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포천 빌라 살인사건’ 아이, 왜 방치돼 있었나?

입력 2014.08.12 (09:24)

수정 2014.08.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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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 고무통에 담긴 2구의 남성 시신. 안방에 홀로 남겨진 채 울고 있던 8살 남자 아이. 온 국민을 놀라게 한 '포천 빌라 고무통 시신' 사건입니다. 썩은 채 버려진 시신들 이상으로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건, 그처럼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공간에 두 달이나 방치돼 있던 아이입니다.

'보는 눈'이 그토록 많았는데도, 왜 아이는 그토록 오랜 시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을까요? 이웃 주민들은 아이가 뭔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임에도 하루종일 집에서만 지낸 것부터 이상했습니다. 아이의 엄마이자 살인 피의자인 이 모 씨가 집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베란다를 통해 아이에게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것을 봤다는 증언까지 나왔습니다. 아동 보호 기관 역시 아이가 2년째 별다른 이유 없이 취학 유예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버려져 있었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이유가 뭔지 고심해 보던 중, 문득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 현상을 떠올렸습니다.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으니 틀림없이 별일 아닐 거라고 판단해 버리는' 심리적 상황을 말합니다.

'다원적 무지'의 대표적인 사례는 1964년 3월,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제노비스 사건'입니다. 20대 여성 캐서린 제노비스는 늦은 밤 귀가하던 중, 거리에서 괴한의 공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단순 강도로 보였던 이 사건은, 여성이 숨지게 된 과정이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에 큰 충격과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범인이 30분 넘는 시간 동안 제노비스를 따라다니며 세 차례나 공격했다는 사실, 그리고 무려 38명의 이웃들이 집 안에서 이 과정을 목격하고도 경찰에 전화 한 통 걸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하나 같이 38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사건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을 심층 분석한 사회심리학자 빕 라타네와 존 달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처럼 목격자가 많았다는 그 사실이, 오히려 아무도 나서지 않게 하는 현상을 초래했다고 본 겁니다.



이들이 제시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주변에 도울 사람이 많을 때는 반드시 내가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누군가 도와주거나 뭔가 조치를 취하겠지. 누군가 벌써 했을지도 모르고'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이유가 바로 '다원적 무지'입니다. 이 현상은 어떤 불확실한 상황에 놓였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봄으로써 자신의 행동의 준거, 다시 말해 '사회적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상당수의 위급 상황은 진짜로 위급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옆집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릴 때, 강도가 든 것인지, 부부 싸움이 격해진 것인지, 알기 힘듭니다. 강도라면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겠지만, 그냥 부부 사이의 다툼이라면 괜히 끼어들었다 망신만 당하기 쉽습니다. 포천 빌라의 아이를 바라보는 이웃 주민들의 생각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 작동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서 자신도 그대로 하려는 심리가 발동하는 겁니다. 문제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간과된다는 점입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회적 증거'를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다 보면,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 보다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위급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위급 상황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거나 오인할 수 있는 겁니다.

'다원적 무지'가 보여주는 것은, 위급 상황이 닥쳤을 때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까 안전할 거라는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위급 상황일 때는 목격자가 단 한 명뿐일 때 도움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앞서 다원적 무지 현상을 분석한 두 학자 라타네와 달리의 실험은 이 같은 사실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한 대학생이 갑자기 간질 발작을 일으킨 척 연기 했을 때, 목격자가 혼자인 경우에는 85%가 도움을 준 반면, 목격자가 5명인 경우에는 31%만 도움을 줬습니다. '나 말고도 다른 목격자가 있다'는 인식이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증거'를 제공해 줄 다른 대상이 없는 상태에선, 역으로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해 행동할 확률이 더 커진다는 겁니다.

그럼, '다원적 무지' 상황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만 줄여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위급 상황'이란 사실을 주변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는 겁니다. 포천 사건의 경우를 놓고 본다면, 먼저 아이 스스로 이웃들에게 "도와달라"고 명확히 요청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과연 그런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상황인지를 돌이켜 본다면, 극히 현실성이 떨어지는 얘기입니다.



때문에 이웃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먼저 나서 주는 게 필요합니다. 아이가 학교도 안 가고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뭘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엄마도 안 보인다, 과연 밥은 먹고 있는 것인지, 누가 돌봐주긴 하는 것인지 불투명하다, 이는 분명 정상적이지 않으며 학대와 방임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지금 즉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곧장 전화기를 들고 신고하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동네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얘기해 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든 아이의 상황에 대한 '불확실한 인식'을 '확실한 응급 상황 인식'으로 바꿔줌으로써, 아이를 돕기 위해 행동하는 이웃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게 만드는 겁니다.

포천 사건을 통해 살펴본 '다원적 무지' 현상. 다수가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 심리적 기제로 인해 얼마나 파편화되기 쉬운지, 또 그로 인해 얼마나 뜻하지 않은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분명한 것은 약간의 인식과 의지, 행동만 있으면 '다원적 무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깰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변 눈치를 살피지 말고 그 위험을 적극적으로, 큰 목소리로 알리라는 것입니다. 포천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재현되지 않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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