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타는 난민선…그 안에도 폭력·차별 [세계엔]

입력 2023.06.24 (16:00) 수정 2023.06.2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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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선 실종자 아카시 굴자르(파키스탄)의 어머니 타슬렘 비비가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AFP)난민선 실종자 아카시 굴자르(파키스탄)의 어머니 타슬렘 비비가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AFP)

이제 스무 살, 아카시 굴자르(Akash Gulzar)는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반드리 마을에 살던 청년입니다.

카슈미르는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 끊임없이 무력 분쟁이 이어지는 곳이죠. 그의 세세한 일상을 모르더라도, 이제 막 삶을 개척하는 스무 살 청년에게 기회의 땅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달 중순 굴자르는 마을 사람들 27명과 함께 아프리카 리비아까지 가서 한 어선에 올랐습니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는 난민선이었습니다. 배에 오를 즈음 굴자르는 어머니 타슬렘 비비(48살) 씨에게 전화해 "날씨가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망설이긴 했지만, 승선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리비아를 떠난 배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해안에서 불과 75k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한 14일(현지 시각) 영원히 침몰했습니다.

정확한 탑승 인원도 알 수 없습니다. 배의 규모상 400~750명가량 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 구조된 사람은 겨우 104명. 그 가운데 굴자르는 없습니다. 생존 골든타임은 지난 지 오래고 망망대해에서 수습된 시신은 82구뿐입니다. 나쁜 날씨에도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아들처럼, 마을에 남겨진 어머니 비비에게도 별다른 선택권이 없습니다. 비비 씨는 아들의 주검이라도 찾기 위해 자신의 DNA를 채취했습니다.

14일(현지 시각) 그리스 앞바다에서 침몰한 난민선이 가라앉기 전 모습.14일(현지 시각) 그리스 앞바다에서 침몰한 난민선이 가라앉기 전 모습.

"배에 탄 제 친척은 '마피아'같은 범죄 조직에 노출됐다는 것 같았어요. 구명조끼도 입지 못했다고 했어요."

- 파키스탄인 실종자 가족

굴자르는 왜 구조되지 못했을까. 이 짧은 질문에 대답은 너무 많이 딸려옵니다.

배에는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굴자르같은 파키스탄인이 2백 명~4백 명으로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생존자 104명 중 파키스탄인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영국 가디언은 18일 사고 생존자들이 해안경비대에 증언한 진술서를 보도했습니다. 사고 당시 파키스탄인들이 생존 가능성이 낮은 배의 갑판 아래층에 몰려 있어서 많이 구조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물을 찾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파키스탄인을 학대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똑같이 목숨을 걸고 난민선에 오른 사람들끼리 차별과 폭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배에 탄 모든 여성이 숨졌습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익사했다고요. 믿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 안와르 바크리 (그리스 시리아인 협회 사무총장)

배 안에서는 성별·나이에 따른 차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사실상 짐칸에 가뒀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실제로 생존자 104명은 모두 성인 남성입니다.

최근 약 10년 동안 지중해를 건너다 숨진 사람은 2만 7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배가 침몰하는 등 불의의 사고로 숨진 사람들도 있지만, 선내 폭력, 열악한 항해 환경에 노출돼 비인도적인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굴자르가 타고 있던 난민선 안에서도 사고가 나기 전 이미 6명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 안에 마실 물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앞바다 난민선 침몰 사고의 생존자가 가족과 재회하며 울고 있다.그리스 앞바다 난민선 침몰 사고의 생존자가 가족과 재회하며 울고 있다.

그럼에도 '차라리 난민'이 되는 이유는 뭘까. 이 대답은 너무 간결해서 오히려 잔인하게 들립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들어 정치적 망명보다는 '가난' 때문에 난민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제난이 심각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국가에서 난민이 늘어나는 이유입니다. 가난의 구렁에서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은 차라리 목숨을 걸더라도 지중해 심연을 건넙니다.

그런데 목숨을 건 도박에도 '판돈'이 필요합니다. 난민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없는 돈을 어떻게든 모아 '브로커'에게 건네야 합니다. 이번 사고 난민선 탑승자들도 리비아 브로커에게 한 사람당 한화로 5백만 원가량을 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태우면 정확히 그만큼 돈을 더 버는 브로커들에게 안전은 고려 대상이 아닐 겁니다. 파키스탄 당국은 뒤늦게 이번 사고와 연관된 밀입국업자 29명을 체포했습니다.

18일 그리스 아테네 인근 피레아스 항구에서 시위대가 유럽연합(EU)과 그리스의 이주민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18일 그리스 아테네 인근 피레아스 항구에서 시위대가 유럽연합(EU)과 그리스의 이주민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

'브로커'가 모두 없어지면 지중해에서 난민선이 사라질까요. 2016년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정착한 한 난민은 "누구도 난민의 이주를 멈출 수 없다. 그들은 일하고, 가족을 돕는 꿈을 꿨을 뿐"(BBC)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들어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 유럽 국가들은 '반 이민 정책'을 강화하는 추세입니다. 이들 국가는 난민들의 첫 목적지가 되는 곳입니다. 특히 그리스는 이번 사고에서 늑장 대응을 해 피해를 키웠다는 의혹도 제기됩니다. 유럽이 난민들에게 빗장을 잠글수록, 난민들은 더 멀고 더 위험한 바닷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와 이탈리아도 난민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유럽연합(EU) 정책상 난민들은 처음 도착한 국가에서 망명 신청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만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EU 국가들은 난민 수용을 두고 갈등을 지속해 왔습니다.

수년의 진통 끝에 EU는 이달 초 대안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U 국경에 도착한 난민 신청자를 회원국들이 나눠서 받아들이거나, 난민 한 사람당 2만 유로(약 2천8백만 원)를 EU 대책기금에 보내는 내용을 담은 잠정 합의안을 도출한 겁니다. '큰 의미 있는 진전', '역사적인 결정'이라는 자평이 EU 안에서 나오는 가운데, 굴자르 같은 비극은 이제 멈출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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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숨 걸고 타는 난민선…그 안에도 폭력·차별 [세계엔]
    • 입력 2023-06-24 16:00:07
    • 수정2023-06-24 16:11:43
    주말엔
난민선 실종자 아카시 굴자르(파키스탄)의 어머니 타슬렘 비비가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AFP)
이제 스무 살, 아카시 굴자르(Akash Gulzar)는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반드리 마을에 살던 청년입니다.

카슈미르는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 끊임없이 무력 분쟁이 이어지는 곳이죠. 그의 세세한 일상을 모르더라도, 이제 막 삶을 개척하는 스무 살 청년에게 기회의 땅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달 중순 굴자르는 마을 사람들 27명과 함께 아프리카 리비아까지 가서 한 어선에 올랐습니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는 난민선이었습니다. 배에 오를 즈음 굴자르는 어머니 타슬렘 비비(48살) 씨에게 전화해 "날씨가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망설이긴 했지만, 승선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리비아를 떠난 배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해안에서 불과 75k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한 14일(현지 시각) 영원히 침몰했습니다.

정확한 탑승 인원도 알 수 없습니다. 배의 규모상 400~750명가량 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 구조된 사람은 겨우 104명. 그 가운데 굴자르는 없습니다. 생존 골든타임은 지난 지 오래고 망망대해에서 수습된 시신은 82구뿐입니다. 나쁜 날씨에도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아들처럼, 마을에 남겨진 어머니 비비에게도 별다른 선택권이 없습니다. 비비 씨는 아들의 주검이라도 찾기 위해 자신의 DNA를 채취했습니다.

14일(현지 시각) 그리스 앞바다에서 침몰한 난민선이 가라앉기 전 모습.
"배에 탄 제 친척은 '마피아'같은 범죄 조직에 노출됐다는 것 같았어요. 구명조끼도 입지 못했다고 했어요."

- 파키스탄인 실종자 가족

굴자르는 왜 구조되지 못했을까. 이 짧은 질문에 대답은 너무 많이 딸려옵니다.

배에는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굴자르같은 파키스탄인이 2백 명~4백 명으로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생존자 104명 중 파키스탄인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영국 가디언은 18일 사고 생존자들이 해안경비대에 증언한 진술서를 보도했습니다. 사고 당시 파키스탄인들이 생존 가능성이 낮은 배의 갑판 아래층에 몰려 있어서 많이 구조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물을 찾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파키스탄인을 학대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똑같이 목숨을 걸고 난민선에 오른 사람들끼리 차별과 폭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배에 탄 모든 여성이 숨졌습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익사했다고요. 믿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 안와르 바크리 (그리스 시리아인 협회 사무총장)

배 안에서는 성별·나이에 따른 차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사실상 짐칸에 가뒀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실제로 생존자 104명은 모두 성인 남성입니다.

최근 약 10년 동안 지중해를 건너다 숨진 사람은 2만 7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배가 침몰하는 등 불의의 사고로 숨진 사람들도 있지만, 선내 폭력, 열악한 항해 환경에 노출돼 비인도적인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굴자르가 타고 있던 난민선 안에서도 사고가 나기 전 이미 6명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 안에 마실 물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앞바다 난민선 침몰 사고의 생존자가 가족과 재회하며 울고 있다.
그럼에도 '차라리 난민'이 되는 이유는 뭘까. 이 대답은 너무 간결해서 오히려 잔인하게 들립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들어 정치적 망명보다는 '가난' 때문에 난민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제난이 심각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국가에서 난민이 늘어나는 이유입니다. 가난의 구렁에서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은 차라리 목숨을 걸더라도 지중해 심연을 건넙니다.

그런데 목숨을 건 도박에도 '판돈'이 필요합니다. 난민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없는 돈을 어떻게든 모아 '브로커'에게 건네야 합니다. 이번 사고 난민선 탑승자들도 리비아 브로커에게 한 사람당 한화로 5백만 원가량을 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태우면 정확히 그만큼 돈을 더 버는 브로커들에게 안전은 고려 대상이 아닐 겁니다. 파키스탄 당국은 뒤늦게 이번 사고와 연관된 밀입국업자 29명을 체포했습니다.

18일 그리스 아테네 인근 피레아스 항구에서 시위대가 유럽연합(EU)과 그리스의 이주민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
'브로커'가 모두 없어지면 지중해에서 난민선이 사라질까요. 2016년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정착한 한 난민은 "누구도 난민의 이주를 멈출 수 없다. 그들은 일하고, 가족을 돕는 꿈을 꿨을 뿐"(BBC)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들어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 유럽 국가들은 '반 이민 정책'을 강화하는 추세입니다. 이들 국가는 난민들의 첫 목적지가 되는 곳입니다. 특히 그리스는 이번 사고에서 늑장 대응을 해 피해를 키웠다는 의혹도 제기됩니다. 유럽이 난민들에게 빗장을 잠글수록, 난민들은 더 멀고 더 위험한 바닷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와 이탈리아도 난민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유럽연합(EU) 정책상 난민들은 처음 도착한 국가에서 망명 신청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만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EU 국가들은 난민 수용을 두고 갈등을 지속해 왔습니다.

수년의 진통 끝에 EU는 이달 초 대안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U 국경에 도착한 난민 신청자를 회원국들이 나눠서 받아들이거나, 난민 한 사람당 2만 유로(약 2천8백만 원)를 EU 대책기금에 보내는 내용을 담은 잠정 합의안을 도출한 겁니다. '큰 의미 있는 진전', '역사적인 결정'이라는 자평이 EU 안에서 나오는 가운데, 굴자르 같은 비극은 이제 멈출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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