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귀무덤 400년 만에 ‘안장’

입력 2007.10.01 (14:44)

  •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게 귀와 코가 잘려 보내져 일본 교토(京都)에 묻혀 있던 조선 군인.양민들의 영혼이 400년만에  제대로  된 안식처를 찾게 됐다.
    경남 사천시와 사천시문화원은 1일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6천명의 넋을 달랬다.
    이 귀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공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해 잘라간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의 귀와 코를 안치해 놓은 곳으로, 귀무덤은 400년 동안 일본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신사 앞에 봉분 형태로 묻혀 있었다.
    귀무덤은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와 1992년 사천의 조명군총 옆에 묻혔지만, 그동안  안내판이나  비석도 없이 쓸쓸하게 방치돼 왔다.
    이번에 만들어진 위령비는 사천시가 조명군총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400년이 넘도록 일본 땅에 묻혀 있다가 고국에 와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귀와 코의 원혼들은 이제서야 공식적인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위령비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묻힌 조명군총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며, 1.8m 높이로 귀의  모습을  추상화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위령제에서는 희생자 유족 대표로 한산 이씨 문중이 제향을 했으며 헌다례,  헌화, 불모산 영산제 등 그동안 편안히 잠들지 못했던 넋을 달래기 위한 의식들이  이어졌다.
    위령제에는 귀무덤의 환국을 추진해 온 박삼중 스님과 함께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 참회사를 하고 위령비에  헌화를 해 눈길을 끌었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힘을 보태기도 했던 가키누마 스님은 참회사를 통해 "원혼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처를 찾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한일 양국의 숙원사업이던 이번 행사를 계기로 양국 우호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삼중 스님은 "원혼들이 한국에 돌아와 이곳에 묻힌 뒤 아무런 표시도 없고 한쪽 구석에 방치돼 그동안 마음이 아팠다"며 "지금이라도 원혼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위령비를 세우게 돼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 임진왜란 귀무덤 400년 만에 ‘안장’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게 귀와 코가 잘려 보내져 일본 교토(京都)에 묻혀 있던 조선 군인.양민들의 영혼이 400년만에 제대로 된 안식처를 찾게 됐다. 경남 사천시와 사천시문화원은 1일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6천명의 넋을 달랬다. 이 귀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공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해 잘라간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의 귀와 코를 안치해 놓은 곳으로, 귀무덤은 400년 동안 일본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신사 앞에 봉분 형태로 묻혀 있었다. 귀무덤은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와 1992년 사천의 조명군총 옆에 묻혔지만, 그동안 안내판이나 비석도 없이 쓸쓸하게 방치돼 왔다. 이번에 만들어진 위령비는 사천시가 조명군총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400년이 넘도록 일본 땅에 묻혀 있다가 고국에 와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귀와 코의 원혼들은 이제서야 공식적인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위령비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묻힌 조명군총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며, 1.8m 높이로 귀의 모습을 추상화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위령제에서는 희생자 유족 대표로 한산 이씨 문중이 제향을 했으며 헌다례, 헌화, 불모산 영산제 등 그동안 편안히 잠들지 못했던 넋을 달래기 위한 의식들이 이어졌다. 위령제에는 귀무덤의 환국을 추진해 온 박삼중 스님과 함께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 참회사를 하고 위령비에 헌화를 해 눈길을 끌었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힘을 보태기도 했던 가키누마 스님은 참회사를 통해 "원혼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처를 찾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한일 양국의 숙원사업이던 이번 행사를 계기로 양국 우호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삼중 스님은 "원혼들이 한국에 돌아와 이곳에 묻힌 뒤 아무런 표시도 없고 한쪽 구석에 방치돼 그동안 마음이 아팠다"며 "지금이라도 원혼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위령비를 세우게 돼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게 귀와 코가 잘려 보내져 일본 교토(京都)에 묻혀 있던 조선 군인.양민들의 영혼이 400년만에 제대로 된 안식처를 찾게 됐다.
경남 사천시와 사천시문화원은 1일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6천명의 넋을 달랬다.
이 귀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공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해 잘라간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의 귀와 코를 안치해 놓은 곳으로, 귀무덤은 400년 동안 일본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신사 앞에 봉분 형태로 묻혀 있었다.
귀무덤은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와 1992년 사천의 조명군총 옆에 묻혔지만, 그동안 안내판이나 비석도 없이 쓸쓸하게 방치돼 왔다.
이번에 만들어진 위령비는 사천시가 조명군총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400년이 넘도록 일본 땅에 묻혀 있다가 고국에 와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귀와 코의 원혼들은 이제서야 공식적인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위령비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묻힌 조명군총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며, 1.8m 높이로 귀의 모습을 추상화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위령제에서는 희생자 유족 대표로 한산 이씨 문중이 제향을 했으며 헌다례, 헌화, 불모산 영산제 등 그동안 편안히 잠들지 못했던 넋을 달래기 위한 의식들이 이어졌다.
위령제에는 귀무덤의 환국을 추진해 온 박삼중 스님과 함께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 참회사를 하고 위령비에 헌화를 해 눈길을 끌었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힘을 보태기도 했던 가키누마 스님은 참회사를 통해 "원혼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처를 찾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한일 양국의 숙원사업이던 이번 행사를 계기로 양국 우호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삼중 스님은 "원혼들이 한국에 돌아와 이곳에 묻힌 뒤 아무런 표시도 없고 한쪽 구석에 방치돼 그동안 마음이 아팠다"며 "지금이라도 원혼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위령비를 세우게 돼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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