이 첫 번째 거리입니다."

칼미크로의 이주를 주도했던 박 바실리가 살던 집도 온전히 보존돼 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볼고그라드에 살고 있는 박 바실리의 아들들을 만나 자세한 사연을 들었습니다.

1908년 러시아 극동 하산에서 태어나 수력학을 공부했던 박 바실리는 29살이던 1937년 강제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당했습니다.

우즈벡 목화 생산에 공을 세워 1948년, 당시 가장 큰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칼미크 고위 인사가 새로운 기회를 제안했습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칼미크에서 땅과 모든 걸 주겠다면서 무얼 하겠냐고 물었죠. 아버지는 벼를 경작하자고 했습니다. 거기엔 물도 있고 필요한게 다 있다는 거였죠."

마침내 57살이던 1965년 박 바실리는 10여 명의 농업전문가들과 함께 칼미크 땅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척박한 땅에 물은 있었지만 목축업 밖에 몰랐던 칼미크 인들은 농사를 잘 짓는 고려인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고려인들이 농업을 갖고 온 겁니다. 칼미크 인들은 농사도 모르고 채소 키울 줄도 몰라요. 고려인들이 그들을 가르쳤어요. 벼 뿐만 아니라 채소, 사료 재배법을 가르쳤습니다."

정착 초기, 마을에 길이 없다는게 생각보다 큰 고통이었습니다.

<인터뷰> 박 알렉산드르(박 바실리 3남) : "겨우 흙길 밖에 없었는데, 날씨가 안 좋으면 집에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죠. 그냥 흙길이 마를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악조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한 끝에 3년 만에 최대 벼 수확량을 기록해 또한번 레닌 훈장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박 발레리(박 바실리 차남) : "고려인들은 책임감이 강합니다. 다른 민족이 칼미크에 왔었다면 실패했을 겁니다. 오직 고려인만 해냈고 성공했어요."

보스호트 마을 한복판에 고려인 문화 센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난 1997년 뜻있는 고려인들이 한국 문화를 전수하기 위해 이 센터를 건립했습니다.

<인터뷰> 장 스베틀라나(고려인문화센터장) : "우리는 한국 전통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요. 제 어머니가 선생님이어서 한글을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최근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지만, 재정난 때문에 지난 3년 동안 문을 닫았다가 최근에야 내부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방치된 결과 문화센터는 창고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사무실 곳곳에 먼지가 뿌옇게 내려 앉았습니다.

<인터뷰> 장 스베틀라나(고려인문화센터장) : "우리는 책도 교과서도 없고요. 건물이 위험한 상태라서 공부를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수리할 만한 자금이 부족해요."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않으려는 고려인들의 노력은 지금 벽에 부딪혔습니다.

한때 1500명 정도로 번성했던 고려인 공동체는 이제 100여 명으로 줄어들어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청년층과 중장년층이 모두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과거 소련 시절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뤄졌던 것에 비해 이제는 농업에도 경제 논리가 적용된 것이 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인터뷰> 헨 루드밀라(보스호트 행정 책임자) : "소련 시절과 달리 이젠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땅도 물도 모기약도 비료도 사야 되죠. 농장은 그럴만한 돈이 없어서 경작지가 자꾸 줄어드는 거예요. 그러니 인구가 줄어드는 거죠."

수도 엘리스타에서 만난 칼미크 공화국의 행정 수반은 위기에 처한 고려인 문화 센터 소식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 소수민족 고유의 글과 문화를 지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몫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인터뷰> 알렉세이 올로프(칼미크 공화국 행정 수반) : "그 민족 공동체에서 기금과 자선, 후원, 사업가를 찾아서 고유의 말을 가르치도록 지원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이곳 고려인들에게도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칼미크의 고려인 공동체는 규모가 너무 작고, 그들의 뿌리인 한국에서는 칼미크의 고려인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60대 고려인 할머니들.

마을에서 유일하게 사물놀이를 할 줄 아는 분들인데,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반가와하며 한바탕 흥을 돋웁니다.

해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신명나는 사물놀이로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인자(보스호트 고려인/69살) : "한국 사람들이 여기 와서 사물놀이 노는거 보고 멜로디를 듣고 그걸 따라서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고국과 동포들을 향한 마음은 애틋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터뷰> 리 아리나(보스호트 고려인/67살) : "우리는 반갑죠. 당신들 와서 우리 모르는 것도 배워주고 고려말도 온전하게 배워주고..."

<인터뷰> 강 루드밀라(보스호트 고려인/63살) : "코레아(한국) 사람들이 전쟁 없이 잘 살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극동에서 원치않게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다시 칼미크에 와서 삶의 터전을 닦은 고려인들.

그들이 평생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은 것처럼 이제는 한국이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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