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백제 고분군’ 발견...한.일 고대사 다시 쓰나?

입력 2005.11.01 (13:00) 수정 2005.11.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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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고대사 규명에 중요한 열쇠가 될 한성백제 시대 초대형 고분이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서울강동문화원이 백제문화연구회에 의뢰한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전체 길이가 100~500 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 10여 개가 발견됐습니다.

또 지중 레이더, 자기장 탐사를 이용한 지하탐사 결과, 10여 개 고분 가운데 7개 고분에서 석실이 확인된 것은 물론, 금과 구리, 옥, 철 등의 매장물이 묻혀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내용은 택지개발을 앞둔 강일동 일대에서 지난 한 달간 문화재 지표조사를 위해 지하 매장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고, KBS 단독보도를 통해 처음 공개됐습니다.

- [문화] 초대형 백제고분군 발견

- [문화] 日 천황릉 시원?

- [문화] 韓.日 고대사 다시 쓰나?

- [문화] 8각 금성분이 백제고분 발견 단서

- [문화] 문화재청, 오늘 한성백제 고분 현장 조사


서울 강일동에서 발견된 길이 500여 미터 초대형 고분

■ 日 왕릉 양식 ‘전방후원분’ 10여 기 발견

이번에 발견된 초대형 고분은 엄청난 규모도 놀랍지만, 그 모양이 고대 일본의 왕릉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백제문화연구회는 이번에 발견된 고분이 네모난 제단과 원통형 봉토분이 뚜렷이 식별된다면서, 그 형태가 일본의 왕릉인 이른바 ‘장고형 고분’(일본측 명칭 ‘전방후원분’)으로 거의 확실시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방후원분 =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위쪽에 둥근 봉분과 남쪽의 사각형이 붙어 있는 형상으로 앞은 사각형, 뒤는 둥근 원처럼 생긴 고분의 형태입니다.

[뉴스키워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전방후원분이라는 명칭은 에도시대(1603∼1867) 중기 일본의 국학자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사각형 분구(方丘)가 앞에, 원형 분구(圓丘)가 뒤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 이래 편의상 직각형 분구를 전방부, 뒤의 분구를 후원부로 부르고 있습니다.

매장방식은 순수토장(土葬)과 점토곽(粘土槨), 구덩식돌방[竪穴式石室], 목관직장(木棺直葬) 등을 이용하고 덧널을 두기도 했습니다.

분구 주위에 도랑이나 연못을 파 주호(周濠, 또는 周土屋·周湟)를 만들거나 후원부의 외측에 고리 모양 깐돌시설을 둔 것도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이같은 ‘장고형 고분’이 일본에 2천 5백기나 되고, 크기가 수 백 미터에 이르는 고분이 많아 일본 야마토 정권이 강성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고형 고분’이 1980년대 초부터 고성과 나주지역에서 발견됐지만 규모나 연대가 모두 일본보다 늦어, 일본 학계에선 ‘이 고분 양식이 일본에서 전래됐고, 고대 일본이 한반도 일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일본 오사카 사카이(堺) 지역에 자리한 ‘인덕천황릉’. 앞쪽 네모 부분의 길이가 300미터,
뒤쪽 원 부분의 직경은 245미터에 이르는 거대 고분으로 일본이 내세우는 ‘임나일본부’
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 베일 벗는 한성백제...韓.日 고대사 다시 쓰나?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일본 고대사는 백제와 연관이 깊어서 무령왕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뒤에 백제에 와서 왕이 됐습니다.

특히 유물의 경우는 일본과 백제가 같은 것이 많아 우리 학계에서는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의 지배층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정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의 양식. 지금까지 전남지방에서 10여 기의 ‘전방후원분’ 양식의 무덤이 발굴됐지만, 시기적으로 모두 일본보다 후대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4~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이들 거대 왕릉이 고대 일본의 막강한 힘을 증명하는 것이며,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국 남부지역까지 진출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한성백제

삼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경, 한강 하류에서 건국돼, 서기 660년 사비도성(泗비都城)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충청도·전라도 지역과 강원도·경상도 일원을 678년간 지배했던 왕국입니다.

백제는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해옵니다.

이중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온조(溫祚) 중심의 설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이복형 유리(瑠璃)가 나타나 태자(太子)로 책봉되자 남하해 각기 나라를 세웁니다.

이중 온조는 처음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십제(十濟)를 세웠고, 그 뒤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인천 주안)에 정착했던 비류와 합류해 나라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칩니다.

한강변 송파 지역은 678년 백제 역사 중 최초 493년을 이어온 도읍지인데요, 온조왕이 처음 한강 하류에 나라를 세운 B.C 18년에서 문주왕 원년(A.D 475년) 도읍지를 웅진(지금의 공주)로 옮기기까지 493년간을 이른바 ‘한성백제시대’라고 부릅니다.

한성백제 시대의 도성 문제는 백제사 중에서도 특히 관심이 집중된 주제입니다.

학계의 시각은 크게 양분돼,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주목하는 견해와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었는데요, 주로 송파구 일대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송파구에는 현재 한강변의 풍납토성과 여기에서 700미터 정도 떨어진 몽촌토성 등 2개의 토성이 남아 있는데요, 몽촌토성의 경우 1980년대 수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하남위례성의 유적지라는 평가를 받았고, 풍납토성 역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의 도성이었음이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입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한성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이후 성왕 16년인 538년 다시 수도를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겼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거대 고분군이 학술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것도 이들 고분이 위치상으로 볼때 한성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추가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들 고분이 한성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야마토 정권이 백제에서 건너간 이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져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뿌리부터 흔들 수도 있을 전망입니다.

나아가 초기 백제가 일본 뿐 아니라 중국 요서와 진평까지 점령했다는 ‘대륙백제설’까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한성백제는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경기도 하남시 일대였다고 추정될 뿐, 그간 변변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아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현장을 답사한 서울대 임효재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강동구 고분은 앞 부분이 넓적하고 뒷 부분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주위에는 환후를 파고 있어서 일본에서 발견되는 장고형 고분과 똑같은 형태”라면서 “이번에 고분이 발견됨으로써 그 기원 문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재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문화재청은 KBS 보도가 나간 직후인 어젯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긴급 회의를 열어 오늘 오후 한성 백제 고분군 지역에 연구관과 발굴 실무팀 등 3명을 보내 현장 기초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문화재청은 이와 관련해 올 3월말부터 풍납토성 10개년 종합학술발굴조사에 본격 착수한 만큼 이와 연계해 조사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칼럼] 이동식 기자 - "대백제가 부활하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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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형 ‘백제 고분군’ 발견...한.일 고대사 다시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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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05-11-01 10: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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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고대사 규명에 중요한 열쇠가 될 한성백제 시대 초대형 고분이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서울강동문화원이 백제문화연구회에 의뢰한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전체 길이가 100~500 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 10여 개가 발견됐습니다. 또 지중 레이더, 자기장 탐사를 이용한 지하탐사 결과, 10여 개 고분 가운데 7개 고분에서 석실이 확인된 것은 물론, 금과 구리, 옥, 철 등의 매장물이 묻혀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내용은 택지개발을 앞둔 강일동 일대에서 지난 한 달간 문화재 지표조사를 위해 지하 매장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고, KBS 단독보도를 통해 처음 공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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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일동에서 발견된 길이 500여 미터 초대형 고분
■ 日 왕릉 양식 ‘전방후원분’ 10여 기 발견 이번에 발견된 초대형 고분은 엄청난 규모도 놀랍지만, 그 모양이 고대 일본의 왕릉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백제문화연구회는 이번에 발견된 고분이 네모난 제단과 원통형 봉토분이 뚜렷이 식별된다면서, 그 형태가 일본의 왕릉인 이른바 ‘장고형 고분’(일본측 명칭 ‘전방후원분’)으로 거의 확실시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방후원분 =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위쪽에 둥근 봉분과 남쪽의 사각형이 붙어 있는 형상으로 앞은 사각형, 뒤는 둥근 원처럼 생긴 고분의 형태입니다.
[뉴스키워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전방후원분이라는 명칭은 에도시대(1603∼1867) 중기 일본의 국학자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사각형 분구(方丘)가 앞에, 원형 분구(圓丘)가 뒤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 이래 편의상 직각형 분구를 전방부, 뒤의 분구를 후원부로 부르고 있습니다. 매장방식은 순수토장(土葬)과 점토곽(粘土槨), 구덩식돌방[竪穴式石室], 목관직장(木棺直葬) 등을 이용하고 덧널을 두기도 했습니다. 분구 주위에 도랑이나 연못을 파 주호(周濠, 또는 周土屋·周湟)를 만들거나 후원부의 외측에 고리 모양 깐돌시설을 둔 것도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이같은 ‘장고형 고분’이 일본에 2천 5백기나 되고, 크기가 수 백 미터에 이르는 고분이 많아 일본 야마토 정권이 강성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고형 고분’이 1980년대 초부터 고성과 나주지역에서 발견됐지만 규모나 연대가 모두 일본보다 늦어, 일본 학계에선 ‘이 고분 양식이 일본에서 전래됐고, 고대 일본이 한반도 일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일본 오사카 사카이(堺) 지역에 자리한 ‘인덕천황릉’. 앞쪽 네모 부분의 길이가 300미터,
뒤쪽 원 부분의 직경은 245미터에 이르는 거대 고분으로 일본이 내세우는 ‘임나일본부’
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 베일 벗는 한성백제...韓.日 고대사 다시 쓰나?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일본 고대사는 백제와 연관이 깊어서 무령왕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뒤에 백제에 와서 왕이 됐습니다. 특히 유물의 경우는 일본과 백제가 같은 것이 많아 우리 학계에서는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의 지배층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정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의 양식. 지금까지 전남지방에서 10여 기의 ‘전방후원분’ 양식의 무덤이 발굴됐지만, 시기적으로 모두 일본보다 후대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4~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이들 거대 왕릉이 고대 일본의 막강한 힘을 증명하는 것이며,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국 남부지역까지 진출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한성백제 삼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경, 한강 하류에서 건국돼, 서기 660년 사비도성(泗비都城)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충청도·전라도 지역과 강원도·경상도 일원을 678년간 지배했던 왕국입니다. 백제는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해옵니다. 이중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온조(溫祚) 중심의 설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이복형 유리(瑠璃)가 나타나 태자(太子)로 책봉되자 남하해 각기 나라를 세웁니다. 이중 온조는 처음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십제(十濟)를 세웠고, 그 뒤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인천 주안)에 정착했던 비류와 합류해 나라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칩니다. 한강변 송파 지역은 678년 백제 역사 중 최초 493년을 이어온 도읍지인데요, 온조왕이 처음 한강 하류에 나라를 세운 B.C 18년에서 문주왕 원년(A.D 475년) 도읍지를 웅진(지금의 공주)로 옮기기까지 493년간을 이른바 ‘한성백제시대’라고 부릅니다. 한성백제 시대의 도성 문제는 백제사 중에서도 특히 관심이 집중된 주제입니다. 학계의 시각은 크게 양분돼,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주목하는 견해와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었는데요, 주로 송파구 일대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송파구에는 현재 한강변의 풍납토성과 여기에서 700미터 정도 떨어진 몽촌토성 등 2개의 토성이 남아 있는데요, 몽촌토성의 경우 1980년대 수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하남위례성의 유적지라는 평가를 받았고, 풍납토성 역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의 도성이었음이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입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한성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이후 성왕 16년인 538년 다시 수도를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겼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거대 고분군이 학술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것도 이들 고분이 위치상으로 볼때 한성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추가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들 고분이 한성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야마토 정권이 백제에서 건너간 이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져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뿌리부터 흔들 수도 있을 전망입니다. 나아가 초기 백제가 일본 뿐 아니라 중국 요서와 진평까지 점령했다는 ‘대륙백제설’까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한성백제는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경기도 하남시 일대였다고 추정될 뿐, 그간 변변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아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현장을 답사한 서울대 임효재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강동구 고분은 앞 부분이 넓적하고 뒷 부분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주위에는 환후를 파고 있어서 일본에서 발견되는 장고형 고분과 똑같은 형태”라면서 “이번에 고분이 발견됨으로써 그 기원 문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재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문화재청은 KBS 보도가 나간 직후인 어젯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긴급 회의를 열어 오늘 오후 한성 백제 고분군 지역에 연구관과 발굴 실무팀 등 3명을 보내 현장 기초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문화재청은 이와 관련해 올 3월말부터 풍납토성 10개년 종합학술발굴조사에 본격 착수한 만큼 이와 연계해 조사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칼럼] 이동식 기자 - "대백제가 부활하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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