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피플] 권찬수, 인천 Utd.를 닮은 사나이

입력 2007.09.17 (16:13) 수정 2007.09.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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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하우젠컵 2007 준결승전이 열렸던 6월 20일 상암월드컵경기장. 인천 유나이티드의 창단 후 세 번째 도전이 있었던 날이다. 첫 번째 도전은 2005년 정규리그였다. 당시 인천은 챔피언결정전에까지 진출했었지만 1차전에서 울산에 5골을 허용하며 일찌감치 우승 트로피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 도전은 2006년 FA컵이었다. 인천은 4강까지 진출해 전남과 0-0으로 비겼지만 승부차기 끝에 3-4로 패했다. 첫 해 정규리그, 두 번째 해 FA컵, 그리고 2007년 드디어 삼성 하우젠컵 준결승에 올랐다. 거짓말 같은 세 번째 도전이었다.


매년 작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시민구단 인천으로서는 이번이야말로 우승 트로피를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후반 90분과 연장전을 거쳤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팽팽한 1-1 무승부. 승부는 승부차기로 치달았다. 서울에는 정조국, 이상협이 인천에는 임중용, 김상록이 나서 두 골씩을 안전하게 집어넣었다. 서울의 세 번째 키커는 심우연이었다. 심우연이 왼쪽 아래로 공을 낮게 깔았고 골키퍼는 몸을 날렸다. ‘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은 골대를 맞고 나왔다. 인천의 세 번째 키커는 방승환. 하지만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이었는지 그의 공 또한 골대를 맞고 나왔다.
서울은 아디, 곽태휘가 잇달아 골을 집어넣었고 인천도 서민국이 골을 성공시켜 이제 마지막 키커 이동원만 남게 됐다. 이동원이 골을 넣으면 승부는 6번째 키커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 하지만 슈팅과 함께 김병지가 몸을 날렸고 어느새 서울의 선수들은 기쁨의, 인천 선수들은 아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날 경기에서 보여준 인천 선수들의 투혼은 아름다웠다. 시민구단으로서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매해 세워둔 목표에 조금씩 근접해가고 있는 인천 유나이티드. 축 처진 어깨 뒤로 축구팬들의 눈시울 또한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키커 다섯 명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였던 노란 옷의 골키퍼. 그의 굴곡진 축구인생도 인천 유나이티드와 닮아 있었다. 정상의 순간에 섰는가 하면 어느새 부상으로 한·두해를 의미 없이 보내야했고 최고의 찬사를 받으면서도 단 한해도 풀타임 K-리거로 활약하지 못했던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 컵대회가 끝난지 두 달여가 지났던 지난 8월 27일. 늦었지만 권찬수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K-리그 3연속 우승을 모두 그라운드에서 경험한 사나이


“우승 확정짓는 경기는 제가 세 해 다 뛰었어요. 부상으로 첫 번째, 두 번째 해에는 많이 뛰지 못했지만 확정 지을 때만큼은 제가 뛰었으니까 그게 어디에요. 기분은 최고죠.” 25번째 해를 맞은 K-리그 역사상 단 두 번 밖에 없었던 3연패 기록. 그 중 3연패를 모두 그라운드에서 맛봤던 선수는 몇 명이나 될까?


권찬수 그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프로 첫 해 22경기를 뛰며 올스타에도 뽑혔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성남이 우승을 거둔 2001년에는 부상으로 단 7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2001년 때는 출장수가 적은 이유가 많이 다쳤어요. 이상하게 다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리고 (김)해운이 형이 정말 잘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양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마지막 두 경기에서 골문을 지킨 선수는 바로 권찬수였다. “첫 해 우승할 때는 정말 극적으로 우승했어요. 그 때는 선수층도 얇았구요. 정말 치열했던 것이 우리 팀이 이기면 다른 팀도 이기고, 우리가 지면 다른 팀도 지고. 그래서 매 라운드마다 1,2점 차이밖에 안 났어요. 결국 우승이 확정 됐을 때는 정말 난리가 났었어요. 너무 좋아서 부둥켜안고.”


한일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에도 성남의 치열한 혈투가 이어졌다. 시즌 초반 전북, 포항 전남 등과 엎치락뒤치락 1위 싸움이 계속됐다.
8월 이후에는 1위를 빼앗기지 않았지만 27라운드가 종료되었을 때 2위 울산과의 승점차는 불과 2점이었다. 울산은 마지막 경기에서 유상철이 네 골을 몰아넣는 등 무서운 화력으로 성남을 위협했지만 성남 역시 이동국이 활약한 포항을 4-1로 제압하며 극적인 K-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권찬수는 2002년에도 김해운 보다 적은 15경기에 출전했지만 우승 다툼이 치열했던 마지막 7경기에서 연속으로 출전해 4실점으로 선방했다.


3연패의 마지막 해이던 2003년에는 김해운과 22경기씩을 나누어 출전하며 성남 독주에 큰 기여를 했다. “부상으로 힘들다가 2003년에 몸이 올라섰어요. 그 때 7경기인가 8경기 전에 1위를 확정지었죠. 선수층도 두터워서 레알 마드리드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너무 쉽게 우승하니까 첫 해, 두 번째 해에 비해서는 즐겁지가 않더라고요.”


남들은 평생에 한 번 해보기 힘들다는 K-리그 우승을 무려 세 번이나 경험한 권찬수. 김해운과 합작해낸 3연패의 영광은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이었다. 성남이 첫 3연패를 이룰 당시 일화에는 사리체프라고 하는 최고의 골키퍼가 있었다. 사리체프는 3년 연속 0점대 실점률로 팀을 K-리그 최고의 팀으로 이끌었고 3번의 우승의 기쁨을 모두 그라운드에서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K-리그 역사상 단 한 명의 골키퍼, 사리체프 만이 느낄 수 있었던 3연속 우승의 기쁨을 이어 받은 선수가 바로 권찬수였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시작은 펜싱, 골키퍼는 우연히


“초등학교 때는 육상을 하다가 중학교를 갔더니 육상부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펜싱 선수를 했어요. 그 때는 운동 신경이 있었어요. 키도 좀 컸고. 그런데 축구가 정말 좋았어요.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중학교 1학년 말 때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는 기본기도 없이 빠르기만 하니까 냅다 그냥 뛰다가 3학년 때 되니까 키도 크고 하니까 골키퍼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골키퍼는 중3 때부터 시작했어요.”


늦었다. 축구 시작을 늦게 하는 선수들에 대한 기사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중3때 시작한 골키퍼는 정말 늦다. 1년 후 축구 명문 풍생고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당시 풍생고 감독은 현 수원삼성 코치이자 전북을 6년간 이끈 경험이 있는 최만희 감독이었다. 풍생중 3학년이던 권찬수의 좋은 신체조건 때문이었는지 최만희 감독은 일찌감치 권찬수를 골키퍼로 점찍었다. “최만희 감독님께서 저를 골키퍼 시키시려고 네가 골키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안 한다고 버텼는데 어떻게 해요. 시키면 해야지.”


“기본기가 없다 보니까 그냥 넘어지라고 하면 볼만 보고 넘어지고 그랬지 딴 거 없었어요. 그렇게 잘하지도 못했고.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전국대회 우승도 하고 준우승도 하고 다 해봤어요.” 당시에는 골키퍼의 역할을 정확하게 가르쳐 줄 골키퍼 코치가 따로 없었다. 현재도 프로 팀을 제외하고는 골키퍼 코치가 드물지만 당시에는 선배들이 가르쳐 주는 기본기를 무작정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본기는 형들이 시키면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래도 중고등학교 때 고등학교 형들이 청소년 대표여서 기본기는 많이 배웠어요. 3학년이 1학년, 두 살 터울로 가르쳐줬어요. 그렇게 선후배 관계가 뚜렷하다보니 1학년 때는 선배들 빨래하는 것만으로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예전에는 세탁기를 돌리면 맨땅에서 축구를 하니까 흙이 많이 섞여 들어가서 고장이나요. 그래서 다 손빨래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도 아니죠. 그거 1년 동안 해봐요. 사람 죽어요. 요즘은 그런 일이 없죠.”


풍생고에서 성공적인 학창 생활을 보낸 권찬수는 단국대에 진학했다. “대학교 때가 좋았죠. 그 때는 한 경기에서 승부차기 다섯 개 중 네 개를 막은 적이 있을 정도에요. 상대가 한양대였는데 당시 한양대 멤버가 정말 좋았거든요. 저희는 선수층이 얇아서 비기기 작전으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것이 작전이었어요. 그때 제가 네 개를 막고 한양대 (김)대환이가(현 수원삼성) 세 개 막았어요.”



최고의 라이벌 김해운


단국대 졸업 후 한일생명에 입단한 권찬수는 1999년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드래프트 신청을 하게 된 데에는 현 성남일화 김학범 감독의 영향이 컸다. 당시 국민은행 코치로 재직하던 김학범 감독이 98년 9월 천안일화(현 성남일화)의 코치로 부임했고 평소 눈여겨보던 권찬수를 골키퍼로 낙점한 것이었다. “당시 김학범 감독님이 국민은행에 계셨어요. 그래서 제 게임을 많이 보셨는데 그 때 한일생명이 해체됐어요. ‘너는 무조건 와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가고 싶다고 갑니까? 드래프트가 되어야 들어가죠. 근데 넣기만 하라고 어떻게든 데리고 온다고 하셔서 드래프트를 신청하게 되었죠. 그 해 김영철 선수에 이어서 2순위로 뽑혔어요. 수비와 골키퍼 쪽을 보강하는 단계라서 수비위주로 선수를 많이 뽑았어요. 김상식 선수도 그 때 들어왔지요.”


1999년 천안일화에는 김해운이라고 하는 걸출한 골키퍼가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96년 입단한 김해운은 신의손, 차상광 등의 뒤를 이어 풀타임 K-리거로 거듭나고 있었다. 98년에는 팀이 치른 35경기 중 30경기에 나서 골문을 지켰으니 붙박이 주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99년 권찬수의 등장으로 골키퍼 판도에는 일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신인 권찬수는 첫 해 총 37경기 중 22경기에 나서 골문을 지켰고 올스타에 뽑히는 등 골키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골키퍼로서 첫 해 올스타에 뽑히는 것은 드문 케이스였다. 첫 해 K-리그 성적은 꼴찌였지만 김해운과 함께 FA컵 우승을 이끄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의 굴곡진 축구사는 다음 해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팀이었다면 진작 풀타임 K-리거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만한 실력이었지만 성남에는 선배 김해운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성남의 골문을 지키고 있는 김해운 역시 훌륭한 골키퍼였다. 다음해 김해운은 27경기에 출전해 골문을 지켰고 권찬수는 14번 출전에 그쳤다. 우승을 거둔 2001년에는 부상 등을 이유로 7경기 출전에 그쳤고 2002년에도 15경기에 머물렀다. 낮은 실점률과 안정된 방어로 중요한 경기에서 중용되기는 했지만 확실한 주전 자리를 꿰찰 수는 없었다. “(김해운 선수와는) 계속 경쟁 상대였죠. 거의 반반씩 뛰게끔 하더라고요. 그런 부분이 골키퍼한테 좋을 수도 있지만 안 좋을 수도 있어요. 좋게 보면 힘들 때는 서로 바꿔가면서 할 수 있고. 그래도 안 좋은 부분이 더 많죠. 그런데 위에서 보기에는 경쟁 구도가 더 좋을거에요. 너희끼리 싸워라.”


본인들의 속은 타들어갔겠지만 분명 성남으로서는 성공적인 골키퍼 로테이션이었다. 두 골키퍼를 3년간 번갈아가면서 사용해 K-리그 3연속 우승을 일궈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권찬수로서도 그 때까지의 경쟁은 행복한 고민이었을 뿐이었다. 안정적으로 팀에 정착한데다 중요한 경기에 빼놓지 않고 출전할 만큼 신뢰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시련의 시간


시련의 시작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 권찬수라는 이름의 골키퍼가 축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일반 직장인이었다면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해 있었던 그가 굳이 모험을 감행했다.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로의 입단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자들의 의리라는 것이 무서워요. 성남에서 친했던 선수들이 다 여기로 왔거든요. 김현석 선수, 황연석 선수, 지금 코치로 있는 김정재, 그리고 김우재, 전재호. 다들 인천으로 왔어요. 저는 처음에는 성남 생활이 좋았기 때문에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형들이 오라고 해서 마음을 먹고 감독님께 얘기를 했더니 가지 말라고 그러시면서 3일 동안 운동도 안 시키셨어요. 그 때 이적 문제 때문에 동계훈련도 못가고 많이 힘들었지요. 두 달 정도 운동을 못하다가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안되죠. (황)연석이 형도 다쳐서 고생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다른 선수들은 다들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2004년 권찬수는 김이섭, 신범철 등과 번갈아가며 골문을 지켰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다 팀 창단 초기이다 보니 세 골키퍼의 실험은 계속됐다. 리그 중반에는 독일 출신 로란트 감독이 사임하는 등 팀 분위기도 어지러웠다. “로란트 감독은 카리스마가 없어서 장악력이 떨어졌어요.
선수를 잡으려고 하는데 선수들은 잘 따르지 않고. 반면 장(외룡)감독님은 사석에서는 편하게 하다가 운동할 때는 집중해서 하는 스타일이죠. 그런 면이 좋은 것 같아요.”


당시 장외룡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의 지휘봉을 맡는 등 어지러운 상황은 계속됐고 권찬수는 주전과 조금씩 멀어져갔다. 첫 해 8경기 출전에 그친 권찬수가 2005년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자 김해운의 부상으로 골키퍼 난에 시달리던 성남으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왔다. 이적이 아닌 6개월임대로 성남에 잠시 둥지를 튼 권찬수는 그해 김해운, 박상철, 양영민 등 다른 골키퍼보다 많은 정규리그 10경기에 출전하며 다시금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그 해 성남은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임대 종료 후 인천으로 복귀한 권찬수는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점점 더 침체되었다. 2006 시즌 출전 경기 수는 3경기.
K-리그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출전이었다. 그의 나이도 어느새 서른을 넘긴 상황이었고 팬들의 기억에서도 점점 흐려져 갔다.




다시 그라운드의 중심으로


“여러 이적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운동도 제대로 못했어요. 2년 반 정도 제대로 운동을 못했고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허리, 발목, 무릎 거의 돌아가면서 다 다쳤어요. 그러다 보니 실수도 늘었어요. 잘 할 때는 그라운드 나가면 무조건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운동을 제대로 못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잃었죠. 집중력도 떨어지고. 올해에는 에이전트도 끊고 혼자서 여기서 뭐가 되도 여기서 끝낸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이제야 몸이 슬슬 올라오는 것 같은데 잘 안되네요.”


화제의 중심에서 잠시 떨어져있던 권찬수. 잊혀질 뻔했던 그가 2007 시즌의 시작과 함께 다시 그라운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시즌 초반 정규리그와 컵대회가 번갈아 이어지는 힘든 일정 속에서 김이섭과 함께 번갈아가며 그라운드에 나섰고 인천을 ‘삼성 하우젠컵 2007’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킨 것이었다. A조 2위의 호성적을 올린 인천의 4강 상대는 서울이었다. 귀네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서울은 컵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며 B조 1위에 올라있었다. 게다가 서울에는 살아있는 전설 김병지가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권찬수에게는 오랜만에 다가온 기회였다. 인천이 K-리그 정복의 문턱에서 실족했던 2005년 챔피언결정전 1차전과 지난해 FA컵 4강전 때는 항상 김이섭 골키퍼가 팀의 최후방을 맡고 있었다. 김이섭 역시 매해 성경모와 치열한 주전다툼으로 풀타임 K-리거가 아니었으나 중요한 경기에서는 풍부한 경험을 인정받아 늘 골문을 지키던 확고한 골키퍼였다. 그런 김이섭을 뒤로하고 권찬수가 플레이오프 4강전 골문을 지키게 된 것은 매우 큰 기회인 셈이었다. 그 기회는 승부차기라는 더 큰 비중으로 다가왔지만 결국 그는 웃지 못했다.


“정말 화가 났던 것이 인천에 와서는 페널티킥으로 진적이 없었고 예전부터 지더라도 한 두 개씩은 꼭 막고 졌는데 그날은 하나도 막지 못했어요. 선수들 얼굴도 못 쳐다보고. 태어나서 느껴보지 못했던 굴욕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아쉬운건 데얀이 나오지 못했던 거예요. 그 것만 아니었어도......어쩔 수 없죠.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죠.” 그도 그럴 것이 권찬수는 역대 K-리그 골키퍼 중 12번째로 많은 승부차기 방어수를 보유하고 있는 골키퍼였다. 그리고 5개의 승부차기 중 4개를 막아냈던 대학 시절의 기억처럼 승부차기는 자신 있는 종목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서울과의 4강전에서는 단 한 개의 공도 그의 손을 스치지 않았고 심우연의 슈팅만이 골대를 맞고 나왔을 뿐이었다.
아름다웠던 인천의 세 번째 도전과 권찬수의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아쉬움만을 남긴채 끝이 나고 말았다. K-리그가 종점으로 치닫고 있는 현재 권찬수의 출전 수는 11경기에 멈춰있다. 후반기 들어 인천의 상승세가 계속되자 박이천 감독은 김이섭 골키퍼 시스템에 변화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9월 3일에는 빙모상을 당하는 등 어지러운 주위 분위기도 한 몫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천은 FA컵 8강에 올라 서울과의 맞대결을 다시 한 번 눈앞에 두고 있고 정규리그에서도 6위 전북과 승점차 없는 8위에 올라있어 플레이오프 가능성이 높다. 언제 그랬냐는 듯 멋진 선방으로 팬들의 앞에 다시 나타날 권찬수를 기대해 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가족과 미래를 이야기 하다

2004년 이후 권찬수의 축구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붙잡아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여기 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죠. 예전에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났어요. 한참 떨어져 있다가 인천에 와서 결혼을 하게 됐어요. 지금 축구를 하는 것도 애들도 애들이지만 아내가 아니었으면 망가졌을 거예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에요. 지금은 저보다 와이프가 더 힘들잖아요. 계속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저는 위로를 받았는데 저는 위로도 못해주니까.”


권찬수에게 가족의 존재는 특별하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서 사고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기억이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자녀들에게는 더 큰 사랑을 주고 싶을 뿐이다. 지난 서울과의 플레이오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같았으면 술로 풀었을 스트레스였지만 그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차라리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서 아이들 웃는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더 빨리 아픔을 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은 그의 가족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가 모를 줄 알았는데 티비에서 축구하는 장면이 나오면 보면서 ‘아빠, 아빠’라고 얘기해요. 제가 나오지 않더라도 축구 경기만 하면 ‘아빠 저기 있네.’ 하면서 말하더라고요. 제가 축구하는걸 아니까. 그래서 아내 랑도 많이 얘기해요. 애들이 아빠 축구하는거 알 때까지는 해야 될 텐데. 제가 딴 친구들에 비해서 결혼을 늦게 했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애들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고 그래요. 저는 이제 시작단계인데......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하고 싶어요. 병지 형은 마흔살까지도 한다는데. 저도 2~3년 정도는 더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더라고요.”


“골키퍼는 그런 매력이 있어요. 어려울 때 하나를 막아주면 팀 분위기가 막 올라가거든요. 그 때 기분이 진짜 날아가죠. 선수들은 골 넣는 기분이 있지만 저는 막는 기분이 있으니까. 선수마다 다르겠지만 몸이 좋고 자신감이 있을 때는 뭐든지 다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이 들어요. 저보다 공격수 마음이 더 급하잖아요. 공격수는 골키퍼가 각을 좁혀서 나오면 급해질 수밖에 없어요. 진짜 몸 좋고 자신 있을 때는 페널티킥도 다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상을 많이 당했지만 프로선수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치고 그러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여기 와서 마무리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승 한 번 하고 은퇴하는 것이 목표에요. 은퇴 후에는 아직 반반인데 공부를 더 해서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가족들이랑 같이 지낼 수 있는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남들은 고등학교 축구팀 코치로 가서 가족들이랑 있으라고 하는데 성격상 뭐 하나에 빠지면 목메는 스타일이라 고등학교 팀을 맡더라도 거기에 붙어서 일일이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가족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한일생명 시절 신윤기 감독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너가 최고다. 너가 최고니까 널 믿고 선수들이 따라올 수 있게끔 잘해야만 한다.” 아직 권찬수의 가슴 속에는 ‘최고’라는 두 글자와 함께 골키퍼로서 절대 잃지 말아야 할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K-리그 역사상 단 두 명의 골키퍼 밖에 경험해보지 못해 K-리그 3연속 우승의 자부심 또한 그를 지탱해주고 있다.

축구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과 최악의 상황을 모두 경험했던 권찬수. 이제 그에게는 K-리그 스타로서 정상에 우뚝 서는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미를 더 돋보이게 하는 안개꽃처럼 노장 권찬수는 팀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인천 유나이티드의 우승을 위해 무슨 일이든 마다않고 해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그라운드를 떠나는 순간, 그의 얼굴에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이 드리워져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K-리그 명예기자 홍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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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핫피플] 권찬수, 인천 Utd.를 닮은 사나이
    • 입력 2007-09-17 16:02:38
    • 수정2007-09-18 10:41:44
    축구

삼성 하우젠컵 2007 준결승전이 열렸던 6월 20일 상암월드컵경기장. 인천 유나이티드의 창단 후 세 번째 도전이 있었던 날이다. 첫 번째 도전은 2005년 정규리그였다. 당시 인천은 챔피언결정전에까지 진출했었지만 1차전에서 울산에 5골을 허용하며 일찌감치 우승 트로피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 도전은 2006년 FA컵이었다. 인천은 4강까지 진출해 전남과 0-0으로 비겼지만 승부차기 끝에 3-4로 패했다. 첫 해 정규리그, 두 번째 해 FA컵, 그리고 2007년 드디어 삼성 하우젠컵 준결승에 올랐다. 거짓말 같은 세 번째 도전이었다.

매년 작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시민구단 인천으로서는 이번이야말로 우승 트로피를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후반 90분과 연장전을 거쳤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팽팽한 1-1 무승부. 승부는 승부차기로 치달았다. 서울에는 정조국, 이상협이 인천에는 임중용, 김상록이 나서 두 골씩을 안전하게 집어넣었다. 서울의 세 번째 키커는 심우연이었다. 심우연이 왼쪽 아래로 공을 낮게 깔았고 골키퍼는 몸을 날렸다. ‘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은 골대를 맞고 나왔다. 인천의 세 번째 키커는 방승환. 하지만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이었는지 그의 공 또한 골대를 맞고 나왔다. 서울은 아디, 곽태휘가 잇달아 골을 집어넣었고 인천도 서민국이 골을 성공시켜 이제 마지막 키커 이동원만 남게 됐다. 이동원이 골을 넣으면 승부는 6번째 키커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 하지만 슈팅과 함께 김병지가 몸을 날렸고 어느새 서울의 선수들은 기쁨의, 인천 선수들은 아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날 경기에서 보여준 인천 선수들의 투혼은 아름다웠다. 시민구단으로서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매해 세워둔 목표에 조금씩 근접해가고 있는 인천 유나이티드. 축 처진 어깨 뒤로 축구팬들의 눈시울 또한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키커 다섯 명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였던 노란 옷의 골키퍼. 그의 굴곡진 축구인생도 인천 유나이티드와 닮아 있었다. 정상의 순간에 섰는가 하면 어느새 부상으로 한·두해를 의미 없이 보내야했고 최고의 찬사를 받으면서도 단 한해도 풀타임 K-리거로 활약하지 못했던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 컵대회가 끝난지 두 달여가 지났던 지난 8월 27일. 늦었지만 권찬수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K-리그 3연속 우승을 모두 그라운드에서 경험한 사나이

“우승 확정짓는 경기는 제가 세 해 다 뛰었어요. 부상으로 첫 번째, 두 번째 해에는 많이 뛰지 못했지만 확정 지을 때만큼은 제가 뛰었으니까 그게 어디에요. 기분은 최고죠.” 25번째 해를 맞은 K-리그 역사상 단 두 번 밖에 없었던 3연패 기록. 그 중 3연패를 모두 그라운드에서 맛봤던 선수는 몇 명이나 될까?

권찬수 그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프로 첫 해 22경기를 뛰며 올스타에도 뽑혔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성남이 우승을 거둔 2001년에는 부상으로 단 7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2001년 때는 출장수가 적은 이유가 많이 다쳤어요. 이상하게 다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리고 (김)해운이 형이 정말 잘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양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마지막 두 경기에서 골문을 지킨 선수는 바로 권찬수였다. “첫 해 우승할 때는 정말 극적으로 우승했어요. 그 때는 선수층도 얇았구요. 정말 치열했던 것이 우리 팀이 이기면 다른 팀도 이기고, 우리가 지면 다른 팀도 지고. 그래서 매 라운드마다 1,2점 차이밖에 안 났어요. 결국 우승이 확정 됐을 때는 정말 난리가 났었어요. 너무 좋아서 부둥켜안고.”

한일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에도 성남의 치열한 혈투가 이어졌다. 시즌 초반 전북, 포항 전남 등과 엎치락뒤치락 1위 싸움이 계속됐다. 8월 이후에는 1위를 빼앗기지 않았지만 27라운드가 종료되었을 때 2위 울산과의 승점차는 불과 2점이었다. 울산은 마지막 경기에서 유상철이 네 골을 몰아넣는 등 무서운 화력으로 성남을 위협했지만 성남 역시 이동국이 활약한 포항을 4-1로 제압하며 극적인 K-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권찬수는 2002년에도 김해운 보다 적은 15경기에 출전했지만 우승 다툼이 치열했던 마지막 7경기에서 연속으로 출전해 4실점으로 선방했다.

3연패의 마지막 해이던 2003년에는 김해운과 22경기씩을 나누어 출전하며 성남 독주에 큰 기여를 했다. “부상으로 힘들다가 2003년에 몸이 올라섰어요. 그 때 7경기인가 8경기 전에 1위를 확정지었죠. 선수층도 두터워서 레알 마드리드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너무 쉽게 우승하니까 첫 해, 두 번째 해에 비해서는 즐겁지가 않더라고요.”

남들은 평생에 한 번 해보기 힘들다는 K-리그 우승을 무려 세 번이나 경험한 권찬수. 김해운과 합작해낸 3연패의 영광은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이었다. 성남이 첫 3연패를 이룰 당시 일화에는 사리체프라고 하는 최고의 골키퍼가 있었다. 사리체프는 3년 연속 0점대 실점률로 팀을 K-리그 최고의 팀으로 이끌었고 3번의 우승의 기쁨을 모두 그라운드에서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K-리그 역사상 단 한 명의 골키퍼, 사리체프 만이 느낄 수 있었던 3연속 우승의 기쁨을 이어 받은 선수가 바로 권찬수였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시작은 펜싱, 골키퍼는 우연히

“초등학교 때는 육상을 하다가 중학교를 갔더니 육상부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펜싱 선수를 했어요. 그 때는 운동 신경이 있었어요. 키도 좀 컸고. 그런데 축구가 정말 좋았어요.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중학교 1학년 말 때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는 기본기도 없이 빠르기만 하니까 냅다 그냥 뛰다가 3학년 때 되니까 키도 크고 하니까 골키퍼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골키퍼는 중3 때부터 시작했어요.”

늦었다. 축구 시작을 늦게 하는 선수들에 대한 기사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중3때 시작한 골키퍼는 정말 늦다. 1년 후 축구 명문 풍생고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당시 풍생고 감독은 현 수원삼성 코치이자 전북을 6년간 이끈 경험이 있는 최만희 감독이었다. 풍생중 3학년이던 권찬수의 좋은 신체조건 때문이었는지 최만희 감독은 일찌감치 권찬수를 골키퍼로 점찍었다. “최만희 감독님께서 저를 골키퍼 시키시려고 네가 골키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안 한다고 버텼는데 어떻게 해요. 시키면 해야지.”

“기본기가 없다 보니까 그냥 넘어지라고 하면 볼만 보고 넘어지고 그랬지 딴 거 없었어요. 그렇게 잘하지도 못했고.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전국대회 우승도 하고 준우승도 하고 다 해봤어요.” 당시에는 골키퍼의 역할을 정확하게 가르쳐 줄 골키퍼 코치가 따로 없었다. 현재도 프로 팀을 제외하고는 골키퍼 코치가 드물지만 당시에는 선배들이 가르쳐 주는 기본기를 무작정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본기는 형들이 시키면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래도 중고등학교 때 고등학교 형들이 청소년 대표여서 기본기는 많이 배웠어요. 3학년이 1학년, 두 살 터울로 가르쳐줬어요. 그렇게 선후배 관계가 뚜렷하다보니 1학년 때는 선배들 빨래하는 것만으로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예전에는 세탁기를 돌리면 맨땅에서 축구를 하니까 흙이 많이 섞여 들어가서 고장이나요. 그래서 다 손빨래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도 아니죠. 그거 1년 동안 해봐요. 사람 죽어요. 요즘은 그런 일이 없죠.”

풍생고에서 성공적인 학창 생활을 보낸 권찬수는 단국대에 진학했다. “대학교 때가 좋았죠. 그 때는 한 경기에서 승부차기 다섯 개 중 네 개를 막은 적이 있을 정도에요. 상대가 한양대였는데 당시 한양대 멤버가 정말 좋았거든요. 저희는 선수층이 얇아서 비기기 작전으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것이 작전이었어요. 그때 제가 네 개를 막고 한양대 (김)대환이가(현 수원삼성) 세 개 막았어요.”

최고의 라이벌 김해운

단국대 졸업 후 한일생명에 입단한 권찬수는 1999년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드래프트 신청을 하게 된 데에는 현 성남일화 김학범 감독의 영향이 컸다. 당시 국민은행 코치로 재직하던 김학범 감독이 98년 9월 천안일화(현 성남일화)의 코치로 부임했고 평소 눈여겨보던 권찬수를 골키퍼로 낙점한 것이었다. “당시 김학범 감독님이 국민은행에 계셨어요. 그래서 제 게임을 많이 보셨는데 그 때 한일생명이 해체됐어요. ‘너는 무조건 와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가고 싶다고 갑니까? 드래프트가 되어야 들어가죠. 근데 넣기만 하라고 어떻게든 데리고 온다고 하셔서 드래프트를 신청하게 되었죠. 그 해 김영철 선수에 이어서 2순위로 뽑혔어요. 수비와 골키퍼 쪽을 보강하는 단계라서 수비위주로 선수를 많이 뽑았어요. 김상식 선수도 그 때 들어왔지요.”

1999년 천안일화에는 김해운이라고 하는 걸출한 골키퍼가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96년 입단한 김해운은 신의손, 차상광 등의 뒤를 이어 풀타임 K-리거로 거듭나고 있었다. 98년에는 팀이 치른 35경기 중 30경기에 나서 골문을 지켰으니 붙박이 주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99년 권찬수의 등장으로 골키퍼 판도에는 일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신인 권찬수는 첫 해 총 37경기 중 22경기에 나서 골문을 지켰고 올스타에 뽑히는 등 골키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골키퍼로서 첫 해 올스타에 뽑히는 것은 드문 케이스였다. 첫 해 K-리그 성적은 꼴찌였지만 김해운과 함께 FA컵 우승을 이끄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의 굴곡진 축구사는 다음 해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팀이었다면 진작 풀타임 K-리거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만한 실력이었지만 성남에는 선배 김해운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성남의 골문을 지키고 있는 김해운 역시 훌륭한 골키퍼였다. 다음해 김해운은 27경기에 출전해 골문을 지켰고 권찬수는 14번 출전에 그쳤다. 우승을 거둔 2001년에는 부상 등을 이유로 7경기 출전에 그쳤고 2002년에도 15경기에 머물렀다. 낮은 실점률과 안정된 방어로 중요한 경기에서 중용되기는 했지만 확실한 주전 자리를 꿰찰 수는 없었다. “(김해운 선수와는) 계속 경쟁 상대였죠. 거의 반반씩 뛰게끔 하더라고요. 그런 부분이 골키퍼한테 좋을 수도 있지만 안 좋을 수도 있어요. 좋게 보면 힘들 때는 서로 바꿔가면서 할 수 있고. 그래도 안 좋은 부분이 더 많죠. 그런데 위에서 보기에는 경쟁 구도가 더 좋을거에요. 너희끼리 싸워라.”

본인들의 속은 타들어갔겠지만 분명 성남으로서는 성공적인 골키퍼 로테이션이었다. 두 골키퍼를 3년간 번갈아가면서 사용해 K-리그 3연속 우승을 일궈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권찬수로서도 그 때까지의 경쟁은 행복한 고민이었을 뿐이었다. 안정적으로 팀에 정착한데다 중요한 경기에 빼놓지 않고 출전할 만큼 신뢰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시련의 시간

시련의 시작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 권찬수라는 이름의 골키퍼가 축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일반 직장인이었다면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해 있었던 그가 굳이 모험을 감행했다.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로의 입단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자들의 의리라는 것이 무서워요. 성남에서 친했던 선수들이 다 여기로 왔거든요. 김현석 선수, 황연석 선수, 지금 코치로 있는 김정재, 그리고 김우재, 전재호. 다들 인천으로 왔어요. 저는 처음에는 성남 생활이 좋았기 때문에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형들이 오라고 해서 마음을 먹고 감독님께 얘기를 했더니 가지 말라고 그러시면서 3일 동안 운동도 안 시키셨어요. 그 때 이적 문제 때문에 동계훈련도 못가고 많이 힘들었지요. 두 달 정도 운동을 못하다가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안되죠. (황)연석이 형도 다쳐서 고생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다른 선수들은 다들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2004년 권찬수는 김이섭, 신범철 등과 번갈아가며 골문을 지켰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다 팀 창단 초기이다 보니 세 골키퍼의 실험은 계속됐다. 리그 중반에는 독일 출신 로란트 감독이 사임하는 등 팀 분위기도 어지러웠다. “로란트 감독은 카리스마가 없어서 장악력이 떨어졌어요. 선수를 잡으려고 하는데 선수들은 잘 따르지 않고. 반면 장(외룡)감독님은 사석에서는 편하게 하다가 운동할 때는 집중해서 하는 스타일이죠. 그런 면이 좋은 것 같아요.”

당시 장외룡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의 지휘봉을 맡는 등 어지러운 상황은 계속됐고 권찬수는 주전과 조금씩 멀어져갔다. 첫 해 8경기 출전에 그친 권찬수가 2005년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자 김해운의 부상으로 골키퍼 난에 시달리던 성남으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왔다. 이적이 아닌 6개월임대로 성남에 잠시 둥지를 튼 권찬수는 그해 김해운, 박상철, 양영민 등 다른 골키퍼보다 많은 정규리그 10경기에 출전하며 다시금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그 해 성남은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임대 종료 후 인천으로 복귀한 권찬수는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점점 더 침체되었다. 2006 시즌 출전 경기 수는 3경기. K-리그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출전이었다. 그의 나이도 어느새 서른을 넘긴 상황이었고 팬들의 기억에서도 점점 흐려져 갔다.


다시 그라운드의 중심으로

“여러 이적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운동도 제대로 못했어요. 2년 반 정도 제대로 운동을 못했고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허리, 발목, 무릎 거의 돌아가면서 다 다쳤어요. 그러다 보니 실수도 늘었어요. 잘 할 때는 그라운드 나가면 무조건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운동을 제대로 못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잃었죠. 집중력도 떨어지고. 올해에는 에이전트도 끊고 혼자서 여기서 뭐가 되도 여기서 끝낸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이제야 몸이 슬슬 올라오는 것 같은데 잘 안되네요.”

화제의 중심에서 잠시 떨어져있던 권찬수. 잊혀질 뻔했던 그가 2007 시즌의 시작과 함께 다시 그라운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시즌 초반 정규리그와 컵대회가 번갈아 이어지는 힘든 일정 속에서 김이섭과 함께 번갈아가며 그라운드에 나섰고 인천을 ‘삼성 하우젠컵 2007’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킨 것이었다. A조 2위의 호성적을 올린 인천의 4강 상대는 서울이었다. 귀네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서울은 컵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며 B조 1위에 올라있었다. 게다가 서울에는 살아있는 전설 김병지가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권찬수에게는 오랜만에 다가온 기회였다. 인천이 K-리그 정복의 문턱에서 실족했던 2005년 챔피언결정전 1차전과 지난해 FA컵 4강전 때는 항상 김이섭 골키퍼가 팀의 최후방을 맡고 있었다. 김이섭 역시 매해 성경모와 치열한 주전다툼으로 풀타임 K-리거가 아니었으나 중요한 경기에서는 풍부한 경험을 인정받아 늘 골문을 지키던 확고한 골키퍼였다. 그런 김이섭을 뒤로하고 권찬수가 플레이오프 4강전 골문을 지키게 된 것은 매우 큰 기회인 셈이었다. 그 기회는 승부차기라는 더 큰 비중으로 다가왔지만 결국 그는 웃지 못했다.

“정말 화가 났던 것이 인천에 와서는 페널티킥으로 진적이 없었고 예전부터 지더라도 한 두 개씩은 꼭 막고 졌는데 그날은 하나도 막지 못했어요. 선수들 얼굴도 못 쳐다보고. 태어나서 느껴보지 못했던 굴욕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아쉬운건 데얀이 나오지 못했던 거예요. 그 것만 아니었어도......어쩔 수 없죠.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죠.” 그도 그럴 것이 권찬수는 역대 K-리그 골키퍼 중 12번째로 많은 승부차기 방어수를 보유하고 있는 골키퍼였다. 그리고 5개의 승부차기 중 4개를 막아냈던 대학 시절의 기억처럼 승부차기는 자신 있는 종목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서울과의 4강전에서는 단 한 개의 공도 그의 손을 스치지 않았고 심우연의 슈팅만이 골대를 맞고 나왔을 뿐이었다.
아름다웠던 인천의 세 번째 도전과 권찬수의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아쉬움만을 남긴채 끝이 나고 말았다. K-리그가 종점으로 치닫고 있는 현재 권찬수의 출전 수는 11경기에 멈춰있다. 후반기 들어 인천의 상승세가 계속되자 박이천 감독은 김이섭 골키퍼 시스템에 변화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9월 3일에는 빙모상을 당하는 등 어지러운 주위 분위기도 한 몫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천은 FA컵 8강에 올라 서울과의 맞대결을 다시 한 번 눈앞에 두고 있고 정규리그에서도 6위 전북과 승점차 없는 8위에 올라있어 플레이오프 가능성이 높다. 언제 그랬냐는 듯 멋진 선방으로 팬들의 앞에 다시 나타날 권찬수를 기대해 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가족과 미래를 이야기 하다

2004년 이후 권찬수의 축구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붙잡아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여기 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죠. 예전에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났어요. 한참 떨어져 있다가 인천에 와서 결혼을 하게 됐어요. 지금 축구를 하는 것도 애들도 애들이지만 아내가 아니었으면 망가졌을 거예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에요. 지금은 저보다 와이프가 더 힘들잖아요. 계속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저는 위로를 받았는데 저는 위로도 못해주니까.”

권찬수에게 가족의 존재는 특별하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서 사고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기억이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자녀들에게는 더 큰 사랑을 주고 싶을 뿐이다. 지난 서울과의 플레이오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같았으면 술로 풀었을 스트레스였지만 그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차라리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서 아이들 웃는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더 빨리 아픔을 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은 그의 가족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가 모를 줄 알았는데 티비에서 축구하는 장면이 나오면 보면서 ‘아빠, 아빠’라고 얘기해요. 제가 나오지 않더라도 축구 경기만 하면 ‘아빠 저기 있네.’ 하면서 말하더라고요. 제가 축구하는걸 아니까. 그래서 아내 랑도 많이 얘기해요. 애들이 아빠 축구하는거 알 때까지는 해야 될 텐데. 제가 딴 친구들에 비해서 결혼을 늦게 했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애들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고 그래요. 저는 이제 시작단계인데......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하고 싶어요. 병지 형은 마흔살까지도 한다는데. 저도 2~3년 정도는 더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더라고요.”

“골키퍼는 그런 매력이 있어요. 어려울 때 하나를 막아주면 팀 분위기가 막 올라가거든요. 그 때 기분이 진짜 날아가죠. 선수들은 골 넣는 기분이 있지만 저는 막는 기분이 있으니까. 선수마다 다르겠지만 몸이 좋고 자신감이 있을 때는 뭐든지 다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이 들어요. 저보다 공격수 마음이 더 급하잖아요. 공격수는 골키퍼가 각을 좁혀서 나오면 급해질 수밖에 없어요. 진짜 몸 좋고 자신 있을 때는 페널티킥도 다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상을 많이 당했지만 프로선수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치고 그러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여기 와서 마무리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승 한 번 하고 은퇴하는 것이 목표에요. 은퇴 후에는 아직 반반인데 공부를 더 해서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가족들이랑 같이 지낼 수 있는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남들은 고등학교 축구팀 코치로 가서 가족들이랑 있으라고 하는데 성격상 뭐 하나에 빠지면 목메는 스타일이라 고등학교 팀을 맡더라도 거기에 붙어서 일일이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가족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한일생명 시절 신윤기 감독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너가 최고다. 너가 최고니까 널 믿고 선수들이 따라올 수 있게끔 잘해야만 한다.” 아직 권찬수의 가슴 속에는 ‘최고’라는 두 글자와 함께 골키퍼로서 절대 잃지 말아야 할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K-리그 역사상 단 두 명의 골키퍼 밖에 경험해보지 못해 K-리그 3연속 우승의 자부심 또한 그를 지탱해주고 있다.

축구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과 최악의 상황을 모두 경험했던 권찬수. 이제 그에게는 K-리그 스타로서 정상에 우뚝 서는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미를 더 돋보이게 하는 안개꽃처럼 노장 권찬수는 팀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인천 유나이티드의 우승을 위해 무슨 일이든 마다않고 해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그라운드를 떠나는 순간, 그의 얼굴에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이 드리워져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K-리그 명예기자 홍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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