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건국절'이라는 용어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건국절 논란의 핵심은 대한민국 건국을 언제로 보느냐는 건데, 정치권에서는 진영에 따라 1919년과 1948년으로 갈리고 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가 '건국절 논란'에 불을 붙였다.
문 대통령은 15일(그제)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이 아닌 1919년에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자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은 15일 브리핑을 통해 "너무 당연한
1948년 건국을 견강부회해서 1919년을 건국이라고 삼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며 "
1948년 건국은 자명한 일이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해마다 8·15 광복절을 기점으로 나타났던 논란이 재점화되는 양상이다.
'건국절' 두고 여야 공방..."역사적 정의"vs"북한 의식"건국절 논란에 대한 공방은 광복절 다음 날인 16일(어제)에도 이어졌다. 우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포문을 열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시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2019년 건국 100주년을 선언한 것은 우리 현대사를 명쾌하게 정리하는 역사적 정의, 즉
히스토리컬 데피니션(Historical Definition)"이라고 말했다.
추 대표는 또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외면했다"며 "심지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 했고, 역사 국정교과서를 통해
1948년 건국절을 기정사실화, 공식화하려고 했다. 이는 역사 왜곡이자 축소"라고 비판했다. 우원식 원내대표와 당 지도부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자유한국당 최고위원-3선 의원 연석회의(16일)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곧바로 반박했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좌파 진영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처음 만들었을 때를 건국일로 보는 것은 북한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며 "남한 정부, 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기 위해 1919년 상해 임정 수립을 건국절로 하자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당 혁신위원회는 이미 지난 2일 발표한 혁신선언문에서 "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이래 자유민주 진영이 피와 땀으로 일으켜 세우고 지켜온 나라"라며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강조했다.
여당과 제1야당이 '건국절'이라는 용어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정의당은 각각 목소리를 냈다.
박주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15일, 문 대통령의 1919년 건국론에 대해 동의의 뜻을 표하며 "나는 그것을 생각한 사람으로, 대한민국 건국일은 그때다.
헌법에도 그렇게 규정돼 있고, 그것(1919년)이 맞다"고 말했다.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는 16일 "문재인 대통령은 건국절 논란을 재점화해 역사의 문제를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분열을 자초했다"며 "역사는 특정 정권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정의당은 16일 논평을 통해 "논란의 여지가 없음에도 건국절을 주장하는 것은 국정교과서와 다를 바 없다"며 "
건국절 주장은 촛불이 탄핵시킨 국정교과서와 함께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즉 국민의당은 대한민국 건국의 시점이 1919년이라는 데 동의하고, 정의당은 나아가 '1948년 건국절' 주장 자체가 '역사 왜곡'이라는 입장인 반면 바른정당은 건국 시점 자체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 건국절이 '정치 쟁점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된다.
'건국절' 논란...그 동안의 전개는?건국절 논란은 11년 전인 2006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라이트 계열이었던 이영훈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건국절'이라는 용어는 역사학계에서 처음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 8월 11일 뉴라이트재단·자유주의연대 등 5개 신 보수단체가 '8·15 명칭을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바꾸자'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건국절 논란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정치 쟁점화 됐다. 2008년 5월, 국무총리 산하
대한민국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출범했고, 같은 해 8월 당시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평화통일시민연대 등 55개 단체가 '대한민국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와 그 주요 사업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역사관련 14개 학회가
건국절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또 한민족운동단체연합·독립유공자유족회 등 80여개 단체에서도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중단을 촉구했고, 결국 정갑윤 의원은 시민단체와 야당 비판에 밀려 건국절 제정 법안을 철회했다.
건국절 논란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끊이질 않았다. 2014년 9월에는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광복절을 '
광복절 및 건국절'로 확대 지정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특히 지난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평가했고, 이에 더해 지난해 11월,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 '
대한민국 수립' 표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부 역사학계 학자들과 시민단체가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역사학계 입장은?제헌국회 헌법공포기념 사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 1948년 8월 15일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먼저 건국 시점을 1919년이 아닌 1948년으로 보는 논리는
국가가 성립하려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대 요소가 갖춰져야 하는데,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해당 요건에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반면 1919년을 건국 시점으로 보는 학자들은 1948년 건국절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한다.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가 명시된 제헌헌법 전문(국가기록원) 1948년 9월 1일 최초 관보 '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돼 있는 제헌 헌법 전문과, '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발행 일자가 찍힌 1948년 9월 1일 최초 관보 등이 이러한 주장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해 8월 22일 역사학계 원로들은 '위기의 대한민국, 현 시국을 바라보는 역사학계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탈바꿈하려는
'역사 세탁'이 바로 건국절 주장의 본질"이라며 강하게 규탄했다.
'건국절 논란'에 대한 전망학문적 관점과 별도로 당분간 '건국절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치권이 필요에 따라 '건국절'을 공방 소재로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48년 건국절을 강하게 주장해온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도 당에 포진해 있다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1948년 건국절'은 멀리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됐고,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와도 연계돼 있기 때문에, 한국당은 '과거를 부정당하지 않겠다'는 관점에서라도 '1948년 건국절'을 옹호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1919년 3·1 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도 건국됐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한국당의 '건국절 공세'에 대해 '반헌법적·반역사적 관점'이라고 맞설 것으로 예상된다.
문 대통령 역시 1919년 건국을 천명한 만큼 앞으로 '건국절 논란'을 둘러싼 여야의 기싸움은 한치 양보도 없이 전개될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