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집회’ 선결제 누가 했나 봤더니…고등학생과 대학생들

입력 2024.12.18 (15:21)

수정 2024.12.18 (15:22)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연일 열린 ‘탄핵 집회’.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연일 열린 ‘탄핵 집회’.

■ 국회에 나타난 헬기…5·18 헬기 사격 떠올린 광주 시민들

헬기와 군인들이 국회에 들이닥친 순간. 2024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상황은 초현실적이면서 동시에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었습니다.

45년 전 마지막 계엄을 온몸으로 겪었던 광주 시민들은 더 그랬습니다. 12월3일 계엄령이 내려진 그 밤, TV를 통해 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5·18을 경험한 이들은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1980년 5월에도 광주 금남로에 헬기가 떴고, 그 헬기가 전일빌딩에 무차별 사격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광주 시민 박철호 씨는 "80년도에 헬기 소리를 들은 트라우마가 있는데, 3일 그때도 헬기 소리 난 것과 똑같은 것이 들리니 섬뜩했다"고 말했습니다.

■ MZ 문화 담긴 탄핵 집회…'선결제 릴레이' 주목

두려움도 잠시, 그때처럼 분노와 사명감이 시민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 서울 광화문, 광주 5·18 민주광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탄핵 집회가 매일 열렸습니다. 황망한 시국이었지만 분위기는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습니다. 비장함보다 유쾌함이, 절망보다는 희망이 감돌았습니다.

광주 5·18 민주광장 저녁 집회 중에 발견한 커피잔.광주 5·18 민주광장 저녁 집회 중에 발견한 커피잔.

그 중심에는 이른바 'MZ'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집회 문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눈에 띈 건 집회 참가자들을 위해 커피와 음식을 미리 결제하는 '선결제 릴레이'였습니다. 집회 장소 근처의 식당이나 카페에 미리 결제를 해 두고, 참가자들이 먹을거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SNS로 알리는 방식이었습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지켜보던 이들이 구름처럼 모였던 지난 7일, 광주광역시 충장로의 한 커피숍에도 커피와 음료 600잔이 미리 결제됐습니다. 이렇게 선결제에 나선 이들이 이날만 10명. 대부분 실명 대신 별명을 남겼고, 아이돌 멤버 이름을 댄 경우도 많았습니다.

광주에 잇따른 ‘선결제 릴레이’ SNS 메시지.광주에 잇따른 ‘선결제 릴레이’ SNS 메시지.

■ 선결제 주인공 3명, 모두 10대와 20대

선결제를 한 이들은 누구일까? 적지 않은 돈을 한꺼번에 지불해야 하는 만큼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했습니다.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KBS광주 <찾아가는K> 제작진이 수소문 끝에 찾은 선결제의 주인공 3명은 모두 10대와 20대였던 겁니다.

① 아이돌 멤버 이름 남기고 선결제한 대학생

광주여자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22살 이혜진 씨가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계엄 사태 직후 탄핵 집회가 한창 불붙던 지난 6일, 이 씨는 SNS를 통해 서울 여의도와 국회의사당 등에서 진행되던 선결제 릴레이를 접했습니다.

광주에도 이런 게 필요하겠다 싶어, 5·18 민주광장 근처의 커피숍에 연락해 선뜻 커피 180잔을 결제했습니다. 이 씨의 선결제는 다시 SNS를 통해 퍼져 나갔고, 광주에서도 선결제 릴레이에 동참하는 이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선결제에 참여한 광주여대 학생 이혜진 씨.선결제에 참여한 광주여대 학생 이혜진 씨.

이 씨가 커피숍에 남긴 이름은 본명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의 이름이었습니다. 콘서트장에 찾아오는 다른 팬들에게 핫팩이나 커피를 나눠 주는 아이돌 '나눔 문화'에 착안한 겁니다.

이 씨는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을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굿즈(팬 상품)나 먹을 걸 나누는 아이돌 나눔 문화를 잘 아는 만큼, 선결제로 집회 참가자를 돕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수십만 원은 대학생에게 분명 큰돈입니다. 하지만, 이 씨는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생활비를 조금씩 아끼면 문제없다고 말합니다.

이 씨는 "다 초면인 사람인데 선의로 무언가를 주고받는다는 게, 아이돌 나눔 문화와 집회 선결제의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며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같은 목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② 선결제 참여 10대 고등학생 "몇 달 뒤면 유권자"

확인 결과, 선결제로 집회에 힘을 보탠 이들 가운데는 10대 고등학생도 있었습니다. 순천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광주 충장로의 커피숍에 전화를 걸어, 집회 참석자들에게 커피 10잔을 나눠 달라고 한 겁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름대로 온기를 나눈 학생. 친구가 선결제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집회에 가지는 못해도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 싶어 동참했다고 말합니다.

선결제에 참여한 고등학생이 커피숍 주인과 주고받은 메시지.선결제에 참여한 고등학생이 커피숍 주인과 주고받은 메시지.

커피숍에서 직접 배달을 간다고 하자, 배달비도 주겠다는 문자 메시지 내용은 10대답게 귀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 보니, 곧 한 표를 갖게 될 유권자로서의 의식은 투철했습니다.

이 학생은 "지금 고3인데 몇 달 뒤면 선거권을 갖는 한 국민"이라며 "특히 지역에서는 계엄령을 경험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고, 충분히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③ 20대 청년 "어르신에게 선결제 커피 전해 달라"

온라인 닉네임을 남기고 광주에 커피와 음료 100잔을 주문했다는 SNS 게시물도 화제가 됐습니다. 이 게시물엔 특히 "SNS에 익숙하지 않은 중년분들께 꼭 전달해 달라"는 내용이 포함돼 훈훈함을 더했습니다.

‘중년·어르신에게 선결제 커피를 나눠달라’는 SNS 메시지.‘중년·어르신에게 선결제 커피를 나눠달라’는 SNS 메시지.

<찾아가는K> 제작진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수소문해 보니, 역시 2003년생인 20대 초반이 남긴 글이었습니다.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된 주인공은 경기도에 거주하는데, 고등학교까지 광주에서 나온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국회 근처엔 선결제가 많았는데 광주는 처음에는 많지 않았다"며 "5·18 민주광장에도 중년이나 어르신이 많이 나오실 것 같아서 선결제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 MZ가 이끄는 집회 문화…"민주주의 미래상"

촛불 대신 집회에 등장한 아이돌 응원봉과, 민중가요 대신 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까지. 세대를 넘나든 탄핵 집회에 MZ들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집회를 주도했습니다. 스스로 문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커졌습니다.

광주 집회 현장에서 본 아이돌 응원봉.광주 집회 현장에서 본 아이돌 응원봉.

5·18 민주광장에서 만난 고등학생 최진희 양은 "커피 말고도 핫팩 등을 많이 나눠 받았는데, 시민 의식이 잘 보이는 것 같아 내심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피들이 공급하는 에너지는 세대 간 연대를 촉발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권이숙 씨는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를 오히려 '리드'해 나가는 것, 더 나와달라고 이끌어주는 느낌이 들었다"며 "이 어려운 시국이 젊은이들로 인해 더 해결이 될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광주 집회 현장에 등장한 ‘핫팩 나눔’.광주 집회 현장에 등장한 ‘핫팩 나눔’.

세대를 뛰어넘어 나눔과 연대가 되살아나는 탄핵 집회 현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개개인의 주체성과 개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사회적인 어떤 목적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민주주의 상이라고 생각한다"며 "MZ세대가 보여주는 시위 문화가 한국의 발전된 민주주의를 위한 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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