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긍연“남같이 해서 남이상 될 수 없다”①
입력 2006.11.03 (19:27)
수정 2006.11.03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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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남 이상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남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황금기, 후보선수라는 침체기, 다시 득점왕이라는 전성기, 갑작스런 은퇴, 사업 실패 등 많은 삶의 기복들이 그를 지금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위, ‘남다른 삶’을 통해 남의 이상이 되려 자신을 채찍질해온 포항스틸러스의 원년 스타 조긍연(현 선문대 축구감독)을 이번 ‘K-리그의 전설’에서 만나보았다.
포항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그는 현재 선문대학교 축구감독으로써 올해 초 자신의 팀을 대학정상( 대학춘계연맹전 1, 2학년 경기)에 올려놓으면서 새로운 지도자로써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조긍연의 현재가 있기까지, 축구인생에 있어 큰 장면들을 그의 이야기와 더불어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개구리의 힘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한 조긍연은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좋아서요.’ 라며 짧지만 단숨에 공감이 가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냥 축구가 좋았어요. 주변에는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는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물론 어려서 운동선수를 한다는 것은 집안사정에서도 쉽지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힘이 주셨죠. 당시에는 학부모들이 축구하는 자녀들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흔하지 않았는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곁에 다니시면서 뒷바라지 해주시고 경기도 봐주셨어요. 정말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는 축구를 위해서 초등학교를 전학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또 5남매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그를 따라다니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과 조긍연의 열정이 K-리그 한 시절을 황금기로 만든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각 스포츠계의 선수들의 가장 큰 힘은 선수들보다 더 고생하는 부모들이라는 점이 다시한번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개구리 많이 먹었었죠.”
갑자기 뜬금없이 그는 개구리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자라날 때는 먹을것이 없어서 그랬던것도 있겠지만 개구리를 정말 많이 먹었어요. 저만큼 개구리 많이 먹어본 사람도 없을 걸요.(웃음) 개구리를 잡는다는 것이 지금은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먹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제 유년시절 축구의 힘은 개구리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구리 많이 있는 철에는 세끼식사 전부를 개구리탕으로 먹었으니 말이죠.”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의 기본이 되는 그의 다리가 ‘개구리의 영양’으로 발달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세한 조리법까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서 80년대 후반 카리스마의 온상 ‘털보’의 이미지는 어느덧 오래 알아온 동네 아저씨 같은 편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단한장의 졸업장 그리고 상경기.
“ 저는 전라북도 옥구가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발산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옥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가 군산제일중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선수 생활에 몸을 담은 것이죠.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바로 직전까지 살았었어요.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서울생활인데 가족이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서울 영등포공업고등학교로 스카웃되면서 저의 서울 생활은 시작 되었죠.
중학교 졸업식이었어요. 당시 영등포공고 감독님과 이상용감독(현 K-리그 주심)님께서 오셔서 트렁크 하나를 여시더니 짐을 싸서 오라는 거예요. 얼떨결에 짐을 싸서 트렁크에 넣으니 서울로 가자고 그러시더군요.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엄청 기대가 되다라고요. 서울로 간다는데, 게다가 이름만 들어봤던 영등포로 간다던데.. 물론 도착해서는 기대만큼 실망도 컸지만요. 제 머릿속에 있던 서울의 이미지와는 달랐어요. 학교도 무슨 큰 공장같았다고 할까요? 작은 학교만 보다가 큰 학교를 보게 되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죠.”
그렇게 졸업식날 졸업장도 받지 못한채 상경한 조긍연은 1학년으로 입학하자마자 주전 공격수로 기용된다.
“영등포공고에 축구선수가 60명이었어요. 1진, 2진, 3진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겠죠? 그런데 신입생이 입학하자마자 1진으로 뛴다고 해봐요. 그 모습을 보는 선배들이 어떻겠어요? 얄미워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운동선수라고 함은 선배들로부터의 체벌이 생활이었어요. 체벌이 조금 약한 팀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심한 팀은 매일 맞았었는데 우스갯소리로 안맞으면 잠이 안오더라고요. 뭐랄까. 저녁에 운동 끝나고 안 맞으면 계속 불안했었거든요. 반대로 운동이 끝난 뒤 딱 맞고 나면 ‘아. 오늘도 하루 마감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개운하더라고요. 잠도 잘오고. 장담하건데 당시에 안 맞고 운동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축구 정신력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그는 선배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가던 그때를 잠시 그리워하는듯 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요즘에는 그런 체벌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다행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정신력도 다소 가벼워진게 사실이고요. 지금 선수들 지도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린선수들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요. 체력은 물론이고 특히 정신력이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좋아요. 자신들이 정신만 바로잡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선수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죠. 조금만 힘들어도 회피한다거나 말이예요. 그중에 정말 열심히 하는 ‘노력파’ 선수들이 박지성같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는데도, 많이 아쉽죠.”
서울 영등포공고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도중 그는 자신이 ‘국졸(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운을 띄우는 것이었다.
“졸업장이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요. 항상 졸업을 하는 순간에는 졸업식장에 없었거든요. 중학교 졸업식때는 갑자기 찾아온 고등학교 감독님 등살에 급하게 짐을 싸서 서울로 와야했고요.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어서 졸업식에 참석 못했고. 대학교 졸업식때에도 또 다른 이유에서 참석 못했었어요. 그러니 정말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죠.(웃음)”
자신의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다며 겸손함을 비춘 그였지만 사실은 뛰어난 기량으로 갖추어진 그를 여러곳에서 급하게 데려가려던 것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국가대표 발탁때문이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고교생 국가대표와 시련.
1980년 춘계전국고교축구연맹전. 조긍연이 속한 영등포공고는 다름아닌 전년도(79년) 우승팀 이리고등학교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비록 그가 결승전까지 올라오며 뽑은 골은 3골이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으로 레프트윙을 말끔히 소화해 내던 그였다. 그런 모습은 당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김정남 코치의 눈에 들게 되면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되게 된다.
“많은 선배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당시 저보다 더 뛰어나고 기량있는 선수들도 많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발탁이 되었어요. 비록 선발된 후에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요.”
그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알려져 있던 선수는 차범근(선발나이 18년 11개월)이었다. 하지만 포철의 최순호(18년 4개월)가 그 최연소기록을 갱신하게 되고, 이어 조긍연은 비록 최순호와 같은 시점이지만 최순호는 이미 청주상고를 졸업. 고려대에 입학한 뒤였기에 고교생으로는 조긍연이 첫 국가대표였던 셈이다.
그런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뒤 합류하게 된 국가대표팀. 평균 7~8세 연장자인 선배들과 부딪히며 훈련하기란 어린나이에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대표생활 1년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결국 대표팀 밖으로 힘겹게 걸어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슬럼프 과정은 고려대 재학시절 4년동안 그를 꾸준히 힘들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으면 갠 날도 있는 법.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85년. 포항제철로 입단을 하면서 그동안 움츠렸던 그의 날개를 다시 펴기 시작한다.
“ 85년에 포항제철로 처음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92년 울산현대 소속으로 1년 뛰기 전까지 계속 포철에 있었죠. 당시의 포철 멤버들이 지금 봐도 베스트 멤버였다고 생각해요. 3년 연속 포철에서 득점왕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죠.”
프로축구의 황금기, ‘축구선수 조긍연’의 황금기.
80년대 후반 프로축구 최고의 준족을 꼽으라면 단연 박경훈, 변병주를 꼽고는 한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신문 일면을 장식하던 젊은 피의 준족 조긍연도 꼽지 않고서는 안 될 듯하다. 프로 데뷔후 100미터를 11초 5의 속도로 상대방 골문 앞을 누비던 그는 제 1의 전성기
인 고교시절의 11초 7보다 더 빨라진 속도를 자랑하며 제 2의 전성기의 시동을 걸었다. 조긍연은 85년부터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에서 통산 153출장 38득점 7도움을 기록한다.
“세번의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어요. 그중 두 개는 제가 득점왕을 받았던 89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지난해인 88년이었어요. ”
그러했던 80년대 후반 그의 전성기에서 그는 총 3번의 해트트릭을 따내며 ‘최고의 스트라이커’ ‘특급소방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9년에는 뭐랄까. 골을 넣겠다는 투지에 불탔었어요. 무조건 3골을 넣어야 하겠다는 집념으로 기회만 찾아냈던 것이죠. 축구에 있어서 슛은 자신이 골을 성공시키려는 의지가 있을때 할 수있는 거예요. 골을 꼭 뽑아내겠다는 의지 없이는 슛을 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안정환선수가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죠. 그만큼 골을 넣을 자신이 있어서 슛할 기회만 노리는 거예요. 그것이 스트라이커니까요. 아무튼 저 역시도 89년 당시 출장만 하면 무조건 3골을 넣겠다고 이를 악물고 들어갔었어요. 그렇게 해서 39번 출장에 20골을 넣게 된거죠. 또 그러다 보니 해트트릭도 하게 되었고요.”
그렇다. 결국 전성기인 89년에 그는 일을 터트리고 만다. 39출장 20득점 117슛팅. 유럽리그 진출의 가능성까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특급소방수 조긍연’은 당시 축구계의 가장 큰 화제거리였다. 혹자의 말로는 한달동안 스포츠 신문에 ‘조긍연’이라는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전성기는 아니었다. 데뷔 첫해인 85년에 그는 89년 득점왕과는 비교될만하게 2골만을 기록한 채 한해를 마감해야했다. 연봉삭감과 질책. 아니 무엇보다 그를 자극했던 것은 가슴속의 또 다른 목표였을까. 86년이 시작하자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고 최고점인 89년에 드디어 ‘득점왕’에 등극하게 된다.
또 차범근 감독을 통한 분데스리가 진출 가능성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등 크나큰 화제거리를 매일 쏟아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시점을 기해서 그는 선수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어느덧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외진출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해한해 지나며 어느덧 30대로 들어선 조긍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92년 프로축구선수생활 은퇴. 91년 친정팀 포철을 떠나 울산현대로 이적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허리디스크에 그는 등번호를 떼어내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생각하시는 만큼 저는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녜요. 그냥 한때 득점왕 한번 받은 것이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그런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에는 겸손함이 묻어있었다.
[한국프로축구연맹/K-리그 명예기자 윤진식]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남 이상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남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황금기, 후보선수라는 침체기, 다시 득점왕이라는 전성기, 갑작스런 은퇴, 사업 실패 등 많은 삶의 기복들이 그를 지금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위, ‘남다른 삶’을 통해 남의 이상이 되려 자신을 채찍질해온 포항스틸러스의 원년 스타 조긍연(현 선문대 축구감독)을 이번 ‘K-리그의 전설’에서 만나보았다.
포항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그는 현재 선문대학교 축구감독으로써 올해 초 자신의 팀을 대학정상( 대학춘계연맹전 1, 2학년 경기)에 올려놓으면서 새로운 지도자로써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조긍연의 현재가 있기까지, 축구인생에 있어 큰 장면들을 그의 이야기와 더불어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개구리의 힘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한 조긍연은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좋아서요.’ 라며 짧지만 단숨에 공감이 가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냥 축구가 좋았어요. 주변에는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는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물론 어려서 운동선수를 한다는 것은 집안사정에서도 쉽지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힘이 주셨죠. 당시에는 학부모들이 축구하는 자녀들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흔하지 않았는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곁에 다니시면서 뒷바라지 해주시고 경기도 봐주셨어요. 정말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는 축구를 위해서 초등학교를 전학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또 5남매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그를 따라다니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과 조긍연의 열정이 K-리그 한 시절을 황금기로 만든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각 스포츠계의 선수들의 가장 큰 힘은 선수들보다 더 고생하는 부모들이라는 점이 다시한번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개구리 많이 먹었었죠.”
갑자기 뜬금없이 그는 개구리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자라날 때는 먹을것이 없어서 그랬던것도 있겠지만 개구리를 정말 많이 먹었어요. 저만큼 개구리 많이 먹어본 사람도 없을 걸요.(웃음) 개구리를 잡는다는 것이 지금은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먹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제 유년시절 축구의 힘은 개구리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구리 많이 있는 철에는 세끼식사 전부를 개구리탕으로 먹었으니 말이죠.”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의 기본이 되는 그의 다리가 ‘개구리의 영양’으로 발달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세한 조리법까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서 80년대 후반 카리스마의 온상 ‘털보’의 이미지는 어느덧 오래 알아온 동네 아저씨 같은 편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단한장의 졸업장 그리고 상경기.
“ 저는 전라북도 옥구가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발산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옥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가 군산제일중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선수 생활에 몸을 담은 것이죠.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바로 직전까지 살았었어요.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서울생활인데 가족이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서울 영등포공업고등학교로 스카웃되면서 저의 서울 생활은 시작 되었죠.
중학교 졸업식이었어요. 당시 영등포공고 감독님과 이상용감독(현 K-리그 주심)님께서 오셔서 트렁크 하나를 여시더니 짐을 싸서 오라는 거예요. 얼떨결에 짐을 싸서 트렁크에 넣으니 서울로 가자고 그러시더군요.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엄청 기대가 되다라고요. 서울로 간다는데, 게다가 이름만 들어봤던 영등포로 간다던데.. 물론 도착해서는 기대만큼 실망도 컸지만요. 제 머릿속에 있던 서울의 이미지와는 달랐어요. 학교도 무슨 큰 공장같았다고 할까요? 작은 학교만 보다가 큰 학교를 보게 되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죠.”
그렇게 졸업식날 졸업장도 받지 못한채 상경한 조긍연은 1학년으로 입학하자마자 주전 공격수로 기용된다.
“영등포공고에 축구선수가 60명이었어요. 1진, 2진, 3진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겠죠? 그런데 신입생이 입학하자마자 1진으로 뛴다고 해봐요. 그 모습을 보는 선배들이 어떻겠어요? 얄미워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운동선수라고 함은 선배들로부터의 체벌이 생활이었어요. 체벌이 조금 약한 팀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심한 팀은 매일 맞았었는데 우스갯소리로 안맞으면 잠이 안오더라고요. 뭐랄까. 저녁에 운동 끝나고 안 맞으면 계속 불안했었거든요. 반대로 운동이 끝난 뒤 딱 맞고 나면 ‘아. 오늘도 하루 마감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개운하더라고요. 잠도 잘오고. 장담하건데 당시에 안 맞고 운동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축구 정신력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그는 선배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가던 그때를 잠시 그리워하는듯 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요즘에는 그런 체벌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다행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정신력도 다소 가벼워진게 사실이고요. 지금 선수들 지도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린선수들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요. 체력은 물론이고 특히 정신력이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좋아요. 자신들이 정신만 바로잡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선수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죠. 조금만 힘들어도 회피한다거나 말이예요. 그중에 정말 열심히 하는 ‘노력파’ 선수들이 박지성같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는데도, 많이 아쉽죠.”
서울 영등포공고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도중 그는 자신이 ‘국졸(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운을 띄우는 것이었다.
“졸업장이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요. 항상 졸업을 하는 순간에는 졸업식장에 없었거든요. 중학교 졸업식때는 갑자기 찾아온 고등학교 감독님 등살에 급하게 짐을 싸서 서울로 와야했고요.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어서 졸업식에 참석 못했고. 대학교 졸업식때에도 또 다른 이유에서 참석 못했었어요. 그러니 정말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죠.(웃음)”
자신의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다며 겸손함을 비춘 그였지만 사실은 뛰어난 기량으로 갖추어진 그를 여러곳에서 급하게 데려가려던 것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국가대표 발탁때문이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고교생 국가대표와 시련.
1980년 춘계전국고교축구연맹전. 조긍연이 속한 영등포공고는 다름아닌 전년도(79년) 우승팀 이리고등학교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비록 그가 결승전까지 올라오며 뽑은 골은 3골이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으로 레프트윙을 말끔히 소화해 내던 그였다. 그런 모습은 당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김정남 코치의 눈에 들게 되면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되게 된다.
“많은 선배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당시 저보다 더 뛰어나고 기량있는 선수들도 많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발탁이 되었어요. 비록 선발된 후에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요.”
그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알려져 있던 선수는 차범근(선발나이 18년 11개월)이었다. 하지만 포철의 최순호(18년 4개월)가 그 최연소기록을 갱신하게 되고, 이어 조긍연은 비록 최순호와 같은 시점이지만 최순호는 이미 청주상고를 졸업. 고려대에 입학한 뒤였기에 고교생으로는 조긍연이 첫 국가대표였던 셈이다.
그런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뒤 합류하게 된 국가대표팀. 평균 7~8세 연장자인 선배들과 부딪히며 훈련하기란 어린나이에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대표생활 1년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결국 대표팀 밖으로 힘겹게 걸어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슬럼프 과정은 고려대 재학시절 4년동안 그를 꾸준히 힘들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으면 갠 날도 있는 법.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85년. 포항제철로 입단을 하면서 그동안 움츠렸던 그의 날개를 다시 펴기 시작한다.
“ 85년에 포항제철로 처음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92년 울산현대 소속으로 1년 뛰기 전까지 계속 포철에 있었죠. 당시의 포철 멤버들이 지금 봐도 베스트 멤버였다고 생각해요. 3년 연속 포철에서 득점왕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죠.”
프로축구의 황금기, ‘축구선수 조긍연’의 황금기.
80년대 후반 프로축구 최고의 준족을 꼽으라면 단연 박경훈, 변병주를 꼽고는 한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신문 일면을 장식하던 젊은 피의 준족 조긍연도 꼽지 않고서는 안 될 듯하다. 프로 데뷔후 100미터를 11초 5의 속도로 상대방 골문 앞을 누비던 그는 제 1의 전성기
인 고교시절의 11초 7보다 더 빨라진 속도를 자랑하며 제 2의 전성기의 시동을 걸었다. 조긍연은 85년부터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에서 통산 153출장 38득점 7도움을 기록한다.
“세번의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어요. 그중 두 개는 제가 득점왕을 받았던 89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지난해인 88년이었어요. ”
그러했던 80년대 후반 그의 전성기에서 그는 총 3번의 해트트릭을 따내며 ‘최고의 스트라이커’ ‘특급소방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9년에는 뭐랄까. 골을 넣겠다는 투지에 불탔었어요. 무조건 3골을 넣어야 하겠다는 집념으로 기회만 찾아냈던 것이죠. 축구에 있어서 슛은 자신이 골을 성공시키려는 의지가 있을때 할 수있는 거예요. 골을 꼭 뽑아내겠다는 의지 없이는 슛을 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안정환선수가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죠. 그만큼 골을 넣을 자신이 있어서 슛할 기회만 노리는 거예요. 그것이 스트라이커니까요. 아무튼 저 역시도 89년 당시 출장만 하면 무조건 3골을 넣겠다고 이를 악물고 들어갔었어요. 그렇게 해서 39번 출장에 20골을 넣게 된거죠. 또 그러다 보니 해트트릭도 하게 되었고요.”
그렇다. 결국 전성기인 89년에 그는 일을 터트리고 만다. 39출장 20득점 117슛팅. 유럽리그 진출의 가능성까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특급소방수 조긍연’은 당시 축구계의 가장 큰 화제거리였다. 혹자의 말로는 한달동안 스포츠 신문에 ‘조긍연’이라는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전성기는 아니었다. 데뷔 첫해인 85년에 그는 89년 득점왕과는 비교될만하게 2골만을 기록한 채 한해를 마감해야했다. 연봉삭감과 질책. 아니 무엇보다 그를 자극했던 것은 가슴속의 또 다른 목표였을까. 86년이 시작하자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고 최고점인 89년에 드디어 ‘득점왕’에 등극하게 된다.
또 차범근 감독을 통한 분데스리가 진출 가능성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등 크나큰 화제거리를 매일 쏟아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시점을 기해서 그는 선수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어느덧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외진출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해한해 지나며 어느덧 30대로 들어선 조긍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92년 프로축구선수생활 은퇴. 91년 친정팀 포철을 떠나 울산현대로 이적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허리디스크에 그는 등번호를 떼어내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생각하시는 만큼 저는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녜요. 그냥 한때 득점왕 한번 받은 것이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그런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에는 겸손함이 묻어있었다.
[한국프로축구연맹/K-리그 명예기자 윤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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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긍연“남같이 해서 남이상 될 수 없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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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06-11-03 19:27:44
- 수정2006-11-03 22:11:17
‘남과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남 이상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남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황금기, 후보선수라는 침체기, 다시 득점왕이라는 전성기, 갑작스런 은퇴, 사업 실패 등 많은 삶의 기복들이 그를 지금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위, ‘남다른 삶’을 통해 남의 이상이 되려 자신을 채찍질해온 포항스틸러스의 원년 스타 조긍연(현 선문대 축구감독)을 이번 ‘K-리그의 전설’에서 만나보았다.
포항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그는 현재 선문대학교 축구감독으로써 올해 초 자신의 팀을 대학정상( 대학춘계연맹전 1, 2학년 경기)에 올려놓으면서 새로운 지도자로써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조긍연의 현재가 있기까지, 축구인생에 있어 큰 장면들을 그의 이야기와 더불어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개구리의 힘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한 조긍연은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좋아서요.’ 라며 짧지만 단숨에 공감이 가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냥 축구가 좋았어요. 주변에는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는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물론 어려서 운동선수를 한다는 것은 집안사정에서도 쉽지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힘이 주셨죠. 당시에는 학부모들이 축구하는 자녀들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흔하지 않았는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곁에 다니시면서 뒷바라지 해주시고 경기도 봐주셨어요. 정말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는 축구를 위해서 초등학교를 전학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또 5남매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그를 따라다니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과 조긍연의 열정이 K-리그 한 시절을 황금기로 만든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각 스포츠계의 선수들의 가장 큰 힘은 선수들보다 더 고생하는 부모들이라는 점이 다시한번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개구리 많이 먹었었죠.”
갑자기 뜬금없이 그는 개구리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자라날 때는 먹을것이 없어서 그랬던것도 있겠지만 개구리를 정말 많이 먹었어요. 저만큼 개구리 많이 먹어본 사람도 없을 걸요.(웃음) 개구리를 잡는다는 것이 지금은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먹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제 유년시절 축구의 힘은 개구리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구리 많이 있는 철에는 세끼식사 전부를 개구리탕으로 먹었으니 말이죠.”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의 기본이 되는 그의 다리가 ‘개구리의 영양’으로 발달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세한 조리법까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서 80년대 후반 카리스마의 온상 ‘털보’의 이미지는 어느덧 오래 알아온 동네 아저씨 같은 편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단한장의 졸업장 그리고 상경기.
“ 저는 전라북도 옥구가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발산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옥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가 군산제일중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선수 생활에 몸을 담은 것이죠.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바로 직전까지 살았었어요.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서울생활인데 가족이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서울 영등포공업고등학교로 스카웃되면서 저의 서울 생활은 시작 되었죠.
중학교 졸업식이었어요. 당시 영등포공고 감독님과 이상용감독(현 K-리그 주심)님께서 오셔서 트렁크 하나를 여시더니 짐을 싸서 오라는 거예요. 얼떨결에 짐을 싸서 트렁크에 넣으니 서울로 가자고 그러시더군요.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엄청 기대가 되다라고요. 서울로 간다는데, 게다가 이름만 들어봤던 영등포로 간다던데.. 물론 도착해서는 기대만큼 실망도 컸지만요. 제 머릿속에 있던 서울의 이미지와는 달랐어요. 학교도 무슨 큰 공장같았다고 할까요? 작은 학교만 보다가 큰 학교를 보게 되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죠.”
그렇게 졸업식날 졸업장도 받지 못한채 상경한 조긍연은 1학년으로 입학하자마자 주전 공격수로 기용된다.
“영등포공고에 축구선수가 60명이었어요. 1진, 2진, 3진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겠죠? 그런데 신입생이 입학하자마자 1진으로 뛴다고 해봐요. 그 모습을 보는 선배들이 어떻겠어요? 얄미워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운동선수라고 함은 선배들로부터의 체벌이 생활이었어요. 체벌이 조금 약한 팀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심한 팀은 매일 맞았었는데 우스갯소리로 안맞으면 잠이 안오더라고요. 뭐랄까. 저녁에 운동 끝나고 안 맞으면 계속 불안했었거든요. 반대로 운동이 끝난 뒤 딱 맞고 나면 ‘아. 오늘도 하루 마감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개운하더라고요. 잠도 잘오고. 장담하건데 당시에 안 맞고 운동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축구 정신력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그는 선배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가던 그때를 잠시 그리워하는듯 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요즘에는 그런 체벌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다행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정신력도 다소 가벼워진게 사실이고요. 지금 선수들 지도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린선수들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요. 체력은 물론이고 특히 정신력이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좋아요. 자신들이 정신만 바로잡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선수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죠. 조금만 힘들어도 회피한다거나 말이예요. 그중에 정말 열심히 하는 ‘노력파’ 선수들이 박지성같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는데도, 많이 아쉽죠.”
서울 영등포공고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도중 그는 자신이 ‘국졸(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운을 띄우는 것이었다.
“졸업장이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요. 항상 졸업을 하는 순간에는 졸업식장에 없었거든요. 중학교 졸업식때는 갑자기 찾아온 고등학교 감독님 등살에 급하게 짐을 싸서 서울로 와야했고요.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어서 졸업식에 참석 못했고. 대학교 졸업식때에도 또 다른 이유에서 참석 못했었어요. 그러니 정말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죠.(웃음)”
자신의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다며 겸손함을 비춘 그였지만 사실은 뛰어난 기량으로 갖추어진 그를 여러곳에서 급하게 데려가려던 것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국가대표 발탁때문이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고교생 국가대표와 시련.
1980년 춘계전국고교축구연맹전. 조긍연이 속한 영등포공고는 다름아닌 전년도(79년) 우승팀 이리고등학교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비록 그가 결승전까지 올라오며 뽑은 골은 3골이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으로 레프트윙을 말끔히 소화해 내던 그였다. 그런 모습은 당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김정남 코치의 눈에 들게 되면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되게 된다.
“많은 선배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당시 저보다 더 뛰어나고 기량있는 선수들도 많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발탁이 되었어요. 비록 선발된 후에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요.”
그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알려져 있던 선수는 차범근(선발나이 18년 11개월)이었다. 하지만 포철의 최순호(18년 4개월)가 그 최연소기록을 갱신하게 되고, 이어 조긍연은 비록 최순호와 같은 시점이지만 최순호는 이미 청주상고를 졸업. 고려대에 입학한 뒤였기에 고교생으로는 조긍연이 첫 국가대표였던 셈이다.
그런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뒤 합류하게 된 국가대표팀. 평균 7~8세 연장자인 선배들과 부딪히며 훈련하기란 어린나이에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대표생활 1년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결국 대표팀 밖으로 힘겹게 걸어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슬럼프 과정은 고려대 재학시절 4년동안 그를 꾸준히 힘들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으면 갠 날도 있는 법.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85년. 포항제철로 입단을 하면서 그동안 움츠렸던 그의 날개를 다시 펴기 시작한다.
“ 85년에 포항제철로 처음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92년 울산현대 소속으로 1년 뛰기 전까지 계속 포철에 있었죠. 당시의 포철 멤버들이 지금 봐도 베스트 멤버였다고 생각해요. 3년 연속 포철에서 득점왕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죠.”
프로축구의 황금기, ‘축구선수 조긍연’의 황금기.
80년대 후반 프로축구 최고의 준족을 꼽으라면 단연 박경훈, 변병주를 꼽고는 한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신문 일면을 장식하던 젊은 피의 준족 조긍연도 꼽지 않고서는 안 될 듯하다. 프로 데뷔후 100미터를 11초 5의 속도로 상대방 골문 앞을 누비던 그는 제 1의 전성기
인 고교시절의 11초 7보다 더 빨라진 속도를 자랑하며 제 2의 전성기의 시동을 걸었다. 조긍연은 85년부터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에서 통산 153출장 38득점 7도움을 기록한다.
“세번의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어요. 그중 두 개는 제가 득점왕을 받았던 89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지난해인 88년이었어요. ”
그러했던 80년대 후반 그의 전성기에서 그는 총 3번의 해트트릭을 따내며 ‘최고의 스트라이커’ ‘특급소방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9년에는 뭐랄까. 골을 넣겠다는 투지에 불탔었어요. 무조건 3골을 넣어야 하겠다는 집념으로 기회만 찾아냈던 것이죠. 축구에 있어서 슛은 자신이 골을 성공시키려는 의지가 있을때 할 수있는 거예요. 골을 꼭 뽑아내겠다는 의지 없이는 슛을 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안정환선수가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죠. 그만큼 골을 넣을 자신이 있어서 슛할 기회만 노리는 거예요. 그것이 스트라이커니까요. 아무튼 저 역시도 89년 당시 출장만 하면 무조건 3골을 넣겠다고 이를 악물고 들어갔었어요. 그렇게 해서 39번 출장에 20골을 넣게 된거죠. 또 그러다 보니 해트트릭도 하게 되었고요.”
그렇다. 결국 전성기인 89년에 그는 일을 터트리고 만다. 39출장 20득점 117슛팅. 유럽리그 진출의 가능성까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특급소방수 조긍연’은 당시 축구계의 가장 큰 화제거리였다. 혹자의 말로는 한달동안 스포츠 신문에 ‘조긍연’이라는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전성기는 아니었다. 데뷔 첫해인 85년에 그는 89년 득점왕과는 비교될만하게 2골만을 기록한 채 한해를 마감해야했다. 연봉삭감과 질책. 아니 무엇보다 그를 자극했던 것은 가슴속의 또 다른 목표였을까. 86년이 시작하자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고 최고점인 89년에 드디어 ‘득점왕’에 등극하게 된다.
또 차범근 감독을 통한 분데스리가 진출 가능성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등 크나큰 화제거리를 매일 쏟아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시점을 기해서 그는 선수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어느덧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외진출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해한해 지나며 어느덧 30대로 들어선 조긍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92년 프로축구선수생활 은퇴. 91년 친정팀 포철을 떠나 울산현대로 이적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허리디스크에 그는 등번호를 떼어내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생각하시는 만큼 저는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녜요. 그냥 한때 득점왕 한번 받은 것이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그런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에는 겸손함이 묻어있었다.
[한국프로축구연맹/K-리그 명예기자 윤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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