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김, 9년여만에 자유의 몸

입력 2005.10.05 (11:52) 수정 2005.10.0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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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수감됐다 풀려난 뒤 보호관찰을 받아온 로버트 김(64ㆍ한국명 김채곤)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로버트 김은 현지시간으로 어제 미국 버지니아주 동부지방법원이 보호관찰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형 집행이 만료됐습니다.

이에 따라 로버트 김은 2007년까지로 예정됐던 보호관찰을 이 날로 끝내게 돼 1996년 이후 7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포함해 9년8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미 법무부는 로버트 김의 보호관찰 중단에 반대했으나 법원은 로버트 김측의 신청 사유를 인정해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로버트 김 사건 개요

1996년 9월 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국가기밀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FBI(연방수사국)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 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국가의 기밀을 빼돌려 모국에 넘겨줌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 내용이었습니다.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난 로버트 김은 대학을 졸업한 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유학 4년만인 1970년, 31살 때 NASA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NASA에 최정예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시민권이 없는 외국의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4년 후인 1974년에 시민권을 획득하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8년부터 미 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런우드 연방형무소에서 수감 중이던 로버트 김의 옥중 사진.[연합]
로버트 김의 해군 정보국에서의 직명은 컴퓨터 정보분석관으로 미군 정부 컴퓨터 시스템인 JMIE(Joint Maritime Information Element)의 디자인, 개발, 그리고 유지에 대한 기술적인 관리를 맡았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국가 특급 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해군정보국 1200여명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로 그가 근무할 당시 필리핀계 직원이 한명 있었지만, 그는 미국 태생이었습니다. 그는 해군정보국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승진과 수상 경력도 많았으며, 체포 당시에도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로버트 김과 정보를 받은 백동일 대령을 몰래 감청해 로버트 김이 한반도 관련 정보를 전달한 사실을 알아냈고 로버트 김을 국방기밀 누설혐의로 체포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해군 정보국 1200여 명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였던 그는 자신의 모국을 도왔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고 재소자 처지가 된 것입니다. 1997년, 미 법원은 그에게 9년 징역에 3년 보호감찰을 선고했습니다. 1차, 2차 형량 재심 청구 신청도 모두 기각됐습니다.

로버트 김은 지난해 7월 2개월 간의 가택연금을 거쳐 7년6개월만에 석방됐습니다. 버지니아주의 애쉬번 자택에서 2007년까지 보호관찰을 받도록 돼 있었으나 이번 형 집행 만료 결정으로 예정보다 2년 일찍 형을 마치게 됐습니다.

로버트 김은 올해 1월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한국행을 추진한 적이 있지만, 법원의 한국 방문 불허 결정으로 무산된 바 있습니다.

♣ 어떤 정보를 제공했나

미국의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네 나라 외에는 어떤 나라도 미국에 대해 등을 돌리고, 미국의 국익에 맞서거나 혹은 적어도 그럴 소지를 늘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법원의 한국 방문 불허 결정으로 꿈에 그리던 조국 방문이 무산된 로버트 김이 후원회장이었던 이웅진 (주) 선우 대표에게 보낸 편지.[연합]
1996년 동해를 통해 강릉으로 침투한 북한 잠수정이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로버트 김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이었던 백동일 대령의 요청에 따라 한반도 관련 정보를 백 대령에게 건네줬습니다. 로버트 김은 미국과의 중요한 정보공유 체제에서 밀려나있던 한국의 상황을 안타깝게 느끼고 한국 관련 정보를 제공해달라는 백동일 대령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로버트 김이 백동일 대령에게 전달한 정보들은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북한군에 유입되었는지의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북한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기현황, 북한해군의 동향, 북한 주민의 탈북실태 등 우리 군이나 정부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정보를 받은 백동일 대령은 FBI가 도청한 두 사람의 전화통화 내용을 통해 "김 선생님이 보내준 노란 봉투를 편지함에서 꺼내보았을 때 내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료들을 참고하여 보고한 것으로 인해 본부로부터 많은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로버트 김에게는 '정보수집죄'에 '공모죄'가 더해졌습니다.

로버트 김은 정보를 직접 전달받은 백 대령은 물론 한국정부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백동일 대령의 증언에 의하면 고마움의 표시로 몇 차례 식사 초대를 했지만, 그 때마다 선약이 있다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김이 체포되자 당시 한국정부는 "우리와는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 미 사법당국에 넘어간 이상 미국 법 집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방관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결국 로버트 김은 1997년 7월 간첩죄의 일종인 `국방기밀취득음모죄'로 징역 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로버트 김의 담당 검사는 최후 논고를 통해 "로버트 김은 그의 고용주인 해군 정보국은 물론 미 합중국의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타국(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 로버트 김의 끊임없는 도전

지난해 가택 수감 생활 당시 로버트 김과 부인 장명희 씨. 당시 이들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쉬번 자택에서 "한국 국민들께 꼭 감사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말했다.[연합]
로버트 김이 예정보다 빨리 자유의 몸이 된 배경에는 그의 끊임없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군사 정보를 제공 혐의로 FBI에 체포돼 간첩죄로 미 법원에서 9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한국 정부는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으로서 실정법을 어겼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개입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수방관'에 가까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로버트 김은 지난해 7월 출간한 자서전 '집으로 돌아오다'에서 "미온적이었던 한국 정부의 태도는 나를 우울하게 했다.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나는 공모자 없는 공모죄로 외롭게 싸워야 했다"고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그는 이국땅인 미국에서 현지 검찰과 법원의 편파적인 판결에 본인은 물론 동생 집까지 팔아가며 변호사를 선임해 꾸준히 대응해 나갔습니다.

변호사 선임 이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로버트 김은 본인이 직접 법전을 뒤져가며 재판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고 혼자 이감신청 뿐 아니라 감형신청과 형량 재심청구 등도 해나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두 차례 기각되기는 했지만 지난해 초 8년 간 수감생활을 해온 펜실베이니아주 앨런우드 교도소에서 집 근처인 버지니아주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되는 성과도 거두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김이 자유의 몸이 된 데는 로버트 김 본인의 노력 뿐 아니라 항상 곁에 함께 하면서 큰 힘이 돼준 가족과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국내 로버트 김 후원자들은 로버트 김 가석방을 1년 앞둔 2003년 7월 '로버트 김 후원회'를 발족했고 오랜 법정 투쟁과 수감 생활로 파산 상태에까지 이르러 생계조차 위협받는 로버트 김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 로버트김 사건 일지
1994.10.01 백동일 대령 미국 도착
1995.11.29 한미정보장교회의에서 한국장교 및 백대령과 로버트 김 최초 만남(FBI 12월부터 FBI에서 백대령, 로버트 김 감시 추정)
1996.03.20 한국장교들 쉐라톤 호텔에서 만남, FBI 감청
1996.05.01 FBI 로버트 김 사무실 감시, 감청 시작
1996.09.18 강릉침투 잠수함 사건
1996.09.21 백대령, 로버트 김에게 잠수함 사건에 대해서 정보를 부탁. 로버트 김 백동일 대령과 최후 대화 (강릉잠수함건에 대해)
1996.09.24 워싱턴 한국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FBI에서 로버트 김 체포,
미 검찰, 로버트 김 기밀누설죄로 기소
1996.10. 피터 긴스버스 변호사 선임
1996.12. 여야 국회의원 100명, 미검찰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에 서명
1997.01.03~10 김성곤, 조순승의원 미 국무성방문
1997.02. 변호사가 변론서를 검찰에 제출했으나, 플리바게닝 협상난항
1997.04.01 조선호텔에서 로버트김 사건 담당변호사 (제임스고어, 마크 샌드그라운드)
와 구명위원간 조찬대담
1997.05.07 미 검찰과 변호인, 로버트 김 플리바게닝
1997.07.11 로버트 김 재판(9년형 언도)
1998.06.29 로버트 김 형량재심청구 (Patrick Kim변호사)
1999.02. 1차 형량 재심 청구 기각
1999.10. 2차 형량재심청구 신청, 기각
2002.02. 부시 미 대통령 한국 방문시, 외교통일부에서 로버트 김 문제 정식 거론
2003.01. 로버트 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제출
2003.05. 노무현 대통령 방미 중 로버트 김 사면 건의
2003.08.18 로버트 김 후원회, 주미 대사관 및 외교통상부에 일시석방 호소문 전달
2004.01.30 앨런우드에서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
2004.03.03 후원회장 미 로저아담스 사면담당관 및 한승주 주미대사 면담
2004.05. 모범수로 형량이 감면된 그에게 출감을 앞두고 두 달 동안 '가택수감'
2004.07. 가석방. 보호관찰 시작.
2005.10. 보호감찰 형집행 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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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버트 김, 9년여만에 자유의 몸
    • 입력 2005-10-05 11:52:00
    • 수정2005-10-05 11:54:00
    i-리포트
미국에서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수감됐다 풀려난 뒤 보호관찰을 받아온 로버트 김(64ㆍ한국명 김채곤)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로버트 김은 현지시간으로 어제 미국 버지니아주 동부지방법원이 보호관찰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형 집행이 만료됐습니다. 이에 따라 로버트 김은 2007년까지로 예정됐던 보호관찰을 이 날로 끝내게 돼 1996년 이후 7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포함해 9년8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미 법무부는 로버트 김의 보호관찰 중단에 반대했으나 법원은 로버트 김측의 신청 사유를 인정해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로버트 김 사건 개요 1996년 9월 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국가기밀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FBI(연방수사국)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 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국가의 기밀을 빼돌려 모국에 넘겨줌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 내용이었습니다.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난 로버트 김은 대학을 졸업한 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유학 4년만인 1970년, 31살 때 NASA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NASA에 최정예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시민권이 없는 외국의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4년 후인 1974년에 시민권을 획득하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8년부터 미 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런우드 연방형무소에서 수감 중이던 로버트 김의 옥중 사진.[연합]
로버트 김의 해군 정보국에서의 직명은 컴퓨터 정보분석관으로 미군 정부 컴퓨터 시스템인 JMIE(Joint Maritime Information Element)의 디자인, 개발, 그리고 유지에 대한 기술적인 관리를 맡았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국가 특급 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해군정보국 1200여명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로 그가 근무할 당시 필리핀계 직원이 한명 있었지만, 그는 미국 태생이었습니다. 그는 해군정보국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승진과 수상 경력도 많았으며, 체포 당시에도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로버트 김과 정보를 받은 백동일 대령을 몰래 감청해 로버트 김이 한반도 관련 정보를 전달한 사실을 알아냈고 로버트 김을 국방기밀 누설혐의로 체포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해군 정보국 1200여 명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였던 그는 자신의 모국을 도왔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고 재소자 처지가 된 것입니다. 1997년, 미 법원은 그에게 9년 징역에 3년 보호감찰을 선고했습니다. 1차, 2차 형량 재심 청구 신청도 모두 기각됐습니다. 로버트 김은 지난해 7월 2개월 간의 가택연금을 거쳐 7년6개월만에 석방됐습니다. 버지니아주의 애쉬번 자택에서 2007년까지 보호관찰을 받도록 돼 있었으나 이번 형 집행 만료 결정으로 예정보다 2년 일찍 형을 마치게 됐습니다. 로버트 김은 올해 1월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한국행을 추진한 적이 있지만, 법원의 한국 방문 불허 결정으로 무산된 바 있습니다. ♣ 어떤 정보를 제공했나 미국의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네 나라 외에는 어떤 나라도 미국에 대해 등을 돌리고, 미국의 국익에 맞서거나 혹은 적어도 그럴 소지를 늘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법원의 한국 방문 불허 결정으로 꿈에 그리던 조국 방문이 무산된 로버트 김이 후원회장이었던 이웅진 (주) 선우 대표에게 보낸 편지.[연합]
1996년 동해를 통해 강릉으로 침투한 북한 잠수정이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로버트 김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이었던 백동일 대령의 요청에 따라 한반도 관련 정보를 백 대령에게 건네줬습니다. 로버트 김은 미국과의 중요한 정보공유 체제에서 밀려나있던 한국의 상황을 안타깝게 느끼고 한국 관련 정보를 제공해달라는 백동일 대령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로버트 김이 백동일 대령에게 전달한 정보들은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북한군에 유입되었는지의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북한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기현황, 북한해군의 동향, 북한 주민의 탈북실태 등 우리 군이나 정부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정보를 받은 백동일 대령은 FBI가 도청한 두 사람의 전화통화 내용을 통해 "김 선생님이 보내준 노란 봉투를 편지함에서 꺼내보았을 때 내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료들을 참고하여 보고한 것으로 인해 본부로부터 많은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로버트 김에게는 '정보수집죄'에 '공모죄'가 더해졌습니다. 로버트 김은 정보를 직접 전달받은 백 대령은 물론 한국정부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백동일 대령의 증언에 의하면 고마움의 표시로 몇 차례 식사 초대를 했지만, 그 때마다 선약이 있다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김이 체포되자 당시 한국정부는 "우리와는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 미 사법당국에 넘어간 이상 미국 법 집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방관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결국 로버트 김은 1997년 7월 간첩죄의 일종인 `국방기밀취득음모죄'로 징역 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로버트 김의 담당 검사는 최후 논고를 통해 "로버트 김은 그의 고용주인 해군 정보국은 물론 미 합중국의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타국(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 로버트 김의 끊임없는 도전
지난해 가택 수감 생활 당시 로버트 김과 부인 장명희 씨. 당시 이들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쉬번 자택에서 "한국 국민들께 꼭 감사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말했다.[연합]
로버트 김이 예정보다 빨리 자유의 몸이 된 배경에는 그의 끊임없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군사 정보를 제공 혐의로 FBI에 체포돼 간첩죄로 미 법원에서 9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한국 정부는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으로서 실정법을 어겼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개입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수방관'에 가까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로버트 김은 지난해 7월 출간한 자서전 '집으로 돌아오다'에서 "미온적이었던 한국 정부의 태도는 나를 우울하게 했다.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나는 공모자 없는 공모죄로 외롭게 싸워야 했다"고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그는 이국땅인 미국에서 현지 검찰과 법원의 편파적인 판결에 본인은 물론 동생 집까지 팔아가며 변호사를 선임해 꾸준히 대응해 나갔습니다. 변호사 선임 이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로버트 김은 본인이 직접 법전을 뒤져가며 재판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고 혼자 이감신청 뿐 아니라 감형신청과 형량 재심청구 등도 해나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두 차례 기각되기는 했지만 지난해 초 8년 간 수감생활을 해온 펜실베이니아주 앨런우드 교도소에서 집 근처인 버지니아주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되는 성과도 거두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김이 자유의 몸이 된 데는 로버트 김 본인의 노력 뿐 아니라 항상 곁에 함께 하면서 큰 힘이 돼준 가족과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국내 로버트 김 후원자들은 로버트 김 가석방을 1년 앞둔 2003년 7월 '로버트 김 후원회'를 발족했고 오랜 법정 투쟁과 수감 생활로 파산 상태에까지 이르러 생계조차 위협받는 로버트 김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 로버트김 사건 일지 1994.10.01 백동일 대령 미국 도착 1995.11.29 한미정보장교회의에서 한국장교 및 백대령과 로버트 김 최초 만남(FBI 12월부터 FBI에서 백대령, 로버트 김 감시 추정) 1996.03.20 한국장교들 쉐라톤 호텔에서 만남, FBI 감청 1996.05.01 FBI 로버트 김 사무실 감시, 감청 시작 1996.09.18 강릉침투 잠수함 사건 1996.09.21 백대령, 로버트 김에게 잠수함 사건에 대해서 정보를 부탁. 로버트 김 백동일 대령과 최후 대화 (강릉잠수함건에 대해) 1996.09.24 워싱턴 한국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FBI에서 로버트 김 체포, 미 검찰, 로버트 김 기밀누설죄로 기소 1996.10. 피터 긴스버스 변호사 선임 1996.12. 여야 국회의원 100명, 미검찰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에 서명 1997.01.03~10 김성곤, 조순승의원 미 국무성방문 1997.02. 변호사가 변론서를 검찰에 제출했으나, 플리바게닝 협상난항 1997.04.01 조선호텔에서 로버트김 사건 담당변호사 (제임스고어, 마크 샌드그라운드) 와 구명위원간 조찬대담 1997.05.07 미 검찰과 변호인, 로버트 김 플리바게닝 1997.07.11 로버트 김 재판(9년형 언도) 1998.06.29 로버트 김 형량재심청구 (Patrick Kim변호사) 1999.02. 1차 형량 재심 청구 기각 1999.10. 2차 형량재심청구 신청, 기각 2002.02. 부시 미 대통령 한국 방문시, 외교통일부에서 로버트 김 문제 정식 거론 2003.01. 로버트 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제출 2003.05. 노무현 대통령 방미 중 로버트 김 사면 건의 2003.08.18 로버트 김 후원회, 주미 대사관 및 외교통상부에 일시석방 호소문 전달 2004.01.30 앨런우드에서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 2004.03.03 후원회장 미 로저아담스 사면담당관 및 한승주 주미대사 면담 2004.05. 모범수로 형량이 감면된 그에게 출감을 앞두고 두 달 동안 '가택수감' 2004.07. 가석방. 보호관찰 시작. 2005.10. 보호감찰 형집행 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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