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태권도 편파판정, 그 뒤…

입력 2014.02.07 (19:43)

수정 2014.02.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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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려던 소년의 꿈은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전부터 해당 심판과 악연이 있었던 아버지는 억울함을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들은 동생과 함께 학교 상담 선생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장례 뒤 아버지 유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남은 거라곤 아버지의 땀이 밴 체육복 바지와 운동화가 전부입니다.

짧은 인터뷰 뒤, 학교로 데려다 주는 길에 아들은 기자에게 아버지의 자살이 태권도계를 바꿀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용기로 더 힘을 내 운동을 하라고 말했지만, 아들에게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함께 태권도부 감독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아들은 비둘기를 보고도 화들짝 놀랐습니다. 마침, 인터뷰를 하던 공원에서도 비둘기를 보고 놀랐던 게 떠올라 왜 그러는지 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편파판정으로 졌던 날, 부상 때문에 아픈 다리를 끌고도 경기에 나섰다며, 휘청거리며 걷는 비둘기를 보면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날의 충격이 아직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겁니다.



선수와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지만, 당시 대회 운영을 맡았던 서울시 태권도 협회는 심판이 오심을 했다며 제명하는 선에서 종결했습니다. 문제는 심판의 오심 이전에 해당 협회의 협회장부터가 지난 2001년 태권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승부조작을 주도해 벌금 천5백만 원에 추징금 2천2백만 원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협회장뿐 아니라 당시 심판 위원장도 앞선 2001년 승부조작 사건 당시 공모했던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태권도계는 단체장이 심판 위원장을 위촉하고, 심판 위원장이 심판을 사실상 단독으로 배정합니다. 이 때문에 친소관계와 이권 개입에 따라 얼마든지 불공정한 심판진 운영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건 발생 뒤, 서울시 태권도 협회의 조직적인 개입 의혹이 제기됐고, 협회는 이에 대해 철저히 해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 태권도 협회는 심판의 오심이 고의가 아닌 실수 라면서도 죄질에 비해 가혹한 징계를 했습니다. 판정의 정확도가 더 엄격하게 요구될 수밖에 없는 프로 스포츠에서도 고의가 없는 한 한 번의 오심으로 심판을 제명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서울시 태권도 협회는 정확한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 없이 과도한 징계를 해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만 샀습니다.

태권도계 자체적으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체육계 전반에 대한 특별 감사를 시작했습니다. 넉 달에 걸친 감사 결과, 서울시 태권도 협회 운영에서 갖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예상대로 2001년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인사들이 최근까지도 임원과 각종 위원으로 활동했거나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전·현직 협회장의 친인척과 제자로 임직원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어 조직 사유화 문제도 제기됐습니다. 이렇게 의사결정기구와 집행기구가 지인들로 채워지다 보니 회장의 연봉을 30퍼센트 이상 올려도 반대가 없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소정의 활동비만 받는 보통의 체육단체장과 달리 서울시 태권도 협회장은 억대 연봉을 받고 있고, 서른 명이 조금 안 되는 비상근 임원들에게 매달 수천만 원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상식 밖의 운영을 하고 있었지만, 협회는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며 당당합니다. 그래서 취재기자는 대의원 총회와 이사회에 대한 잠입 취재를 시도했고, 그 결과 협회가 말하는 소위, '합법성'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취재를 시도한 현장은 지난달 24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식당에서 열린 서울시 태권도 협회 대의원 총회. 협회 내 최상위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협회장은 일반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공개된 식당에서 당당하게 기록 조작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특별 감사에서 지적한 구지회장 활동비를 없애는 대신, 태권도 승품단 심사 때 감독관으로 입회하면 이전에 받던 활동비만큼을 보전해줄 테니, 대여섯 번 참여하더라도 15번 정도 일한 것으로 기록을 조작하라"고 했습니다. 학부모와 수련인의 주머니에서 나온 심사비를 기록 조작을 해서라도 협회 간부들을 위해 쓰겠다는 겁니다. 총회 자체도 형식적이었습니다. 의장이 안건을 소개하면, 한 대의원이 서류로 다 봤으니 원안대로 통과시킬 것을 주장하고, 이어서 동의 발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결산 규모만 65억 원, 잘못을 저질러 해임된 임원에게 석 달치 활동비에 퇴직금까지 지급한다는 몰상식한 규정도 있었지만, 이의 제기 없이 30분 만에 모든 안건이 통과됐습니다. 사유화된 조직은 회의가 합법적으로 이뤄져도 정상적일 수 없다는 걸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대한 체육회는 체육계 특별감사가 끝난 뒤, 서울시 태권도 협회를 산하 관리단체로 지정하라고 서울시 체육회에 통보했습니다. 이에 서울시 체육회는 지난해 말 서울시 태권도 협회에 대한 자체 감사를 벌였지만,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을 찾지 못했다며 관리단체로는 묶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대신, 해당 협회에 자체 개선안 제출을 지시했고, 해를 넘겨 한 달 넘게 시간을 끌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서울시 태권도 협회장에게 사퇴를 종용해 사태를 무마하려 했습니다. 서울시 태권도 협회가 심판을 제명해 편파판정 사건을 덮었듯이, 서울시 체육회도 서울시 태권도 협회장을 잘라 국면을 전환하려 한 겁니다. 하지만, 협회 운영에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시체육회가 면죄부를 준 상황에서 서울시 태권도 협회장이 물러날 필요는 없었던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설 연휴 뒤에 물러나겠다던 서울시 태권도협회장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아버지를 잃고 눈물 흘린 소년의 억울함은 여전히 바닥에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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