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성폭력 피해 지원’ 해바라기센터는 왜 문을 닫나?

입력 2021.03.14 (07:00) 수정 2021.03.1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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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겨울, 길을 가던 초등학생이 5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바로 검거됐지만 피해자는 사건 이후 20시간 동안 경찰서와 상담소, 병원을 전전하며 피해 사실을 반복적으로 진술하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의료, 상담, 수사 지원을 하는 기관이 각각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일자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원스톱'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해바라기센터'입니다.

해바라기센터는 365일 24시간 상담, 의료, 법률, 수사지원을 한 번에 제공해 2차 피해를 막습니다. 현재 전국 39곳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 2번 발길 돌린 성폭력 피해자

그런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성폭력 피해자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지난 4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접수합니다. 그 직후 서울 중부 해바라기센터에 피해자를 받아줄 수 있는지 문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24시간 지원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야간 당직 의료진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어 인근에 있는 다른 센터도 피해자에 대한 응급 대응을 거부했습니다. 당시 센터 관계자는 경찰에 인력이 부족하고 본인들의 관할이 아니라며 당장 접수가 어렵다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피해자는 13km 떨어진 은평구의 병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 서울서만 2곳 폐쇄… '하겠다' 나서는 곳 없어

이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최근 서울 지역 해바라기센터의 운영난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서울에 있는 해바라기센터 6곳 중 1곳이 문을 닫았고, 또 1곳이 문을 닫을 예정입니다.

위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음으로 갔던 서울 중부 해바라기센터는 10일 서울시에 운영종료를 최종 통보했습니다. 이에 따라 인력을 새로 뽑지 않고 감축하다 보니 야간 의료 지원도 어려워진 상태입니다.

앞서 지난 2월엔 동대문구에 있는 서울 북부 해바라기센터가 문을 닫았습니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북부 센터를 대신할 새로운 의료 기관을 모집했지만, 지금까지 지원한 의료 기관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서울뿐 아닙니다. 경기도의 경우 2013년부터 한 병원에서 운영하던 해바라기센터가 7년여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2019년엔 전남의 한 해바라기센터가 문을 닫으며 가정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이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 고질적 인력난… "선의와 명분에 기대 운영"

병원들이 해바라기센터에 발을 빼는 이유는 책임이 큰 데 비해 운영에 따른 혜택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력난입니다.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지난달 문을 닫은 서울 북부 해바라기센터는 센터를 중단하는 이유로 '건물 공사'를 말해 왔는데, 취재해 보니 속내에는 인력난이 있었습니다.

북부 센터 관계자는 의료진 입장에서 해바라기센터 업무는 '업무 외적인 봉사활동' 처럼 여겨지며, 지금까지는 의료진에 아쉬운 부탁을 해 왔지만 최근에는 여러 이유로 힘들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직원들 처우도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가부 자료에 따르면 센터 종사자들의 초봉은 간호사와 심리치료사의 경우 2천 7백여만 원, 부소장은 3천3백만 원입니다. 비슷한 사회복지시설과 비교하면 처음엔 비슷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기 때문에 장기 근무엔 불리하게 돼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강원 지역의 한 센터 관계자는 "24시간 365일 운영에 따라 업무량과 강도가 높은 편인데 반해 급여는 낮다 보니, 직원들이 경력을 쌓은 뒤 다른 이직하는 경우가 많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해바라기센터가 운영 기관과 종사자의 선의와 피해자 보호라는 명분에 기대 운영되고 있다는 게 취재진이 만난 센터 관계자들의 토로입니다.

■ "부담 크고 혜택 없고"

조직 관리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여성가족부(법령 제정 등), 지자체(예산 교부 등), 경찰청(수사 지원) 등 국가 기관이 함께 관여하면서도 책임은 병원이 부담하는 구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서울 중부 해바라기센터를 운영하는 국립중앙의료원은 수년 동안 여성가족부에 제도 개선을 요청해 왔습니다. 센터의 조직 관리가 어렵고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적 책임이 모호하단 겁니다.

중앙의료원 관계자는 "사실상 운영 기관의 병원장이 해바라기 센터의 센터장 역할을 하며 개인 사업자처럼 운영되고 있다"며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 소재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어떤 공공 기관도 여성과 아동 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병원이 운영 중단을 결정했다면 그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별다른 혜택도 없습니다. 경북 지역의 한 센터 관계자는 "해바라기센터를 운영한다고 해서 병원이 받는 인센티브는 없다"며, "병원장이 의료 기관으로서 지역 사회에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센터 사업을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개별 병원의 의지에 기대고 있단 뜻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건복지부의 병원 평가에 가점을 주는 등의 방안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 여가부 "노력 중이나 코로나19 탓에 어려워"

이런 상황에서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뚜렷한 대안이나 방향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가부 관계자는 "사업 종료한 기관을 대신할 의료 기관을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며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 탓에 새롭게 운영을 맡겠다고 나서는 곳을 찾기 쉽지 않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해바라기센터 운영에 대한 중장기적 개선책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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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14 07:00:44
    • 수정2021-03-14 14:17:10
    취재후·사건후


2003년 겨울, 길을 가던 초등학생이 5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바로 검거됐지만 피해자는 사건 이후 20시간 동안 경찰서와 상담소, 병원을 전전하며 피해 사실을 반복적으로 진술하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의료, 상담, 수사 지원을 하는 기관이 각각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일자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원스톱'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해바라기센터'입니다.

해바라기센터는 365일 24시간 상담, 의료, 법률, 수사지원을 한 번에 제공해 2차 피해를 막습니다. 현재 전국 39곳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 2번 발길 돌린 성폭력 피해자

그런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성폭력 피해자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지난 4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접수합니다. 그 직후 서울 중부 해바라기센터에 피해자를 받아줄 수 있는지 문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24시간 지원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야간 당직 의료진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어 인근에 있는 다른 센터도 피해자에 대한 응급 대응을 거부했습니다. 당시 센터 관계자는 경찰에 인력이 부족하고 본인들의 관할이 아니라며 당장 접수가 어렵다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피해자는 13km 떨어진 은평구의 병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 서울서만 2곳 폐쇄… '하겠다' 나서는 곳 없어

이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최근 서울 지역 해바라기센터의 운영난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서울에 있는 해바라기센터 6곳 중 1곳이 문을 닫았고, 또 1곳이 문을 닫을 예정입니다.

위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음으로 갔던 서울 중부 해바라기센터는 10일 서울시에 운영종료를 최종 통보했습니다. 이에 따라 인력을 새로 뽑지 않고 감축하다 보니 야간 의료 지원도 어려워진 상태입니다.

앞서 지난 2월엔 동대문구에 있는 서울 북부 해바라기센터가 문을 닫았습니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북부 센터를 대신할 새로운 의료 기관을 모집했지만, 지금까지 지원한 의료 기관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서울뿐 아닙니다. 경기도의 경우 2013년부터 한 병원에서 운영하던 해바라기센터가 7년여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2019년엔 전남의 한 해바라기센터가 문을 닫으며 가정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이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 고질적 인력난… "선의와 명분에 기대 운영"

병원들이 해바라기센터에 발을 빼는 이유는 책임이 큰 데 비해 운영에 따른 혜택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력난입니다.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지난달 문을 닫은 서울 북부 해바라기센터는 센터를 중단하는 이유로 '건물 공사'를 말해 왔는데, 취재해 보니 속내에는 인력난이 있었습니다.

북부 센터 관계자는 의료진 입장에서 해바라기센터 업무는 '업무 외적인 봉사활동' 처럼 여겨지며, 지금까지는 의료진에 아쉬운 부탁을 해 왔지만 최근에는 여러 이유로 힘들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직원들 처우도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가부 자료에 따르면 센터 종사자들의 초봉은 간호사와 심리치료사의 경우 2천 7백여만 원, 부소장은 3천3백만 원입니다. 비슷한 사회복지시설과 비교하면 처음엔 비슷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기 때문에 장기 근무엔 불리하게 돼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강원 지역의 한 센터 관계자는 "24시간 365일 운영에 따라 업무량과 강도가 높은 편인데 반해 급여는 낮다 보니, 직원들이 경력을 쌓은 뒤 다른 이직하는 경우가 많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해바라기센터가 운영 기관과 종사자의 선의와 피해자 보호라는 명분에 기대 운영되고 있다는 게 취재진이 만난 센터 관계자들의 토로입니다.

■ "부담 크고 혜택 없고"

조직 관리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여성가족부(법령 제정 등), 지자체(예산 교부 등), 경찰청(수사 지원) 등 국가 기관이 함께 관여하면서도 책임은 병원이 부담하는 구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서울 중부 해바라기센터를 운영하는 국립중앙의료원은 수년 동안 여성가족부에 제도 개선을 요청해 왔습니다. 센터의 조직 관리가 어렵고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적 책임이 모호하단 겁니다.

중앙의료원 관계자는 "사실상 운영 기관의 병원장이 해바라기 센터의 센터장 역할을 하며 개인 사업자처럼 운영되고 있다"며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 소재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어떤 공공 기관도 여성과 아동 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병원이 운영 중단을 결정했다면 그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별다른 혜택도 없습니다. 경북 지역의 한 센터 관계자는 "해바라기센터를 운영한다고 해서 병원이 받는 인센티브는 없다"며, "병원장이 의료 기관으로서 지역 사회에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센터 사업을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개별 병원의 의지에 기대고 있단 뜻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건복지부의 병원 평가에 가점을 주는 등의 방안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 여가부 "노력 중이나 코로나19 탓에 어려워"

이런 상황에서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뚜렷한 대안이나 방향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가부 관계자는 "사업 종료한 기관을 대신할 의료 기관을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며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 탓에 새롭게 운영을 맡겠다고 나서는 곳을 찾기 쉽지 않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해바라기센터 운영에 대한 중장기적 개선책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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