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영화 ‘말모이’와 함께 보는 우리말의 탄생

입력 2019.01.27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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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 1940년대 조선어 말살정책을 쓰던 일제 강점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경성역에 내린 유정환(윤계상 역)에게 부딪힌 아이가 죄송하다며 말한다. "스미마셍." 정환이 "너는 조선인인데 미안하다고 해야지, 스미마셍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조선말을 모른다며 가버린다. 일본어 상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학교에서도 조선말을 가르치지 못하고, 우리 땅에서 우리 말이 사라져 가던 시기,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이다.

'말모이'는 민족 계몽운동 단체인 광문회에서 주시경과 김두봉 선생이 주도해 만들기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이다. '사전(辭典)'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인데, 1911년 사업을 시작했으나 주시경 사망과 김두봉의 망명으로 중단되었다가, 조선어 사전편찬회와 조선어연구회를 거쳐 조선어학회가 넘겨받았다.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유정환은 조선어학회 대표. 한글도 떼지 못한 까막눈 판수 (유해진 역)가 아들의 월사금을 내기 위해 소매치기에 나섰다가 정환과 엮이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중심에 두고 겨레의 말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이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따라가는데,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인생의 변화를 겪는 것은 역시 판수이다. 평범하기만 한 삶을 살던 판수가 겨레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희생하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익숙한 감동을 준다.

우리가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한글'을 우리말로 쓰며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저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너무나 잊기 쉬운 진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 거의 온전한 자기 말을 지킨 몇 안 되는 나라이다. - 영화 ≪말모이≫ 중

그럼 정말 우리말 큰사전의 원고는 판수가 들고 튄 저 가방 하나에 담겨있었을까?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가 발견된다. 이 상자에 들어있던 것이 바로 조선어사전 원고.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500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이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 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본문 33쪽

영화에서 판수가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그 원고, 사실은 일본 경찰이 압수해서 고등법원에 보내려고 했던 원고지 2만 6천 장 분량의 원고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책으로 진입하는 지점이다.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의 역사 추적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최경봉 교수의 『우리말의 탄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역사를 추적한다.

조선어학회는 1936년 이후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역량을 쏟았으며, 한글 강습운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며 언어 정리 사업을 주도해 나간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조선어사전의 출판을 허가했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몰아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이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것은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정태진이다. '교사 시절 일본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꾸짖는 등 조선 독립을 선동하는 일을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뒤, 고문에 못 이겨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고 허위자백을 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과정에서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인 이윤재도 잃고 만다. 최경봉 교수가 자료 조사를 통해 서술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영화 속에서 조금 다르게 변주된다.

영화 《말모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감옥소 동기’들이 사투리 확인을 돕는다.영화 《말모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감옥소 동기’들이 사투리 확인을 돕는다.

영화 ≪말모이≫에서 감동을 주는 포인트 중 하나는 잡초처럼 짓밟히고 뒹굴어도 꿋꿋이 버텨낸 '보통사람들'의 모습이다. "벌써 30년이야! 독립? 독립이 언제 될 거 같아?" 하고 외치는 지식인의 기회주의에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하루살이도 빠듯해 보이지만 '우리말을 지키는 선생님들' 먼저 피신하라며 몸을 던지는 보통사람들, 혹은 무지렁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용기를 냈던 평범한 이들의 모습에 선선히 마음을 내주게 된다.


책은 사전을 만들기 위해 길을 닦은 사람들과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역할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사전 편찬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사투리를 모으기 위해서 어떤 이들이 자원봉사를 했는지, 부족한 인쇄비를 모으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생생하게 서술한다.

또한 1947년 해방 2년 만에 ≪조선말큰사전≫을 출판했지만,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우리말 사전도 갈라진 과정을 따라간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남북 우리말 사전 편찬 사업이 다시 본격화되고 있는 시기여서 더더욱 반가운 책이다.

『우리말의 탄생』지은이 최경봉, 출판사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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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영화 ‘말모이’와 함께 보는 우리말의 탄생
    • 입력 2019-01-27 07: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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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 1940년대 조선어 말살정책을 쓰던 일제 강점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경성역에 내린 유정환(윤계상 역)에게 부딪힌 아이가 죄송하다며 말한다. "스미마셍." 정환이 "너는 조선인인데 미안하다고 해야지, 스미마셍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조선말을 모른다며 가버린다. 일본어 상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학교에서도 조선말을 가르치지 못하고, 우리 땅에서 우리 말이 사라져 가던 시기,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이다.

'말모이'는 민족 계몽운동 단체인 광문회에서 주시경과 김두봉 선생이 주도해 만들기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이다. '사전(辭典)'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인데, 1911년 사업을 시작했으나 주시경 사망과 김두봉의 망명으로 중단되었다가, 조선어 사전편찬회와 조선어연구회를 거쳐 조선어학회가 넘겨받았다.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유정환은 조선어학회 대표. 한글도 떼지 못한 까막눈 판수 (유해진 역)가 아들의 월사금을 내기 위해 소매치기에 나섰다가 정환과 엮이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중심에 두고 겨레의 말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이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따라가는데,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인생의 변화를 겪는 것은 역시 판수이다. 평범하기만 한 삶을 살던 판수가 겨레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희생하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익숙한 감동을 준다.

우리가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한글'을 우리말로 쓰며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저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너무나 잊기 쉬운 진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 거의 온전한 자기 말을 지킨 몇 안 되는 나라이다. - 영화 ≪말모이≫ 중

그럼 정말 우리말 큰사전의 원고는 판수가 들고 튄 저 가방 하나에 담겨있었을까?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가 발견된다. 이 상자에 들어있던 것이 바로 조선어사전 원고.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500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이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 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본문 33쪽

영화에서 판수가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그 원고, 사실은 일본 경찰이 압수해서 고등법원에 보내려고 했던 원고지 2만 6천 장 분량의 원고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책으로 진입하는 지점이다.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의 역사 추적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최경봉 교수의 『우리말의 탄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역사를 추적한다.

조선어학회는 1936년 이후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역량을 쏟았으며, 한글 강습운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며 언어 정리 사업을 주도해 나간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조선어사전의 출판을 허가했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몰아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이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것은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정태진이다. '교사 시절 일본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꾸짖는 등 조선 독립을 선동하는 일을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뒤, 고문에 못 이겨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고 허위자백을 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과정에서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인 이윤재도 잃고 만다. 최경봉 교수가 자료 조사를 통해 서술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영화 속에서 조금 다르게 변주된다.

영화 《말모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감옥소 동기’들이 사투리 확인을 돕는다.
영화 ≪말모이≫에서 감동을 주는 포인트 중 하나는 잡초처럼 짓밟히고 뒹굴어도 꿋꿋이 버텨낸 '보통사람들'의 모습이다. "벌써 30년이야! 독립? 독립이 언제 될 거 같아?" 하고 외치는 지식인의 기회주의에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하루살이도 빠듯해 보이지만 '우리말을 지키는 선생님들' 먼저 피신하라며 몸을 던지는 보통사람들, 혹은 무지렁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용기를 냈던 평범한 이들의 모습에 선선히 마음을 내주게 된다.


책은 사전을 만들기 위해 길을 닦은 사람들과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역할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사전 편찬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사투리를 모으기 위해서 어떤 이들이 자원봉사를 했는지, 부족한 인쇄비를 모으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생생하게 서술한다.

또한 1947년 해방 2년 만에 ≪조선말큰사전≫을 출판했지만,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우리말 사전도 갈라진 과정을 따라간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남북 우리말 사전 편찬 사업이 다시 본격화되고 있는 시기여서 더더욱 반가운 책이다.

『우리말의 탄생』지은이 최경봉, 출판사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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