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열정적이고 능력있는 앵커로 보였으면 합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 시청자들께 꿈과 희망을 전하는 앵커가 되겠습니다."
KBS 장애인 뉴스 앵커 이창훈(25)씨는 활짝 웃었다.
1급 시각장애인인 그는 523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한국 방송 사상 최초의 장애인 뉴스 앵커다.
25일 여의도 KBS 신관 3층 뉴스 스튜디오에서 위촉장을 받은 그는 위촉식이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좋은 정보를 더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제 목소리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좋아요. 그래서 취미로 인터넷 방송도 하고 있죠. 이제 KBS 앵커가 됐으니 더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방송을 하고 싶어요."
태어난 지 7개월만에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데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야구 중계를 좋아했어요. 캐스터의 박진감 넘치는 중계를 듣고 따라할 때마다 방송이 주는 희열 같은 걸 느꼈죠. 그때부터 방송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 것 같아요."
서울신학대ㆍ숭실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이씨는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방송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고, 2007년부터는 한국시각장애인인터넷방송(KBIC) 진행자로 활동하며 실전 경험을 쌓아왔다.
그런 그에게 KBS 장애인 뉴스 앵커 공모 소식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 비’ 같은 것이었다.
"내게도 길이 열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한번 해보자, 뭐 그런 마음이었죠. 그때부터 여러 뉴스 앵커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시작했어요. 앞은 볼 수 없지만, 제겐 ’잘 들리는 귀’가 있으니까요.(웃음)"
1차 서류전형과 2차 카메라 테스트를 통과한 응시자는 이씨를 포함해 모두 10명. 다들 화려한 방송 출연 경력으로 무장한 ’고수’ 들이었다.
이씨는 "사실 그분들보다 제가 더 나은 부분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다들 저보다 방송 출연 경력도 많았고 목소리도 좋았다"면서 "그래도 절 뽑아주신 건 아직 방송에 덜 노출된 사람이라는 ’신선함’ 정도가 강점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한다"며 몸을 낮췄다.
이에 대해 이번 채용 과정을 총괄한 임흥순 KBS 과학재난부장은 "이씨는 뉴스에 대한 안목, 발음 및 표준어 구사 능력, 도전 정신 및 발전가능성 등 모든 평가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면서 "이씨는 매우 뛰어난 인재"라고 극찬했다.
이씨의 롤 모델은 KBS 1TV ’뉴스 9’의 민경욱 앵커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밤 9시 뉴스를 많이 들었는데 민경욱 앵커의 목소리가 굉장히 생동감있더라고요. 한마디로 뉴스가 살아있는 것 같았어요. 앞으로 저도 그분처럼 생동감 있게, 열정을 담아 뉴스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가족과 친지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항상 저를 지켜봐 주신 가족, 친지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저희 어머니는 일하다 다리를 다치셨는데도 깁스를 하고 여기까지 같이 와주셨어요. 제가 앵커에 도전하겠다고 한 뒤부터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며 저를 응원해주셨죠. 항상 고생만 하신 어머니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씨와 동행한 어머니 이상녀(57)씨는 "항상 밝은 모습으로, 장애인 같지 않게 당당히 살아온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흐뭇해했다.
이씨는 앞으로 3개월간 방송 실무 교육을 받은 뒤 프리랜서 앵커로 활동하게 된다.
임흥순 부장은 "장애인 뉴스 앵커 기용이 처음이기 때문에 작게 시작해 차츰 발전시켜나가려고 한다"면서 "어느 프로그램에 투입될지는 교육 과정을 지켜본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씨가 활동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보조 직원을 한 명 붙여 자료 조사 등을 도울 계획이며, 점자 프린터와 브레일 노트(시각장애인용 점자 정보 단말기)도 구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위촉식에 참석한 김인규 KBS 사장은 "2년 전 영국 BBC가 장애인 앵커를 일주일 정도 기용한 적이 있었지만 정규 프로그램에 투입하기 위해 장애인 앵커를, 그것도 시각장애인 앵커를 기용한 것은 KBS가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오늘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방송사에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은 "KBS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장애인 뉴스 앵커를 선발해 장애인들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허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