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특집] 오키나와를 떠도는 만 5천여 명의 원혼들

입력 2006.08.14 (09:39) 수정 2006.08.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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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남부 오키나와하면 절경과 함께 미군 기지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죠.

하지만 바로 이곳에 우리 민족의 원혼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에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노역 등으로 끌려 온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만 5천여명이 전쟁 통에 숨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 대부분의 신원이 확인 조차 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광 복 61주년을 맞아 저희 뉴스타임이 통한의 땅 일본 오키나와 현지를 취재했습니다.

오늘이 그 첫 순섭니다.

홍성철 기자!

오키나와에서 한국인 만 5천여명이 숨졌다는 사실, 참 놀라운데요.

신원 확인 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니 더 충격이네요.

<리포트>

만 5천여 명은 각종 문서를 통해 추정하는 숫자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숨졌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문제는 이들조차도 정부 차원의 신원 확인이나 보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서 차로 30분을 달리면 남부 해안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선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코발트색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경이 펼쳐집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5년.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이 전투에서 숨진 사람은 모두 20여만 명.

한국인도 만 5천 명이나 숨졌습니다.

반세기 지난 지금 이곳엔 20만 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공원이 세워졌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져간 한국인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도 세워졌습니다.

1975년 세워진 이 탑 주위에는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28개의 돌이 있습니다.

취재진이 공원을 찾은 이날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 3개국 청소년들이 태평양 전쟁의 흔적을 보기 위해 공원을 방문해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공원 중앙에는 사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1200여 개의 검은 비석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공원 안 검은 비석에는 세계 각국 전사자들의 이름이 촘촘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 사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비석에는 이렇게 많은 부분들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인 신원확인은 지난 95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그해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는 54명뿐이었습니다.

정부의 신원확인 작업은 지지부진했고,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한국인 교수가 발로 뛰며 350여 명의 신원을 찾아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확인된 사람은 전체 만 5천 여명 가운데 고작 4백여 명.

지난해엔 3명, 올해는 단 2명만이 확인됐습니다.

<인터뷰> 류지 스즈키(오키나와 평화네트워크) : "앞으로 한국인 사망자의 명단이 늘어날까요? 이런 식이라면 내년에는 갑자기 명단이 늘어날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인터뷰> 김 결(서울 대일외고 2학년) : "이런 곳까지 끌려와 한국인들이 숨진 것이 안타깝고 학교에서 이런 것들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 것도 아쉽습니다."

지금은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관광지 가운데 하나가 된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 사령부.

미군의 상륙에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한국인 징용자들에 시켜 6km에 달하는 지하벙커와 사령부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벽면엔 징용자들이 사용한 곡괭이와 그 자국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8천 명의 일본군들과 징용된 한국인들은 좁은 지하벙커에서 따닥따닥 붙어 지내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은 진지가 함락되기 직전 독약 주사를 놓아 징용된 한국인을 몰살하고 자신들도 대부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인터뷰> 다이라 요시가즈(구해군사령부호 사업소 소장) : "이 곳은 이제 어린이들에게 평화를 배울 장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슈리성은 오키나와 류큐 왕조의 왕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관광지로 더 유명합니다.

이곳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미군에 밀려 올라온 일본군이 최후의 저항을 계속한 곳입니다.

이제 당시 흔적은 풀과 나무로 뒤덮혔지만 아직도 성 주위에서는 한국인 징용자들이 만든 참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철문으로 굳게 닫힌 채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오키나와로 끌려 온 한국인들이 만든 일본군 참호는 지금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한국인들의 잔흔들.

그러나 정작 조국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고, 이제는 일부 일본인들만이 이들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후루겐 사네요시(77살/오키나와 전투 참가자) : "일본의 잘못된 행위로 한국인들이 오키나와까지 끌려와 생명까지 잃게 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로 광복 61주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갔는지, 노동자와 위안부로 끌려갔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 한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군인과 군속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이 36만 여명, 노동자는 2백만 명 정도로 추정할 뿐입니다.

이렇게 정부의 활동이 지지부진한 동안에도 일본 오키나와에 끌려와 억울하게 숨진 만 5천여 명의 원혼은 아직도 고국을 바라보며 머나먼 타국 땅 하늘을 떠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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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5 특집] 오키나와를 떠도는 만 5천여 명의 원혼들
    • 입력 2006-08-14 08:05:26
    • 수정2006-08-14 09: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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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남부 오키나와하면 절경과 함께 미군 기지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죠. 하지만 바로 이곳에 우리 민족의 원혼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에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노역 등으로 끌려 온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만 5천여명이 전쟁 통에 숨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 대부분의 신원이 확인 조차 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광 복 61주년을 맞아 저희 뉴스타임이 통한의 땅 일본 오키나와 현지를 취재했습니다. 오늘이 그 첫 순섭니다. 홍성철 기자! 오키나와에서 한국인 만 5천여명이 숨졌다는 사실, 참 놀라운데요. 신원 확인 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니 더 충격이네요. <리포트> 만 5천여 명은 각종 문서를 통해 추정하는 숫자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숨졌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문제는 이들조차도 정부 차원의 신원 확인이나 보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서 차로 30분을 달리면 남부 해안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선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코발트색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경이 펼쳐집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5년.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이 전투에서 숨진 사람은 모두 20여만 명. 한국인도 만 5천 명이나 숨졌습니다. 반세기 지난 지금 이곳엔 20만 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공원이 세워졌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져간 한국인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도 세워졌습니다. 1975년 세워진 이 탑 주위에는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28개의 돌이 있습니다. 취재진이 공원을 찾은 이날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 3개국 청소년들이 태평양 전쟁의 흔적을 보기 위해 공원을 방문해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공원 중앙에는 사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1200여 개의 검은 비석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공원 안 검은 비석에는 세계 각국 전사자들의 이름이 촘촘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 사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비석에는 이렇게 많은 부분들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인 신원확인은 지난 95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그해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는 54명뿐이었습니다. 정부의 신원확인 작업은 지지부진했고,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한국인 교수가 발로 뛰며 350여 명의 신원을 찾아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확인된 사람은 전체 만 5천 여명 가운데 고작 4백여 명. 지난해엔 3명, 올해는 단 2명만이 확인됐습니다. <인터뷰> 류지 스즈키(오키나와 평화네트워크) : "앞으로 한국인 사망자의 명단이 늘어날까요? 이런 식이라면 내년에는 갑자기 명단이 늘어날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인터뷰> 김 결(서울 대일외고 2학년) : "이런 곳까지 끌려와 한국인들이 숨진 것이 안타깝고 학교에서 이런 것들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 것도 아쉽습니다." 지금은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관광지 가운데 하나가 된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 사령부. 미군의 상륙에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한국인 징용자들에 시켜 6km에 달하는 지하벙커와 사령부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벽면엔 징용자들이 사용한 곡괭이와 그 자국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8천 명의 일본군들과 징용된 한국인들은 좁은 지하벙커에서 따닥따닥 붙어 지내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은 진지가 함락되기 직전 독약 주사를 놓아 징용된 한국인을 몰살하고 자신들도 대부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인터뷰> 다이라 요시가즈(구해군사령부호 사업소 소장) : "이 곳은 이제 어린이들에게 평화를 배울 장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슈리성은 오키나와 류큐 왕조의 왕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관광지로 더 유명합니다. 이곳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미군에 밀려 올라온 일본군이 최후의 저항을 계속한 곳입니다. 이제 당시 흔적은 풀과 나무로 뒤덮혔지만 아직도 성 주위에서는 한국인 징용자들이 만든 참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철문으로 굳게 닫힌 채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오키나와로 끌려 온 한국인들이 만든 일본군 참호는 지금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한국인들의 잔흔들. 그러나 정작 조국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고, 이제는 일부 일본인들만이 이들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후루겐 사네요시(77살/오키나와 전투 참가자) : "일본의 잘못된 행위로 한국인들이 오키나와까지 끌려와 생명까지 잃게 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로 광복 61주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갔는지, 노동자와 위안부로 끌려갔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 한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군인과 군속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이 36만 여명, 노동자는 2백만 명 정도로 추정할 뿐입니다. 이렇게 정부의 활동이 지지부진한 동안에도 일본 오키나와에 끌려와 억울하게 숨진 만 5천여 명의 원혼은 아직도 고국을 바라보며 머나먼 타국 땅 하늘을 떠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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