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깨고 극우와 손잡은 ‘드골’의 공화당…프랑스 정가 대격변 예고

입력 2024.06.12 (16:15)

수정 2024.06.1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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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중도우파 기성정당인 공화당이 수십 년 금기를 깨고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과 연대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극우 정당의 유럽의회 선거 돌풍에 맞서 던진 조기 총선 승부수가 합종연횡을 촉발하면서 프랑스 정가는 대격변을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화당의 에리크 시오티 대표는 현지 시각 11일 프랑스 TF1 뉴스에 나와 유럽의 이번 총선에서 간판 극우인사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RN과의 제휴를 지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시오티 대표는 "우리 자신을 유지하면서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 RN 및 그 후보자들과의 동맹"이라고 말했습니다.

공화당은 지난 9일 끝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단 6석을 얻었습니다. 시오티 대표는 공화당이 좌파와 중도파들의 국가 위협을 막기에는 너무 허약하다고 말했했습니다.

AFP통신에 따르면 RN의 하원 원내대표인 르펜은 시오티 대표의 이런 결정에 대해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환영했습니다. 그는 "많은 선거에서 (RN을) 패배하게 했던 40년간의 '방역선'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 주류 정당들은 '방역선'으로 알려진 각종 규제 전략으로 극우 정당을 견제해왔습니다.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TF1 뉴스에 공화당과 RN의 연대와 관련, 양당 간에 협약이 체결될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는 조기 총선에서 수십명의 공화당 후보들이 당선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프랑스의 정통 보수 우파인 공화당이 극우 정당과 연대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RN의 전신이던 극우정파는 이슬람 혐오, 홀로코스트 부정 등의 이유로 프랑스 내 다른 정당의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샤들 드골,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등과 같은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에서는 충격과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극우 정당의 현실적인 기세를 인정해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지만 당내 반발이 일면서 보수 정당이 분열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공화당 소속 제라르 라셰 상원 의장은 RN과의 연대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시오티 대표의 사임을 촉구했습니다. 공화당 고위 인사인 그자비에 벨트랑은 시오티 대표를 향해 "극우와 협력을 선택한 것은 배신"이라고 비난하며 당의 제명을 요구했습니다.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내무장관은 2차 대전 직전 나치 독일과 맺은 뮌헨협정에 비유하며 드골파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뮌헨협정은 1938년 영국과 프랑스가 2차 대전을 막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 총통의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양도 요구를 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2차 대전을 막지 못했습니다.

집권 여당인 르네상스당 소속의 야엘 브룬 피베 하원의장은 "오늘 자크 시라크가 두 번 죽었다"며 "시오티가 방금 공화당 우파를 암살했다"고 성토했습니다.

RN과의 제휴가 프랑스 현대 정치사에서 우파 진영의 거두로 2019년 별세한 시라크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소피 프리마스 등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2명은 시오티 대표의 행보에 반발해 탈당 의사를 밝혔습니다.

유권자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변호사 프랑크 모렐(55)는 "엄청난 고통으로 거의 울고 싶은 지경"이라며 "드골주의(드골 전 대통령의 정치 철학) 유산에 대한 상상할 수도 없는 배신"이라고 말했습니다.

통신은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61명 가운데 10명가량이 RN과의 연대에 동조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공화당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습니다.

좌파 진영도 조기 총선에서 연대를 선언했지만 불협화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LFI, 공산당, 사회당, 녹색당 등 좌파 대표 4개 정당은 지난 10일 '인민 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한 뒤 선거구에서 단일 후보를 내세우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유럽의회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LFI의 공격을 받은 라파엘 글뤽스만이 어떤 공식적인 합의도 없었다며 사회당은 LFI와의 어떤 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공화당과 RN은 물론 좌파 진영까지 연합 전선 구축을 추진하는 것은 중도 좌파(사회당) 및 중도 우파(공화당) 세력을 결집해 조기 총선에서 RN을 이기겠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분석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당초 예정했던 기자회견을 12일로 하루 미루고 정계 개편 구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조기 총선 결정 배경을 설명하고 집권 여당의 공약과 비전을 설명할 계획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11일 보도된 피가로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조기 총선 결과에 상관없이 대통령 자리는 유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총선 결과에 따라 마크롱 대통령이 동거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 업체 해리스 인터랙티브가 프랑스 성인 2,744명을 대상으로 조기 총선 1차 투표 때 지지 정당을 온라인 설문조사 한 결과, 지지율은 RN이 34%로 가장 높았고 좌파 연합(22%), 마크롱 대통령의 르네상스당(19%), 공화당(9%) 등의 순이었습니다.

또 다른 여론조사 업체 IFOP가 프랑스 성인 1,11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36%가 RN을 지지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볼 때 RN은 하원에서 현재 88석보다 월등히 많은 235~265석을 얻을 수 있지만 절대 과반(총 577석 중 289석)에 미치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여론 조사상 공화당이 확보할 것으로 보이는 40~55석을 합하면 과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기 총선의 1차 투표는 이달 30일, 2차 투표는 다음 달 7일 실시됩니다. 공식 선거 운동은 오는 17일 시작됩니다.

[사진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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