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18 암매장 진실 첫 확인…옛 광주교도소 유골서 5.18 행불자 DNA와 일치

입력 2022.09.25 (17:32) 수정 2022.09.2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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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묘지에서 신원미상 유골이 발견된 모습.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묘지에서 신원미상 유골이 발견된 모습.

옛 광주교도소 발견 유골…5.18 행불자 DNA와 일치

지난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묘지에서 발견된 유골 1구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된 행방불명자와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42년 동안 한번도 확인되지 않았던, 5.18 암매장 의혹과 행방불명자의 진실이 처음으로 확인된 겁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관계자는 260여 구의 유골 가운데 판정이 가능한 160여 구에서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행방불명자 가족의 DNA와 대조한 결과, 1구의 시신이 행불자와 일치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또 2개 유골도 유력한 것으로 보고 추가 확인 중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조사위는 160여 구 가운데 현재 60여 구가 DNA 대조작업을 마쳤고, 추가로 백여 구에 대한 대조작업이 진행돼야 최종 확인된다고 밝혔습니다.

■ 42년 찾아 헤맨 5.18 암매장 사실로 드러나

5.18 당시 광주교도소(1971~2015년)는 광주광역시 문흥동에 있었습니다. 2015년 삼각동으로 이전하면서 '옛' 광주교도소가 됐습니다. 5.18 사적지인 광주교도소의 옛 터 일부는 법무부가 '솔로몬 로파크'를 조성 중인데, 2019년 12월 19일 공사 중에 무연고자 묘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다수의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땅 속에 묻힌 상자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40여 구, 그 흙더미 위에서 40여 구가 추가로 발견된 겁니다. 80여 구로 추정된 유골은 분류작업을 거치고보니 모두 2백60여 구로 늘게 됐습니다. 아무렇게나 쌓아져 있던 유골을 개개인별로 식별할 수 있는 대퇴부 뼈를 기준으로 분류해보니 인원 수가 크게 늘어난 겁니다.

유골에서 DNA를 채취하고, 그동안 광주광역시가 보관하고 있던 5.18 행방불명 신고자 171명의 가족 377명 혈액에서 확보한 유전자와 대조작업이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2년 9개월여 만에 행방불명자와 일치하는 DNA가 확인된 겁니다. 그동안 증언과 목격담, 10여 차례 발굴조사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5.18 암매장의 진실이 42년만 풀리게 된 겁니다.

광주광역시 문흥동에 위치한 옛 광주교도소 전경.광주광역시 문흥동에 위치한 옛 광주교도소 전경.

■'암매장 의심' 지목됐던 옛 광주교도소…결국 진실 규명

5.18 암매장과 행방불명자 문제는 5.18 직후부터 이어졌습니다. <오월의 노래2> 중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트럭에 싣고 어딜 갔니'가 바로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겁니다. 통곡하듯 묻는 노랫말처럼. 그렇게 42년 동안 광주시민들은 암매장의 진실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암매장 의심지로 지목받아온 곳이 바로 교도소입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는 주요 보안시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해 있어서 계엄군의 '광주봉쇄작전'의 주요지점이었습니다.

군 기록에서도 교도소를 지나던 시위대 차량에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는 내용이 확인됩니다. 또 3공수여단이 광주 시내에서 시위하던 대학생과 시민들을 체포해 교도소를 끌고 오는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는 주장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교도소 주변에서 희생자가 많았던 시기는 1980년 5월 21일 오후부터 24일 정오 사이로 3공수부대가 교도소를 맡았던 때입니다.

5.18 직후 신군부가 발표한 자료에만 교도소 안팎의 사망자를 28명(광주지역 시위사태 분석, 보안처, 1980)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수습된 시신은 11구에 불과합니다.

광주지역 시위사태 분석, 보안처, 1980광주지역 시위사태 분석, 보안처, 1980

5.18 조사위는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기존 군기록에 나온 5건을 포함해 최소 13차례의 민간인·차량 피격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교도소 인근 희생자 중 시신 수습이 안 된 수가 41구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군기록보다 훨씬 많은 수가 교도소 안팎에서 희생됐다는 겁니다.

이처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제외하곤 교도소 안팎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점, 그리고 민간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다는 점, 시신이 수습된 수와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암매장 의심지역으로 지목받아왔습니다.

여기에 직접 암매장에 참여했다는 군인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의혹은 더 커졌습니다. 5.18진상조사위원회 출범 이전에 암매장과 관련된 제보는 2017년 이전 59건, 전두환 회고록 논란 이후 13건 등 모두 72건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암매장 장소로 교도소를 지목한 게 7건인데, 직접 매장에 참여했다는 군인과 이를 목격했다는 교도대원들의 진술이 구체적이었습니다.

"호남고속도로 인근에 9구를 묻었다(3공수 본부대 군인)", "교도소 앞 원예공판장 옆에 3구를 묻었다(3공수 소령)", "교도소 구내 관사 앞 소나무 숲에 5구 매장(3공수 군인)" 등인데 제보한 군인들은 직접 약도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 2017년 암매장 발굴에선 성과 없어

앞서 전해드린 것처럼 이번에 확인된 행방불명자의 유골은 5.18 희생자를 찾기 위한 작업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옛 교도소 터에 다른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겁니다.

5.18 희생자를 찾기 위한 암매장지 조사는 그보다 2년전 이뤄졌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제보를 바탕으로 실시한 2017년 11월 교도소 내 조사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네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배관공사나 쓰레기 매립 등으로 지형이 변했다는 점만 확인하고, 암매장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2017년 11월 실시한 5.18 기념재단의 옛 광주교도소 암매장지 발굴 모습.2017년 11월 실시한 5.18 기념재단의 옛 광주교도소 암매장지 발굴 모습.

하지만 이후 출범한 5.18조사위는 1,800명이 넘는 계엄군을 조사한 결과, 암매장은 사실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허연식/5.18진상규명위 조사2과장(2021년 12월)
"(광주에) 보병 복장으로 (5.18 직후)다시 내려와서 시체의 매장 장소, 숫자를 정확하게 지정을 해줬고, 그 현장에 전투교육사령부 소령으로 보이는 사람이 현장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조사위는 암매장 제보 가운데 정밀조사를 통해 추가로 4~5곳에 대해 발굴조사를 벌일 예정입니다.

■ 42년 동안 왜 안 나왔나?…집요했던 신군부의 은폐

사람들이 사라졌고, 시신을 묻었다는 사람이 있고, 장소도 특정이 되는데 42년 동안 단 한 구의 시신도 확인되지 않았을까요?

KBS광주 취재팀도 암매장을 추적해오면서 암매장만큼이나 이 사실을 숨기려는 신군부의 은폐 노력도 집요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2018년 5월 16일 보도한 '[단독]'암매장 보고' 문건 확인…실제 수색 결과도 보고'에서는 5.18 당시 호남지역 계엄상황을 지휘했던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의 업무수첩, 그리고 출동부대의 보고 내용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5·18 암매장 보고’ 문건 첫 확인…실제 수색 결과도 보고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650530

김기석 부사령관의 메모에는 1980년 5월 31일 '작전에 참여한 공수여단장에게 사살한 폭도의 가매장 장소를 보고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한 군법회의 요청사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틀 뒤 20사단이 암매장 수색 결과를 보고합니다. 1980년 6월 2일 전교사 작전일지를 보면 20사단 수색대가 암매장 시신 한 구를 발견했지만, 부패가 심해 더 이상 파지 않고 그대로 묻었다고 보고합니다. 암매장에 대해 군 수뇌부가 알고 있었고, 5.18 직후 시신 수습에 나섰다는 게 확인된 겁니다.

5.18 이후 복귀했던 공수부대원들은 공수부대 군복 대신 보병 복장을 하고 1980년 6월초 광주에 다시 내려옵니다. 임시로 매장한 시신을 수습해 처리하기 위해섭니다. 어느 정도 규모이고, 수습한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군부의 암매장 시신 수습은 5.18 이후 수년 후까지 이어졌다는 게 5.18 조사위의 판단입니다. 암매장에 직접 참여했다는 군인 3명은 조사위원회 조사에서 1982년부터 1985년 사이 두세 차례에 걸쳐 암매장 조사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암매장 장소를 특정한 세부좌표로 보고했다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군에서 쓰는 이른바 '8계단' 좌표로 보고했다는 건데, 가로·세로 네 자리씩 모두 8개 숫자로 10미터 단위로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정교한 좌표입니다.

결국, 5.18 직후에는 시신수습반을 운영하고, 이후에도 암매장 사후처리를 위해 은밀하면서 치밀하게 활동해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암매장 조사·행불자찾기 이어져야

5.18민주화운동 관련 행방불명자에 대한 첫 공식접수가 이뤄진 건 1990년입니다. 당시 147명에 대한 행방불명 신고가 있었지만, 단 39명만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추가 접수와 심사를 통해 공식인정된 행불자는 78명(2022년 8월 현재)입니다.

하지만 2백명 가까이는 목격자나 증언,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행불자로 인정됐거나 신고된 전체 242명 가운데 무명열사묘 등에서 신원이 확인된 건 단 6명뿐입니다.

때문에 이번 옛 교도소에서 발견된 유골에서 행불자 신원이 확인된만큼 '불인정 행불자'에 대한 전수조사와 이들 가족들에 대한 유전자 정보 확보도 필요해 보입니다. 온전한 진실찾기를 위해서 어쩌면 첫 행불자 유골 확인은 시작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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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 5.18 암매장 진실 첫 확인…옛 광주교도소 유골서 5.18 행불자 DNA와 일치
    • 입력 2022-09-25 17:32:50
    • 수정2022-09-26 13:17:49
    취재K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묘지에서 신원미상 유골이 발견된 모습.

옛 광주교도소 발견 유골…5.18 행불자 DNA와 일치

지난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묘지에서 발견된 유골 1구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된 행방불명자와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42년 동안 한번도 확인되지 않았던, 5.18 암매장 의혹과 행방불명자의 진실이 처음으로 확인된 겁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관계자는 260여 구의 유골 가운데 판정이 가능한 160여 구에서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행방불명자 가족의 DNA와 대조한 결과, 1구의 시신이 행불자와 일치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또 2개 유골도 유력한 것으로 보고 추가 확인 중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조사위는 160여 구 가운데 현재 60여 구가 DNA 대조작업을 마쳤고, 추가로 백여 구에 대한 대조작업이 진행돼야 최종 확인된다고 밝혔습니다.

■ 42년 찾아 헤맨 5.18 암매장 사실로 드러나

5.18 당시 광주교도소(1971~2015년)는 광주광역시 문흥동에 있었습니다. 2015년 삼각동으로 이전하면서 '옛' 광주교도소가 됐습니다. 5.18 사적지인 광주교도소의 옛 터 일부는 법무부가 '솔로몬 로파크'를 조성 중인데, 2019년 12월 19일 공사 중에 무연고자 묘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다수의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땅 속에 묻힌 상자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40여 구, 그 흙더미 위에서 40여 구가 추가로 발견된 겁니다. 80여 구로 추정된 유골은 분류작업을 거치고보니 모두 2백60여 구로 늘게 됐습니다. 아무렇게나 쌓아져 있던 유골을 개개인별로 식별할 수 있는 대퇴부 뼈를 기준으로 분류해보니 인원 수가 크게 늘어난 겁니다.

유골에서 DNA를 채취하고, 그동안 광주광역시가 보관하고 있던 5.18 행방불명 신고자 171명의 가족 377명 혈액에서 확보한 유전자와 대조작업이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2년 9개월여 만에 행방불명자와 일치하는 DNA가 확인된 겁니다. 그동안 증언과 목격담, 10여 차례 발굴조사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5.18 암매장의 진실이 42년만 풀리게 된 겁니다.

광주광역시 문흥동에 위치한 옛 광주교도소 전경.
■'암매장 의심' 지목됐던 옛 광주교도소…결국 진실 규명

5.18 암매장과 행방불명자 문제는 5.18 직후부터 이어졌습니다. <오월의 노래2> 중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트럭에 싣고 어딜 갔니'가 바로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겁니다. 통곡하듯 묻는 노랫말처럼. 그렇게 42년 동안 광주시민들은 암매장의 진실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암매장 의심지로 지목받아온 곳이 바로 교도소입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는 주요 보안시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해 있어서 계엄군의 '광주봉쇄작전'의 주요지점이었습니다.

군 기록에서도 교도소를 지나던 시위대 차량에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는 내용이 확인됩니다. 또 3공수여단이 광주 시내에서 시위하던 대학생과 시민들을 체포해 교도소를 끌고 오는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는 주장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교도소 주변에서 희생자가 많았던 시기는 1980년 5월 21일 오후부터 24일 정오 사이로 3공수부대가 교도소를 맡았던 때입니다.

5.18 직후 신군부가 발표한 자료에만 교도소 안팎의 사망자를 28명(광주지역 시위사태 분석, 보안처, 1980)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수습된 시신은 11구에 불과합니다.

광주지역 시위사태 분석, 보안처, 1980
5.18 조사위는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기존 군기록에 나온 5건을 포함해 최소 13차례의 민간인·차량 피격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교도소 인근 희생자 중 시신 수습이 안 된 수가 41구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군기록보다 훨씬 많은 수가 교도소 안팎에서 희생됐다는 겁니다.

이처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제외하곤 교도소 안팎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점, 그리고 민간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다는 점, 시신이 수습된 수와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암매장 의심지역으로 지목받아왔습니다.

여기에 직접 암매장에 참여했다는 군인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의혹은 더 커졌습니다. 5.18진상조사위원회 출범 이전에 암매장과 관련된 제보는 2017년 이전 59건, 전두환 회고록 논란 이후 13건 등 모두 72건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암매장 장소로 교도소를 지목한 게 7건인데, 직접 매장에 참여했다는 군인과 이를 목격했다는 교도대원들의 진술이 구체적이었습니다.

"호남고속도로 인근에 9구를 묻었다(3공수 본부대 군인)", "교도소 앞 원예공판장 옆에 3구를 묻었다(3공수 소령)", "교도소 구내 관사 앞 소나무 숲에 5구 매장(3공수 군인)" 등인데 제보한 군인들은 직접 약도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 2017년 암매장 발굴에선 성과 없어

앞서 전해드린 것처럼 이번에 확인된 행방불명자의 유골은 5.18 희생자를 찾기 위한 작업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옛 교도소 터에 다른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겁니다.

5.18 희생자를 찾기 위한 암매장지 조사는 그보다 2년전 이뤄졌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제보를 바탕으로 실시한 2017년 11월 교도소 내 조사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네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배관공사나 쓰레기 매립 등으로 지형이 변했다는 점만 확인하고, 암매장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2017년 11월 실시한 5.18 기념재단의 옛 광주교도소 암매장지 발굴 모습.
하지만 이후 출범한 5.18조사위는 1,800명이 넘는 계엄군을 조사한 결과, 암매장은 사실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허연식/5.18진상규명위 조사2과장(2021년 12월)
"(광주에) 보병 복장으로 (5.18 직후)다시 내려와서 시체의 매장 장소, 숫자를 정확하게 지정을 해줬고, 그 현장에 전투교육사령부 소령으로 보이는 사람이 현장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조사위는 암매장 제보 가운데 정밀조사를 통해 추가로 4~5곳에 대해 발굴조사를 벌일 예정입니다.

■ 42년 동안 왜 안 나왔나?…집요했던 신군부의 은폐

사람들이 사라졌고, 시신을 묻었다는 사람이 있고, 장소도 특정이 되는데 42년 동안 단 한 구의 시신도 확인되지 않았을까요?

KBS광주 취재팀도 암매장을 추적해오면서 암매장만큼이나 이 사실을 숨기려는 신군부의 은폐 노력도 집요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2018년 5월 16일 보도한 '[단독]'암매장 보고' 문건 확인…실제 수색 결과도 보고'에서는 5.18 당시 호남지역 계엄상황을 지휘했던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의 업무수첩, 그리고 출동부대의 보고 내용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5·18 암매장 보고’ 문건 첫 확인…실제 수색 결과도 보고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650530

김기석 부사령관의 메모에는 1980년 5월 31일 '작전에 참여한 공수여단장에게 사살한 폭도의 가매장 장소를 보고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한 군법회의 요청사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틀 뒤 20사단이 암매장 수색 결과를 보고합니다. 1980년 6월 2일 전교사 작전일지를 보면 20사단 수색대가 암매장 시신 한 구를 발견했지만, 부패가 심해 더 이상 파지 않고 그대로 묻었다고 보고합니다. 암매장에 대해 군 수뇌부가 알고 있었고, 5.18 직후 시신 수습에 나섰다는 게 확인된 겁니다.

5.18 이후 복귀했던 공수부대원들은 공수부대 군복 대신 보병 복장을 하고 1980년 6월초 광주에 다시 내려옵니다. 임시로 매장한 시신을 수습해 처리하기 위해섭니다. 어느 정도 규모이고, 수습한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군부의 암매장 시신 수습은 5.18 이후 수년 후까지 이어졌다는 게 5.18 조사위의 판단입니다. 암매장에 직접 참여했다는 군인 3명은 조사위원회 조사에서 1982년부터 1985년 사이 두세 차례에 걸쳐 암매장 조사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암매장 장소를 특정한 세부좌표로 보고했다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군에서 쓰는 이른바 '8계단' 좌표로 보고했다는 건데, 가로·세로 네 자리씩 모두 8개 숫자로 10미터 단위로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정교한 좌표입니다.

결국, 5.18 직후에는 시신수습반을 운영하고, 이후에도 암매장 사후처리를 위해 은밀하면서 치밀하게 활동해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암매장 조사·행불자찾기 이어져야

5.18민주화운동 관련 행방불명자에 대한 첫 공식접수가 이뤄진 건 1990년입니다. 당시 147명에 대한 행방불명 신고가 있었지만, 단 39명만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추가 접수와 심사를 통해 공식인정된 행불자는 78명(2022년 8월 현재)입니다.

하지만 2백명 가까이는 목격자나 증언,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행불자로 인정됐거나 신고된 전체 242명 가운데 무명열사묘 등에서 신원이 확인된 건 단 6명뿐입니다.

때문에 이번 옛 교도소에서 발견된 유골에서 행불자 신원이 확인된만큼 '불인정 행불자'에 대한 전수조사와 이들 가족들에 대한 유전자 정보 확보도 필요해 보입니다. 온전한 진실찾기를 위해서 어쩌면 첫 행불자 유골 확인은 시작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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