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밥은 먹고 다니냐”…‘이춘재 사건’ 그 형사들에게 묻는다

입력 2019.12.31 (10:09) 수정 2019.12.3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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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밥 먹고 다닌' 이춘재, 30년 만에 자백
당시 형사들은 진실규명 비협조
'감정 논란' 국과수도 묵묵부답
진실 밝힐 기회, 얼마 남지 않아

"밥은 먹고 다니냐"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영화 마지막 부분에 범인을 쫓는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이 용의자인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하는 대사다. DNA 검사 결과 범인이 아닌 걸로 밝혀져 용의자를 놓아줘야 하는 상황에서 형사가 대뜸 밥을 언급하면서 관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이 영화를 찍은 봉준호 감독은 배우 송강호에게 촬영 이틀 전 "범인으로 의심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놓아줄 수 밖에 없는 용의자에게 형사가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할 것 같으냐"며 대사를 고민을 해 볼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대사는 배우 송강호가 형사 역에 몰입해 뱉어낸 대사라고 당시 제작진은 밝혔다.)

화제만큼이나 당시 이 대사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었다. 가장 설득력 있었던 건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밥이 넘어가느냐는 뜻의 비난이라는 해석이었다. 영화 속 대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직 잡히지 않은 현실 속 범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따라붙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며 살아가는지 궁금했던 범인은 처제 살인사건으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이춘재였다. 무기수 이춘재는 모범수가 될 정도로 성실한 교도소 생활을 했다. 나라에서 주는 밥을 잘 먹고 살고 있었던 셈이다.


DNA 들고 간 형사 앞에서 자백

자신이 최악의 장기미제사건의 진범이라는 사실을 30년 넘게 먼저 털어놓지 않았던 이춘재는 DNA 증거를 들고 찾아간 형사들 앞에서는 입을 열었다.

8차 사건 재심을 돕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이춘재는 범죄심리분석요원들과의 접견에서 직접 종이에 '살인 12+2, 강간 19, 미수 15'라고 적었다.

모방범죄로 범인이 잡힌 걸로 돼 있던 8차 사건도 자백하면서는 "모방범죄라고 돼 있는데 아닌 걸로 밝혀지면 경찰들이 곤란한 것 아니냐"면서 "곤란하면 이야기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범죄심리분석요원은 "그런 것은 상관없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춘재 씨가 한 것이 맞는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찰의 설득에 이춘재는 늦었지만 8차 사건을 포함해 범행 일체를 털어놨다. 이 씨가 뒤늦은 자백을 한 이유가 자포자기 심정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 씨가 진실을 말해달라는 경찰의 요청에 응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늦게나마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고, 8차 사건 범인으로 잡혀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 모 씨는 재심 절차를 밟고 있다.

범인 자백에도 진실규명 먼 길

그러나 아직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30여 년 전 사건을 수사했던 형사들이다. 당시 형사들은 8차 사건에 대해선 강압 수사 의혹을, 이춘재가 살해했다고 자백한 '실종 초등생'에 대해서는 부실 수사 의혹을 받고 있다.

초등생 사건 형사들은 사건이 있었던 1989년 당시 실종 5개월 만에 초등생의 소지품을 발견하고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가족들은 최근에서야 과거에 소지품이 발견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은 최근 수사에서 30년 전 경찰이 초등생의 시신 일부를 발견하고도 이를 은폐했다는 혐의까지 파악했다. 그러나 수사에 관여했던 핵심 관계자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아예 경찰 조사를 피하고 있다.

8차 사건 윤 씨는 경찰이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를 했고, 체포 이후 밤샘 조사와 폭행 등을 통한 자백 강요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사들은 경찰 조사에서는 일체의 강압 수사를 부인했고, 검찰 조사에서는 밤샘 조사 등 일부만 인정했다. 윤 씨가 주장하는 강압 수사의 수위와 형사들이 인정한 내용에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이제라도 진실 털어놔야

8차 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도 문제가 되고 있다. 당시 국과수는 8차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윤 씨 체모의 성분이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이는 윤 씨가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찰은 이 감정 결과에 오류가 있다고 밝혔고, 검찰은 조작됐다고 결론 내렸다. 검경 주장에 차이가 있지만, 감정 결과가 문제가 있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의견이다.

검경이 국과수 감정을 문제 삼고 있지만, 국과수는 한 번도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국과수가 사건 증거물에서 DNA를 찾아내 이춘재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인터뷰에 적극적이던 국과수는 자신들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는 입을 닫았다.

이춘재 사건 재수사가 시작된 지난 9월 중순부터 올해 마지막 날인 오늘(31일)까지 이 사건과 관련해 기자는 많은 기사를 썼다. 그 기사들에는 이춘재를 비판하는 댓글 못지 않게 당시 수사 관계자들을 비판하고 진실을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댓글이 달렸다.

이춘재 사건은 사건 발생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증인과 증거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범인인 이춘재조차도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느라 애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관련자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철저한 진실규명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앞둔 8차 사건의 재심이 시작된다면, 당시 형사들과 국과수 관계자 등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초등생 사건의 경찰 수사는 다음 달 중에는 마무리된다. 사실대로 털어놓을 기회도 많지 않은 셈이다. 이춘재 사건을 다룬 영화 속 명대사는 이제 그때 그 수사 관계자들을 향하고 있다.

"밥은 먹고 다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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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밥은 먹고 다니냐”…‘이춘재 사건’ 그 형사들에게 묻는다
    • 입력 2019-12-31 10:09:06
    • 수정2019-12-31 10:09:38
    취재후·사건후
'밥 먹고 다닌' 이춘재, 30년 만에 자백<br />당시 형사들은 진실규명 비협조<br />'감정 논란' 국과수도 묵묵부답<br />진실 밝힐 기회, 얼마 남지 않아
"밥은 먹고 다니냐"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영화 마지막 부분에 범인을 쫓는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이 용의자인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하는 대사다. DNA 검사 결과 범인이 아닌 걸로 밝혀져 용의자를 놓아줘야 하는 상황에서 형사가 대뜸 밥을 언급하면서 관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이 영화를 찍은 봉준호 감독은 배우 송강호에게 촬영 이틀 전 "범인으로 의심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놓아줄 수 밖에 없는 용의자에게 형사가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할 것 같으냐"며 대사를 고민을 해 볼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대사는 배우 송강호가 형사 역에 몰입해 뱉어낸 대사라고 당시 제작진은 밝혔다.)

화제만큼이나 당시 이 대사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었다. 가장 설득력 있었던 건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밥이 넘어가느냐는 뜻의 비난이라는 해석이었다. 영화 속 대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직 잡히지 않은 현실 속 범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따라붙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며 살아가는지 궁금했던 범인은 처제 살인사건으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이춘재였다. 무기수 이춘재는 모범수가 될 정도로 성실한 교도소 생활을 했다. 나라에서 주는 밥을 잘 먹고 살고 있었던 셈이다.


DNA 들고 간 형사 앞에서 자백

자신이 최악의 장기미제사건의 진범이라는 사실을 30년 넘게 먼저 털어놓지 않았던 이춘재는 DNA 증거를 들고 찾아간 형사들 앞에서는 입을 열었다.

8차 사건 재심을 돕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이춘재는 범죄심리분석요원들과의 접견에서 직접 종이에 '살인 12+2, 강간 19, 미수 15'라고 적었다.

모방범죄로 범인이 잡힌 걸로 돼 있던 8차 사건도 자백하면서는 "모방범죄라고 돼 있는데 아닌 걸로 밝혀지면 경찰들이 곤란한 것 아니냐"면서 "곤란하면 이야기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범죄심리분석요원은 "그런 것은 상관없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춘재 씨가 한 것이 맞는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찰의 설득에 이춘재는 늦었지만 8차 사건을 포함해 범행 일체를 털어놨다. 이 씨가 뒤늦은 자백을 한 이유가 자포자기 심정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 씨가 진실을 말해달라는 경찰의 요청에 응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늦게나마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고, 8차 사건 범인으로 잡혀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 모 씨는 재심 절차를 밟고 있다.

범인 자백에도 진실규명 먼 길

그러나 아직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30여 년 전 사건을 수사했던 형사들이다. 당시 형사들은 8차 사건에 대해선 강압 수사 의혹을, 이춘재가 살해했다고 자백한 '실종 초등생'에 대해서는 부실 수사 의혹을 받고 있다.

초등생 사건 형사들은 사건이 있었던 1989년 당시 실종 5개월 만에 초등생의 소지품을 발견하고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가족들은 최근에서야 과거에 소지품이 발견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은 최근 수사에서 30년 전 경찰이 초등생의 시신 일부를 발견하고도 이를 은폐했다는 혐의까지 파악했다. 그러나 수사에 관여했던 핵심 관계자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아예 경찰 조사를 피하고 있다.

8차 사건 윤 씨는 경찰이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를 했고, 체포 이후 밤샘 조사와 폭행 등을 통한 자백 강요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사들은 경찰 조사에서는 일체의 강압 수사를 부인했고, 검찰 조사에서는 밤샘 조사 등 일부만 인정했다. 윤 씨가 주장하는 강압 수사의 수위와 형사들이 인정한 내용에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이제라도 진실 털어놔야

8차 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도 문제가 되고 있다. 당시 국과수는 8차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윤 씨 체모의 성분이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이는 윤 씨가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찰은 이 감정 결과에 오류가 있다고 밝혔고, 검찰은 조작됐다고 결론 내렸다. 검경 주장에 차이가 있지만, 감정 결과가 문제가 있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의견이다.

검경이 국과수 감정을 문제 삼고 있지만, 국과수는 한 번도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국과수가 사건 증거물에서 DNA를 찾아내 이춘재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인터뷰에 적극적이던 국과수는 자신들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는 입을 닫았다.

이춘재 사건 재수사가 시작된 지난 9월 중순부터 올해 마지막 날인 오늘(31일)까지 이 사건과 관련해 기자는 많은 기사를 썼다. 그 기사들에는 이춘재를 비판하는 댓글 못지 않게 당시 수사 관계자들을 비판하고 진실을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댓글이 달렸다.

이춘재 사건은 사건 발생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증인과 증거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범인인 이춘재조차도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느라 애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관련자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철저한 진실규명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앞둔 8차 사건의 재심이 시작된다면, 당시 형사들과 국과수 관계자 등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초등생 사건의 경찰 수사는 다음 달 중에는 마무리된다. 사실대로 털어놓을 기회도 많지 않은 셈이다. 이춘재 사건을 다룬 영화 속 명대사는 이제 그때 그 수사 관계자들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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