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알제리 독립 투쟁

입력 2006.09.15 (11:16) 수정 2006.09.1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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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9.11테러 이후 이슬람과 서방세계간의 문명 충돌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만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도 뼈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132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처절하게 싸웠고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무려 백 5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났다고 하는데요.

반성과 사과 없는 프랑스에 맞서 아직도 알제리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용태영 특파원이 현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저항의 땅 알제리, 사하라와 지중해를 함께 안고 있는 아프리카의 대국입니다.

수도 알제의 언덕에 90미터가 넘는 탑이 솟아 있습니다. 독립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충혼탑입니다.

거리 한복판의 이 동상은 독립운동을 처음으로 일으켰던 부족 지도잡니다. 알제의 거리와 학교 이름은 모두 사람 이름입니다. 독립운동 전사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인터뷰> 알제리 시민 : "프랑스에 대항해서 저항군의 전투를 이끌었던 사람이죠."

<인터뷰> 알제리 시민 : "알제리 독립전쟁 때 지도자였죠."

시내 한복판의 이 광장도 이름이 ‘순교’ 광장입니다. 도시 전체를 희생자 추모에 바친 알제리, 독립전쟁은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알제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세티프, 알제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마을입니다. 1945년 5월 8일,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하자 주민들이 축하 행진에 나섰습니다.

<인터뷰> 키트비(세티프 독립전사) : "당시 알제리인은 프랑스가 약속한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시위대가 이 지점에 왔을 때 여기 순교자인 이 사람, 사이드 무지가 처음으로 알제리 국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부터 참사가 시작됐습니다."

세티프의 시위는 주변으로 확산됐고 프랑스는 무차별 학살로 대응했습니다. 세티프 옆에 자리 잡은 베냐지, 마을 한가운데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시위를 벌이다 희생된 400여 명 주민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터뷰>그리디 라바(마을 주민): "그 때 우리는 산으로 달아나기도 했는데 프랑스군은 여기 적힌 많은 사람들, 80살 90살 노인까지 살해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문하기도 했습니다."

계곡에 놓인 이 다리에도 비극이 서려 있습니다. 프랑스군은 시위에 참가한 마을 주민들을 산 채로 20미터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인터뷰>바큐쉬(독립전사): "이렇게 손발을 묶고 난간에 앉혀 놓았습니다. 군인이 여기 한 명, 저기 한 명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 하더니 ‘던져 버리지’ 하고 발로 확 걷어올려서 뒤로 넘겼습니다. 네 명이 그렇게 죽는 걸 봤죠."

다리 한쪽에는 당시의 참상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아누즈 씨는 시위에 참가했던 아버지와 형 3명이 이 다리 위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인터뷰>아누즈(희생자 가족): "군인들이 아버지에게 ‘프랑스 만세’를 외치라고 했죠. 아버지가 ‘절대로 내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없을 거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끝내 프랑스 만세를 거부하자 군인들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한 명씩 아들 세 명을 사살하고 아버지까지 살해해 다리 아래로 던졌습니다. 형들의 나이는 당시 22살, 20살, 16살이었습니다.

<인터뷰>아누즈(희생자 가족): "여기, 여기, 여기 세 형이 죽었죠. 여기 16살 형이 그때 가장 어렸죠."

세티프 주변 43개 마을에서 한 달 동안 4만5천 명이 숨졌습니다. 세티프 학살을 계기로, 1954년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됐고 전국에서 무장투쟁이 시작됐습니다. 도시와 산악지대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치열한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인터뷰>부그자라(독립전사): "독립이 아니면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정규군이 밀리자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 투입해 독립투쟁을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당시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산 중턱에 무너져 내린 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였던 마을 주변을 공습으로 초토화한 것입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된 공습으로 마을 집들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주민 모두가 죽거나 다쳐서 나중에 복구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 14개 마을 주민 3천 명 가운데 천5백 명이 하루 동안 폭격으로 숨졌습니다. 알제리 전체에서 전쟁 동안 8천 개 마을이 파괴됐습니다.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은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인터뷰>아라드 아흐메드(독립전사) :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독립을 쟁취해서 자기 조국의 시민의 되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를 독립에 이르게 했습니다. 언젠가 독립을 쟁취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프랑스는 마침내 1962년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했습니다. 알제에 독립전쟁 관련 자료를 보관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프랑스 점령기간 132년의 탄압과 투쟁의 실상이 사진과 유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시실 한쪽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당한 고문과 관련된 자료도 전시돼 있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고문도 자행됐습니다.

<인터뷰>레일라(무자헤딘 박물관 직원): "프랑스군의 이 여성의 옷을 벗겨서 치욕감을 주기 위해서 이런 행위를 했습니다. 이런 식의 고문은 이 여성 뿐만 아니라 알제리 여성 포로들에게 전반전으로 행해졌습니다."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져간 사람도 많습니다.

<인터뷰>베넬하쥐(고문 피해자, 독립전사): "프랑스는 인권선언도 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을 인간 이하, 동물보다 약간 나은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독립 전쟁 8년 동안 무려 백50만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을 정도로 프랑스의 탄압은 가혹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배가 입힌 알제리인의 피해에 대해 배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알제리 독립 기념일을 맞아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식민주의의 실상을 밝히는 것이 중심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는 지난해 아프리카 식민지배가 문명화에 도움을 줬다고 미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싣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 법안에 대한 반발입니다. 식민지배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미화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알제리의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식민지미화 법안 사태 때문에 지난해 예정됐던 양국간의 우호 조약 체결작업도 중단됐습니다.

알제리 국립묘지에는 독립전쟁 실종자 추모비가 있습니다. 당시 수십만 명이 군과 경찰에 연행된 뒤 소식이 끊긴 채 실종됐습니다.

<인터뷰>사디크(실종자 아들): "만약에 사진 한 장이라도 있다면, 아버지에 관해서 어떤 거라도 있으면 돌려받기를 원합니다. 이게 제가 프랑스에 요구하는 전붑니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철수할 때 각종 기록 자료 60톤을 가져갔습니다. 그 자료 속에는 실종자들에 대한 기록도 포함돼 있지만 프랑스는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엘 고르소(역사학자): "그 자료들은 우리의 유산이고 우리의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그 자료를 돌려받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 재인식 작업을 통해서만 옛 식민제국주의자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과거사의 진실은 덮어 둔 채 새 시대의 화합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 투쟁을 통해 독립한 나라는 알제리가 유일합니다.

프랑스로서는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지만 알제리는 그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당시의 진상이 밝혀지고 프랑스가 이를 사과할 때까지, 독립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알제리의 신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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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나지 않은 알제리 독립 투쟁
    • 입력 2006-09-15 10:51:41
    • 수정2006-09-15 15:11:16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9.11테러 이후 이슬람과 서방세계간의 문명 충돌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만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도 뼈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132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처절하게 싸웠고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무려 백 5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났다고 하는데요. 반성과 사과 없는 프랑스에 맞서 아직도 알제리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용태영 특파원이 현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저항의 땅 알제리, 사하라와 지중해를 함께 안고 있는 아프리카의 대국입니다. 수도 알제의 언덕에 90미터가 넘는 탑이 솟아 있습니다. 독립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충혼탑입니다. 거리 한복판의 이 동상은 독립운동을 처음으로 일으켰던 부족 지도잡니다. 알제의 거리와 학교 이름은 모두 사람 이름입니다. 독립운동 전사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인터뷰> 알제리 시민 : "프랑스에 대항해서 저항군의 전투를 이끌었던 사람이죠." <인터뷰> 알제리 시민 : "알제리 독립전쟁 때 지도자였죠." 시내 한복판의 이 광장도 이름이 ‘순교’ 광장입니다. 도시 전체를 희생자 추모에 바친 알제리, 독립전쟁은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알제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세티프, 알제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마을입니다. 1945년 5월 8일,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하자 주민들이 축하 행진에 나섰습니다. <인터뷰> 키트비(세티프 독립전사) : "당시 알제리인은 프랑스가 약속한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시위대가 이 지점에 왔을 때 여기 순교자인 이 사람, 사이드 무지가 처음으로 알제리 국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부터 참사가 시작됐습니다." 세티프의 시위는 주변으로 확산됐고 프랑스는 무차별 학살로 대응했습니다. 세티프 옆에 자리 잡은 베냐지, 마을 한가운데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시위를 벌이다 희생된 400여 명 주민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터뷰>그리디 라바(마을 주민): "그 때 우리는 산으로 달아나기도 했는데 프랑스군은 여기 적힌 많은 사람들, 80살 90살 노인까지 살해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문하기도 했습니다." 계곡에 놓인 이 다리에도 비극이 서려 있습니다. 프랑스군은 시위에 참가한 마을 주민들을 산 채로 20미터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인터뷰>바큐쉬(독립전사): "이렇게 손발을 묶고 난간에 앉혀 놓았습니다. 군인이 여기 한 명, 저기 한 명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 하더니 ‘던져 버리지’ 하고 발로 확 걷어올려서 뒤로 넘겼습니다. 네 명이 그렇게 죽는 걸 봤죠." 다리 한쪽에는 당시의 참상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아누즈 씨는 시위에 참가했던 아버지와 형 3명이 이 다리 위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인터뷰>아누즈(희생자 가족): "군인들이 아버지에게 ‘프랑스 만세’를 외치라고 했죠. 아버지가 ‘절대로 내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없을 거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끝내 프랑스 만세를 거부하자 군인들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한 명씩 아들 세 명을 사살하고 아버지까지 살해해 다리 아래로 던졌습니다. 형들의 나이는 당시 22살, 20살, 16살이었습니다. <인터뷰>아누즈(희생자 가족): "여기, 여기, 여기 세 형이 죽었죠. 여기 16살 형이 그때 가장 어렸죠." 세티프 주변 43개 마을에서 한 달 동안 4만5천 명이 숨졌습니다. 세티프 학살을 계기로, 1954년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됐고 전국에서 무장투쟁이 시작됐습니다. 도시와 산악지대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치열한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인터뷰>부그자라(독립전사): "독립이 아니면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정규군이 밀리자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 투입해 독립투쟁을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당시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산 중턱에 무너져 내린 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였던 마을 주변을 공습으로 초토화한 것입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된 공습으로 마을 집들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주민 모두가 죽거나 다쳐서 나중에 복구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 14개 마을 주민 3천 명 가운데 천5백 명이 하루 동안 폭격으로 숨졌습니다. 알제리 전체에서 전쟁 동안 8천 개 마을이 파괴됐습니다.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은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인터뷰>아라드 아흐메드(독립전사) :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독립을 쟁취해서 자기 조국의 시민의 되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를 독립에 이르게 했습니다. 언젠가 독립을 쟁취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프랑스는 마침내 1962년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했습니다. 알제에 독립전쟁 관련 자료를 보관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프랑스 점령기간 132년의 탄압과 투쟁의 실상이 사진과 유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시실 한쪽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당한 고문과 관련된 자료도 전시돼 있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고문도 자행됐습니다. <인터뷰>레일라(무자헤딘 박물관 직원): "프랑스군의 이 여성의 옷을 벗겨서 치욕감을 주기 위해서 이런 행위를 했습니다. 이런 식의 고문은 이 여성 뿐만 아니라 알제리 여성 포로들에게 전반전으로 행해졌습니다."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져간 사람도 많습니다. <인터뷰>베넬하쥐(고문 피해자, 독립전사): "프랑스는 인권선언도 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을 인간 이하, 동물보다 약간 나은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독립 전쟁 8년 동안 무려 백50만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을 정도로 프랑스의 탄압은 가혹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배가 입힌 알제리인의 피해에 대해 배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알제리 독립 기념일을 맞아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식민주의의 실상을 밝히는 것이 중심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는 지난해 아프리카 식민지배가 문명화에 도움을 줬다고 미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싣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 법안에 대한 반발입니다. 식민지배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미화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알제리의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식민지미화 법안 사태 때문에 지난해 예정됐던 양국간의 우호 조약 체결작업도 중단됐습니다. 알제리 국립묘지에는 독립전쟁 실종자 추모비가 있습니다. 당시 수십만 명이 군과 경찰에 연행된 뒤 소식이 끊긴 채 실종됐습니다. <인터뷰>사디크(실종자 아들): "만약에 사진 한 장이라도 있다면, 아버지에 관해서 어떤 거라도 있으면 돌려받기를 원합니다. 이게 제가 프랑스에 요구하는 전붑니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철수할 때 각종 기록 자료 60톤을 가져갔습니다. 그 자료 속에는 실종자들에 대한 기록도 포함돼 있지만 프랑스는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엘 고르소(역사학자): "그 자료들은 우리의 유산이고 우리의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그 자료를 돌려받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 재인식 작업을 통해서만 옛 식민제국주의자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과거사의 진실은 덮어 둔 채 새 시대의 화합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 투쟁을 통해 독립한 나라는 알제리가 유일합니다. 프랑스로서는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지만 알제리는 그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당시의 진상이 밝혀지고 프랑스가 이를 사과할 때까지, 독립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알제리의 신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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