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찾아 발품 파는 환자 가족들 “혈액 구합니다”

입력 2021.10.07 (07: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지정 헌혈 호소 글인터넷에 올라온 지정 헌혈 호소 글

■ "제발 좀 도와주세요…혈액 구합니다."

"언니가 난소암 3기로 수술해서 항암 1차까지 했는데 갑자기 폐렴이 와서 중환자실에 있어요. 투석을 해야 하는데 지정 헌혈이 필요합니다."

"조카가 조혈모세포를 이식받고 회복하던 중 갑자기 혈소판이 다 빠져나가고 있어요. 염치 불고하고 부탁 좀 드릴게요. 돌도 안 된 아가가 너무 안쓰럽습니다."

한 줄 글만으로 절박함이 묻어나는 이 호소는 온라인에서 갈무리한 것들입니다. 환자인 자기 가족을 콕 찍어 '지정 헌혈'해달라는 부탁인데 "어느 병원에 있는, 환자 번호 123에게, RH+ A형 헌혈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식입니다.

막내 아들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는 어머니도 온라인에서 호소했습니다. 사정을 물었더니, 안 그래도 귀한 농축 혈소판인데 최근 보유량은 더 바닥이라, 병원에서 지정 헌혈을 찾으라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주변 아는 사람이면 일단 붙들고 부탁했고, 그러고도 부족해 SNS로 막내 아들에게 줄 혈액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이가 아파 속이 무너지는데, 피까지 구하러 다니는 게 정신적으로 괴로웠다"고 어머니는 고백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해 고마운 네 분의 혈액을 막내 아들에게 수혈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환자 가족이 직접 발품을 팔아 혈액을 구해야 하는 사정, 그 뒤엔 '헌혈 절벽'이 있습니다.

텅 빈 혈액 보관 창고텅 빈 혈액 보관 창고

■ '헌혈 절벽'에 텅 빈 혈액 창고

혈액을 누구에게 줄 건지 처음부터 정하는 지정 헌혈은 원래 '희귀 혈핵형'을 주고받기 위해 생긴 제도이나, 지금은 급한 사람들이 자선을 구하는 창구처럼 쓰입니다. 혈액형 따질 것 없이 혈액 한 팩, 한 팩이 귀해진 탓입니다.

최근 국내 혈액 보유량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쓰이는 혈액은 5천 팩가량입니다. 이걸 닷새 치는 늘 갖고 있어야, 비상 상황을 맞닥뜨려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예정된 수술에도 넉넉히 혈액을 댈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탓에 헌혈이 줄었다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성인 한 명이 헌혈하면 혈액 300~400 ml 1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루 5천 팩이 쓰이니 이걸 다시 채워두려면 5천 명이 헌혈해야겠지요. 그런데 지난 일주일 헌혈자는 4천 명 수준이었습니다.

곳간이 넉넉할 새 없는 겁니다. 한때 2.9일분까지 떨어진 혈액 보유량은 최근 간신히 사나흘 분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적정 보유량인 닷새 분을 밑돌고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지난달 닷새 분을 채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위기 뒤 급증한 지정 헌혈코로나19 위기 뒤 급증한 지정 헌혈

■ 환자 가족 직접 발품 '지정 헌혈' 급증

대신 지정 헌혈은 급증했습니다. 올해 들어 9월까지 전국에서 90,475건을 했는데, 감염병 유행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 24,511건과 비교하면 무려 3.7배 늘었습니다. 큰 수술을 앞뒀거나 지속적으로 혈소판 수혈이 필요한 백혈병 환자 가족들이 직접 혈액을 구하는 경우가 그만큼 많았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한적십자사는 지정 헌혈이 많아지는 걸 매우 걱정합니다. 혈액 공급의 짐을 환자가 지도록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피까지 직접 구하라니"

앞서 소개한 어머니의 울분과 결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대한적십자사는 지금의 혈액 부족난은 일반적인 헌혈로 해소하는 게 맞는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 "코로나19 혈액 전파? 세계적으로 사례 없고 가능성 매우 희박"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결국 코로나19 탓입니다. 전 세계에서 유행하는 감염병 위기에 헌혈 기피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보면 걱정을 지울 수 있습니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중증도까지 진행된 코로나19 확진자라면 드물게 혈액 안으로 바이러스가 스며들 순 있으나, 이런 경우 이 중증 환자가 헌혈자가 될 리 없다"며 "만에 하나 확진자 혈액을 수혈했다고 해도 감염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같은 호흡기 바이러스인 메르스와 사스도 수혈로 감염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로나19 역시 혈액 전파는 전 세계적으로 보고된 게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에 쓰이는 도구는 모두 무균처리된 일회용인 만큼 감염 우려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혈액 찾아 발품 파는 환자 가족들 “혈액 구합니다”
    • 입력 2021-10-07 07:00:29
    취재K
인터넷에 올라온 지정 헌혈 호소 글
■ "제발 좀 도와주세요…혈액 구합니다."

"언니가 난소암 3기로 수술해서 항암 1차까지 했는데 갑자기 폐렴이 와서 중환자실에 있어요. 투석을 해야 하는데 지정 헌혈이 필요합니다."

"조카가 조혈모세포를 이식받고 회복하던 중 갑자기 혈소판이 다 빠져나가고 있어요. 염치 불고하고 부탁 좀 드릴게요. 돌도 안 된 아가가 너무 안쓰럽습니다."

한 줄 글만으로 절박함이 묻어나는 이 호소는 온라인에서 갈무리한 것들입니다. 환자인 자기 가족을 콕 찍어 '지정 헌혈'해달라는 부탁인데 "어느 병원에 있는, 환자 번호 123에게, RH+ A형 헌혈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식입니다.

막내 아들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는 어머니도 온라인에서 호소했습니다. 사정을 물었더니, 안 그래도 귀한 농축 혈소판인데 최근 보유량은 더 바닥이라, 병원에서 지정 헌혈을 찾으라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주변 아는 사람이면 일단 붙들고 부탁했고, 그러고도 부족해 SNS로 막내 아들에게 줄 혈액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이가 아파 속이 무너지는데, 피까지 구하러 다니는 게 정신적으로 괴로웠다"고 어머니는 고백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해 고마운 네 분의 혈액을 막내 아들에게 수혈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환자 가족이 직접 발품을 팔아 혈액을 구해야 하는 사정, 그 뒤엔 '헌혈 절벽'이 있습니다.

텅 빈 혈액 보관 창고
■ '헌혈 절벽'에 텅 빈 혈액 창고

혈액을 누구에게 줄 건지 처음부터 정하는 지정 헌혈은 원래 '희귀 혈핵형'을 주고받기 위해 생긴 제도이나, 지금은 급한 사람들이 자선을 구하는 창구처럼 쓰입니다. 혈액형 따질 것 없이 혈액 한 팩, 한 팩이 귀해진 탓입니다.

최근 국내 혈액 보유량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쓰이는 혈액은 5천 팩가량입니다. 이걸 닷새 치는 늘 갖고 있어야, 비상 상황을 맞닥뜨려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예정된 수술에도 넉넉히 혈액을 댈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탓에 헌혈이 줄었다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성인 한 명이 헌혈하면 혈액 300~400 ml 1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루 5천 팩이 쓰이니 이걸 다시 채워두려면 5천 명이 헌혈해야겠지요. 그런데 지난 일주일 헌혈자는 4천 명 수준이었습니다.

곳간이 넉넉할 새 없는 겁니다. 한때 2.9일분까지 떨어진 혈액 보유량은 최근 간신히 사나흘 분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적정 보유량인 닷새 분을 밑돌고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지난달 닷새 분을 채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위기 뒤 급증한 지정 헌혈
■ 환자 가족 직접 발품 '지정 헌혈' 급증

대신 지정 헌혈은 급증했습니다. 올해 들어 9월까지 전국에서 90,475건을 했는데, 감염병 유행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 24,511건과 비교하면 무려 3.7배 늘었습니다. 큰 수술을 앞뒀거나 지속적으로 혈소판 수혈이 필요한 백혈병 환자 가족들이 직접 혈액을 구하는 경우가 그만큼 많았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한적십자사는 지정 헌혈이 많아지는 걸 매우 걱정합니다. 혈액 공급의 짐을 환자가 지도록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피까지 직접 구하라니"

앞서 소개한 어머니의 울분과 결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대한적십자사는 지금의 혈액 부족난은 일반적인 헌혈로 해소하는 게 맞는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 "코로나19 혈액 전파? 세계적으로 사례 없고 가능성 매우 희박"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결국 코로나19 탓입니다. 전 세계에서 유행하는 감염병 위기에 헌혈 기피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보면 걱정을 지울 수 있습니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중증도까지 진행된 코로나19 확진자라면 드물게 혈액 안으로 바이러스가 스며들 순 있으나, 이런 경우 이 중증 환자가 헌혈자가 될 리 없다"며 "만에 하나 확진자 혈액을 수혈했다고 해도 감염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같은 호흡기 바이러스인 메르스와 사스도 수혈로 감염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로나19 역시 혈액 전파는 전 세계적으로 보고된 게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에 쓰이는 도구는 모두 무균처리된 일회용인 만큼 감염 우려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