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저스·류현진 동시에 살린 ‘108구째 직구’

입력 2013.10.15 (13:27)

수정 2013.10.1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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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08번째 공이 포수 A.J. 엘리스의 미트에 꽂히는 순간 이를 악물고 던진 왼손 투수 류현진(26·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시선은 온통 홈플레이트를 향해 있었다.

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미국프로야구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7전 4승제) 3차전이 열린 15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2-0으로 앞선 7회 2사 1루 다저스의 수비 때 슬러거 맷 애덤스가 타석에 들어서자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전 타석에서 우익수 앞으로 날카로운 안타를 날린 애덤스는 한 방이 있는 타자. 홈런 한 방이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류현진의 컨디션을 점검하고자 매팅리 감독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류현진은 애덤스를 상대로 땅에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초구 볼을 던진 뒤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하는 체인지업과 빠른 볼로 볼 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의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결정구를 던질 차례에서 류현진은 커브로 애덤스의 스윙을 체크한 뒤 바깥쪽 높은 직구로 승부를 걸었다.

공의 낙폭을 고려해 떨어지는 커브와 바깥쪽으로 떠오르는 직구를 곧바로 섞었다.

이전 타석에서 몸쪽 직구를 잡아당겨 안타를 친 애덤스가 여지없이 방망이를 냈다.

결과는 헛스윙 삼진.

108번째 번뇌가 말끔히 풀리자 좀처럼 세리머니를 하지 않는 류현진도 승부처에서 나온 귀중한 탈삼진에 '해냈다'는 표정으로 왼팔을 강하게 내리쳤다. 수건을 흔들던 팬들은 기립박수로 류현진을 환영했다.

이 회심의 직구가 류현진도 살리고, NLCS에서 위기에 몰린 다저스도 구해냈다.

투수 최고 영예인 사이영상을 받은 원 투 펀치 잭 그레인키, 클레이턴 커쇼를 차례로 마운드에 올렸지만 타선 침묵 탓에 다저스는 NLCS 1∼2차전을 모두 패하고 홈으로 돌아왔다.

류현진마저 무너진다면 벼랑 끝에 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루키 류현진이 기적의 호투를 펼쳤다.

7이닝 동안 짜임새 좋은 세인트루이스 타선을 산발 3피안타 0점으로 묶은 배경에는 파워 넘친 직구가 있다.

류현진은 1회부터 시속 153㎞(95마일)짜리 '광속구'를 뿌렸다.

불펜을 믿고 5회까지 전력투구로 실점을 최소화하겠다는 각오로 마운드에 선 터라 이리저리 잴 것이 없었다.

그레인키와 커쇼가 강속구 투수라는 것을 잘 알고 대비한 세인트루이스 타자들은 두 투수보다 느리지만 생각보다 빠른 류현진의 직구에 놀란 듯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은 강속구로 타자를 압도하는 투수가 아닌 다양한 변화구를 던져 완급 조절로 타이밍을 뺏는 투수다.

이런 투수가 던지는 시속 153㎞짜리 공은 더 위력적이다. '느림의 미학' 유희관(두산)의 직구가 빠르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류현진은 국내 한화에서 뛸 때도 경기의 중요성을 고려해 1년에 한 두 번씩은 악 소리를 내가며 이런 공을 던진 적이 있다.

이날 지면 월드시리즈 진출이라는 목표에서 멀어지는 만큼 류현진이 작심하고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류현진은 4회까지 직구 평균 시속 150∼151㎞를 유지했다. 평소 시속 148㎞보다 2∼3㎞는 빨랐다.

타자 무릎 쪽을 파고드는 완벽한 제구는 아니었으나 볼 끝에 힘이 있어 카디널스 타자들이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세인트루이스는 올 시즌 왼손 투수 상대 팀타율 0.238로 내셔널리그 13위에 머물렀다.

디비전시리즈에서도 팀 타율 0.167, NLCS에서 0.125에 머무는 등 좌완에는 매우 약하다.

정규리그에서 세인트루이스를 제물로 7이닝 동안 1실점(비자책점) 투구로 승리를 따낸 류현진은 직구 위주로 볼 배합을 바꿔 상대 전략을 무너뜨린 뒤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커브를 적재적소에 찔러 상대 방망이를 꽁꽁 묶었다.

정타로 맞은 타구가 2개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인트루이스 타자들은 타이밍을 좀처럼 잡지 못했다.

1회 실점하는 징크스를 무난히 넘긴 류현진은 4회까지 11타자를 범타로 솎아내며 롱 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분위기에 압도돼 메이저리그 첫 정규리그 등판(4월 3일 샌프란시스코전·6⅓이닝 10피안타 3실점)과 첫 포스트시즌 등판(7일 디비전시리즈 애틀랜타전·3이닝 6피안타 4실점)에서 부진했으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류현진 철학도 새삼 확인됐다.

류현진은 정규리그 두 번째 등판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제물로 6⅓이닝 동안 3피안타 2실점으로 첫 승리를 따냈다.

가을 잔치에서도 두 번째로 마운드에 오른 이날 환상적인 역투로 한국인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수확하며 잃었던 신뢰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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