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국무용학원장 메리 조 프레실리

입력 2006.03.06 (00:00) 수정 2006.03.0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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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주도 호놀룰루의 사우스킹 스트리트 1502번지에는 '할라 배 함 한국무용학원(Halla Pai Huhm Korean Dance Studio)'이라는 조그만 무용교습소가 있다. 악기와 무대의상을 보관하는 작은 방과 화장실 등을 제외하면 실제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은 아무리 보아도 일곱 평이 채 안된다.

게다가 낮은 천장이 답답하다. 도약과 회전이 많고 동작이 큰 서양춤이라면 도저히 교습소로 사용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이곳의 주인은 오하이오 출신 메리 조 프레실리(Mary Jo Freshley) 할머니이다. 1934년생이니 일흔이 넘었는데, 첫 눈에도 정직하고 깐깐한 원칙주의자이며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일 거라는 확신이 간다.

그의 정성스런 가르침에 따라 제자들은 북춤 장구춤 부채춤 승무 살풀이 산조춤 등 한국춤 레퍼토리를 배운다. 수강생은 아무래도 한국이민의 후손이 많지만 다른 아시아계나 미국인도 적지 않다. 현재 수강생 수는 대략 50명. 한국문화를 알고 싶어서, 어릴 적 배우다 만 무용을 다시 하고 싶어서, 단순한 취미나 건강 등 동기가 다양하다. 그중에는 소수이지만 프로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춤 잇는 하와이 한국무용학원장 메리 조 프레실리
미국 하와이 주도 호놀룰루에서 '할라 배 함 한국무용학원(Halla Pai Huhm Korean Dance Studio)'을 운영하며 북춤 장구춤 살풀이등 한국춤을 가르치고 있는 미국오하이오 출신 메리 조 프레실리 할머니가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연합]

◇배구자와 배한라

처음 이 교습소를 세운 이는 할라 함이다. 할라 함은 누구인가. 2003년 미국 산타바바라에서 10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 배구자(裵龜子)의 친동생(일설에는 사촌이라고 한다)이자, 그 역시 불세출의 무용가로서 미국 땅에 한국춤을 심고 가꾸는 데 일생을 바친 배한라(裵漢拏.1922-94)이다.

하와이 이민 출신인 남편이 함(咸. John Huhm)씨였기에 미국식 이름이 '할라 배 함'이 됐다. 교습소 벽에는 그의 1980년대 사진과 배구자의 1930년대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럼 배구자는 누구인가. 조선반도의 운명이 초라한 등불처럼 꺼져가던 구한말, 궁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한국판 마타하리' 요화(妖花) 배정자(裵貞子.1870-1951)의 조카딸이다. 일각에서는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서 나온 딸이라고도 한다(이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배구자-배한라 관계도 여전히 불분명하다). 원로 무용평론가 조동화의 말로는 본디 이름이 구이(龜伊)였는데 후일 일본식으로 '자(子)'로 고쳤다고 한다.

무용학계에는 그가 창작한 신무용 '아리랑'(1928년)을 한국 근대무용의 효시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춤동작에 일본적 요소들이 들어갔다는 지적도 있다.

배구자는 후배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엄청난 관심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무용가로서 비중도 대단하지만, 1935년 평양 갑부인 남편 홍순언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인 동양극장을 세운 사실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터이다.

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정확히 밝힌 바가 없어 주변과 무용계를 안타깝게 만들었으며, 결국 눈을 감는 순간까지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일절 함구한 채로 세상을 하직했다. 홍순언과는 일찍 사별했고, 후일 일본계 미군 출신인 야마모토라는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배구자는 스스로 일본 왕자와 조선 공주 사이에서 나온 딸이다, 명성황후의 손녀이다, 일본에서 공주 교육을 받았다는 등 확인하기 어려운 주장을 종종 하기도 했다. 어쨌든 2001년 호놀룰루를 방문, 할라 함 무용학원을 찾았을 당시 보여준 춤동작이나 일상적 걸음걸이 등은 매우 일본적이었다는 것이 프레실리 원장과 그 제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프레실리 원장의 말. "배구자 선생님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으나 내 스승의 스승이시니까 해마다 성탄절 카드도 보내고 하와이에서 있었던 공연 비디오도 보내드렸지만 답장은 없으셨어요. 그러다 선생님의 100세 생신 때 산타바바라에 가서 축하연에 참석하고 축하공연도 해드렸는데, 그때 말씀하시데요. 매년 카드는 잘 받아보았노라고. 저를 제자로 인정해서 배씨 성을 내려주시기도 했어요."

◇배한라와 프레실리


▲ 한국춤을 가르치고 있는 메리 조 프레실리 할머니. 뒤의 그림은 스승 배한라씨의 공연모습이다. [연합]
배한라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배구자에게서 춤을 배웠다. 커서는 그곳 짓센여자대학에 진학해 가정관리학을 전공했다. 춤만이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났다.

결혼을 한 뒤에는 남편의 터전인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국무용의 보급과 전파에 헌신했다. 1950년 하와이 YWCA에서 처음 한국춤을 소개한 이래 길거리든 공원이든 가리지 않고 한국춤을 추었다. 장구가 없어 커피 깡통에 천을 씌워 대용(代用)하는 열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하와이대학에서 한국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만큼 자리를 잡아갔다.

1952년엔 처음으로 정식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남편과는 곧 이혼을 했고 아이도 없었기에 더더욱 춤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배한라는 원래가 정열가였다.

1962년 5월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대작곡가 앨런 호바네스(Alan Hovhaness)의 작곡과 대본으로 '윈드 드럼 모음곡(Wind Drum Suite)'이라는 무용극을 발표했다. 언젠가 배한라의 춤을 보고 그 매력에 빠져버린 호바네스가 안무를 의뢰했던 것. 호놀룰루 마미야 극장에서 초연 당시 현장연주의 지휘까지 작곡자가 직접 맡았다. 호바네스같은 대가와 공동작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실은 오하이오주립 볼링그린대학에서 체육과 무용을 공부하고 호놀룰루 카메하메하 고교에 교사로 부임하기 위해 건너온 메리 조 프레실리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도 바로 그 공연이었다.

"백색 의상을 입고 추는 독무였는데 한국춤과 서양춤이 혼재하는 작품이었어요. 무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아득한 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하와이대학에서 한국춤을 두루 익혀 배한라의 수제자가 됐고 1974년엔 조교가 됐다. 프레실리 원장은 춤도 잘 추지만 장구솜씨도 일품이다. 장구채 잡는 품이 웬만한 한국무용 전공자보다 나아 보였다.

◇하와이에 뿌리내린 한국춤

배한라는 자신의 춤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무용가들을 초청해 한국무용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김천흥이 1963년 호놀룰루에서 궁중무용 공연을 갖는 등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주 찾아왔고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에 자료도 많이 기증했다. 딸(김정원)도 이곳에서 한국춤을 가르쳤다.

또 박수(남자무당) 이지산은 1976년부터 간헐적으로 이곳을 방문, 3-4개월씩 머물면서 굿과 농악 공연 뿐 아니라, 무속 관련 각종 소품과 그림, 의식절차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배한라는 이를 바탕으로 1980년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한ㆍ영문 저서를 동시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 동포들도 이를 통해 처음으로 굿을 구경한 경우가 많았고, 이곳 인류학자나 민속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배한라는 배구자의 춤바탕에 서양무용 스타일을 가미한 무용극 형식의 작품을 즐겨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춤의 뿌리를 중시해 김천흥, 이지산 외에도 한국 근대무용의 확립자로 평가받는 한성준과 불교예술의 제1인자 고 박송암 스님 등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할라 함 무용교습소는 예전엔 옷 수선가게와 공간을 나눠쓰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10여년 전부터 지금의 위치로 옮겨 좀 나아진 게 이 정도라고 했다. 스승이 타계한 1994년 이 학원을 비영리재단으로 만들어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재정난이지만 한국인이 아니다보니 한인사회와 의사소통 문제나 사고방식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종종 있다. 나이도 들고 힘에 부쳐서 한때는 춤솜씨 좋고 성격도 활발한 한 한국인 제자에게 운영을 맡겼지만 이 여성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다시 그가 이끌고 있다.

프레실리 원장이 돈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하자 제자 윤태희(1972년 이민) 씨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한 달 수강료 수입이 2천 달러 내외인 걸로 압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좁아서 동시에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도 없어요. 거기서 집세 1천500달러 제하고, 수시로 의상과 악기 등을 새로 구입하거나 수선하고 나면 늘 적잡니다."

독신이어서 특별히 드는 돈이 없고 퇴직교사 연금을 받는 덕분에 그나마 유지한다고 했다. 스승이 남겨준 유품과 5천여점의 사진 등 각종 자료를 하와이대 주디 반자일 교수 등의 노력으로 이 대학 한국학센터 '배한라 댄스 컬렉션'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각종 상장과 감사패 등이 다닥다닥 벽에 붙어 있지만 한국정부의 표창이나 훈장 은 보이지 않는다. 교민사회의 각종 행사에 단골로 불려가 춤과 음악을 선사하고 있건만 무대의상의 세탁과 손질 등 온갖 잡일은 아직도 이 칠십노인의 몫이다.

제자들은 "공연이 있을 때면 의상과 악기 옮기는 일도 선생님 몫이고, 비가 오면 새는 물을 받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도 선생님의 일"이라며 안타까워하지만 확실한 후계자도 없는 현재로서는 별다른 방안이 없는 실정이다.

벽 한켠, 1996년 4월 하와이대학에서 열린 공연이 끝난 뒤 서울에서 온 한 방문객이 써놓고 갔다는 액자 속 글귀가 그나마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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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와이 한국무용학원장 메리 조 프레실리
    • 입력 2006-03-06 00:00:00
    • 수정2006-03-06 13:20:29
    사회
하와이 주도 호놀룰루의 사우스킹 스트리트 1502번지에는 '할라 배 함 한국무용학원(Halla Pai Huhm Korean Dance Studio)'이라는 조그만 무용교습소가 있다. 악기와 무대의상을 보관하는 작은 방과 화장실 등을 제외하면 실제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은 아무리 보아도 일곱 평이 채 안된다. 게다가 낮은 천장이 답답하다. 도약과 회전이 많고 동작이 큰 서양춤이라면 도저히 교습소로 사용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이곳의 주인은 오하이오 출신 메리 조 프레실리(Mary Jo Freshley) 할머니이다. 1934년생이니 일흔이 넘었는데, 첫 눈에도 정직하고 깐깐한 원칙주의자이며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일 거라는 확신이 간다. 그의 정성스런 가르침에 따라 제자들은 북춤 장구춤 부채춤 승무 살풀이 산조춤 등 한국춤 레퍼토리를 배운다. 수강생은 아무래도 한국이민의 후손이 많지만 다른 아시아계나 미국인도 적지 않다. 현재 수강생 수는 대략 50명. 한국문화를 알고 싶어서, 어릴 적 배우다 만 무용을 다시 하고 싶어서, 단순한 취미나 건강 등 동기가 다양하다. 그중에는 소수이지만 프로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춤 잇는 하와이 한국무용학원장 메리 조 프레실리
미국 하와이 주도 호놀룰루에서 '할라 배 함 한국무용학원(Halla Pai Huhm Korean Dance Studio)'을 운영하며 북춤 장구춤 살풀이등 한국춤을 가르치고 있는 미국오하이오 출신 메리 조 프레실리 할머니가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연합]
◇배구자와 배한라 처음 이 교습소를 세운 이는 할라 함이다. 할라 함은 누구인가. 2003년 미국 산타바바라에서 10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 배구자(裵龜子)의 친동생(일설에는 사촌이라고 한다)이자, 그 역시 불세출의 무용가로서 미국 땅에 한국춤을 심고 가꾸는 데 일생을 바친 배한라(裵漢拏.1922-94)이다. 하와이 이민 출신인 남편이 함(咸. John Huhm)씨였기에 미국식 이름이 '할라 배 함'이 됐다. 교습소 벽에는 그의 1980년대 사진과 배구자의 1930년대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럼 배구자는 누구인가. 조선반도의 운명이 초라한 등불처럼 꺼져가던 구한말, 궁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한국판 마타하리' 요화(妖花) 배정자(裵貞子.1870-1951)의 조카딸이다. 일각에서는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서 나온 딸이라고도 한다(이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배구자-배한라 관계도 여전히 불분명하다). 원로 무용평론가 조동화의 말로는 본디 이름이 구이(龜伊)였는데 후일 일본식으로 '자(子)'로 고쳤다고 한다. 무용학계에는 그가 창작한 신무용 '아리랑'(1928년)을 한국 근대무용의 효시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춤동작에 일본적 요소들이 들어갔다는 지적도 있다. 배구자는 후배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엄청난 관심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무용가로서 비중도 대단하지만, 1935년 평양 갑부인 남편 홍순언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인 동양극장을 세운 사실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터이다. 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정확히 밝힌 바가 없어 주변과 무용계를 안타깝게 만들었으며, 결국 눈을 감는 순간까지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일절 함구한 채로 세상을 하직했다. 홍순언과는 일찍 사별했고, 후일 일본계 미군 출신인 야마모토라는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배구자는 스스로 일본 왕자와 조선 공주 사이에서 나온 딸이다, 명성황후의 손녀이다, 일본에서 공주 교육을 받았다는 등 확인하기 어려운 주장을 종종 하기도 했다. 어쨌든 2001년 호놀룰루를 방문, 할라 함 무용학원을 찾았을 당시 보여준 춤동작이나 일상적 걸음걸이 등은 매우 일본적이었다는 것이 프레실리 원장과 그 제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프레실리 원장의 말. "배구자 선생님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으나 내 스승의 스승이시니까 해마다 성탄절 카드도 보내고 하와이에서 있었던 공연 비디오도 보내드렸지만 답장은 없으셨어요. 그러다 선생님의 100세 생신 때 산타바바라에 가서 축하연에 참석하고 축하공연도 해드렸는데, 그때 말씀하시데요. 매년 카드는 잘 받아보았노라고. 저를 제자로 인정해서 배씨 성을 내려주시기도 했어요." ◇배한라와 프레실리
▲ 한국춤을 가르치고 있는 메리 조 프레실리 할머니. 뒤의 그림은 스승 배한라씨의 공연모습이다. [연합]
배한라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배구자에게서 춤을 배웠다. 커서는 그곳 짓센여자대학에 진학해 가정관리학을 전공했다. 춤만이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났다. 결혼을 한 뒤에는 남편의 터전인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국무용의 보급과 전파에 헌신했다. 1950년 하와이 YWCA에서 처음 한국춤을 소개한 이래 길거리든 공원이든 가리지 않고 한국춤을 추었다. 장구가 없어 커피 깡통에 천을 씌워 대용(代用)하는 열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하와이대학에서 한국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만큼 자리를 잡아갔다. 1952년엔 처음으로 정식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남편과는 곧 이혼을 했고 아이도 없었기에 더더욱 춤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배한라는 원래가 정열가였다. 1962년 5월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대작곡가 앨런 호바네스(Alan Hovhaness)의 작곡과 대본으로 '윈드 드럼 모음곡(Wind Drum Suite)'이라는 무용극을 발표했다. 언젠가 배한라의 춤을 보고 그 매력에 빠져버린 호바네스가 안무를 의뢰했던 것. 호놀룰루 마미야 극장에서 초연 당시 현장연주의 지휘까지 작곡자가 직접 맡았다. 호바네스같은 대가와 공동작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실은 오하이오주립 볼링그린대학에서 체육과 무용을 공부하고 호놀룰루 카메하메하 고교에 교사로 부임하기 위해 건너온 메리 조 프레실리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도 바로 그 공연이었다. "백색 의상을 입고 추는 독무였는데 한국춤과 서양춤이 혼재하는 작품이었어요. 무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아득한 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하와이대학에서 한국춤을 두루 익혀 배한라의 수제자가 됐고 1974년엔 조교가 됐다. 프레실리 원장은 춤도 잘 추지만 장구솜씨도 일품이다. 장구채 잡는 품이 웬만한 한국무용 전공자보다 나아 보였다. ◇하와이에 뿌리내린 한국춤 배한라는 자신의 춤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무용가들을 초청해 한국무용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김천흥이 1963년 호놀룰루에서 궁중무용 공연을 갖는 등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주 찾아왔고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에 자료도 많이 기증했다. 딸(김정원)도 이곳에서 한국춤을 가르쳤다. 또 박수(남자무당) 이지산은 1976년부터 간헐적으로 이곳을 방문, 3-4개월씩 머물면서 굿과 농악 공연 뿐 아니라, 무속 관련 각종 소품과 그림, 의식절차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배한라는 이를 바탕으로 1980년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한ㆍ영문 저서를 동시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 동포들도 이를 통해 처음으로 굿을 구경한 경우가 많았고, 이곳 인류학자나 민속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배한라는 배구자의 춤바탕에 서양무용 스타일을 가미한 무용극 형식의 작품을 즐겨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춤의 뿌리를 중시해 김천흥, 이지산 외에도 한국 근대무용의 확립자로 평가받는 한성준과 불교예술의 제1인자 고 박송암 스님 등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할라 함 무용교습소는 예전엔 옷 수선가게와 공간을 나눠쓰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10여년 전부터 지금의 위치로 옮겨 좀 나아진 게 이 정도라고 했다. 스승이 타계한 1994년 이 학원을 비영리재단으로 만들어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재정난이지만 한국인이 아니다보니 한인사회와 의사소통 문제나 사고방식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종종 있다. 나이도 들고 힘에 부쳐서 한때는 춤솜씨 좋고 성격도 활발한 한 한국인 제자에게 운영을 맡겼지만 이 여성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다시 그가 이끌고 있다. 프레실리 원장이 돈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하자 제자 윤태희(1972년 이민) 씨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한 달 수강료 수입이 2천 달러 내외인 걸로 압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좁아서 동시에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도 없어요. 거기서 집세 1천500달러 제하고, 수시로 의상과 악기 등을 새로 구입하거나 수선하고 나면 늘 적잡니다." 독신이어서 특별히 드는 돈이 없고 퇴직교사 연금을 받는 덕분에 그나마 유지한다고 했다. 스승이 남겨준 유품과 5천여점의 사진 등 각종 자료를 하와이대 주디 반자일 교수 등의 노력으로 이 대학 한국학센터 '배한라 댄스 컬렉션'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각종 상장과 감사패 등이 다닥다닥 벽에 붙어 있지만 한국정부의 표창이나 훈장 은 보이지 않는다. 교민사회의 각종 행사에 단골로 불려가 춤과 음악을 선사하고 있건만 무대의상의 세탁과 손질 등 온갖 잡일은 아직도 이 칠십노인의 몫이다. 제자들은 "공연이 있을 때면 의상과 악기 옮기는 일도 선생님 몫이고, 비가 오면 새는 물을 받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도 선생님의 일"이라며 안타까워하지만 확실한 후계자도 없는 현재로서는 별다른 방안이 없는 실정이다. 벽 한켠, 1996년 4월 하와이대학에서 열린 공연이 끝난 뒤 서울에서 온 한 방문객이 써놓고 갔다는 액자 속 글귀가 그나마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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