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전 국무총리 별세

입력 2007.04.26 (11:15) 수정 2007.04.2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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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전 국무총리 별세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신 전 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보통학교와 경성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생활을 시작한 신 전 총리는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과시했다. 국장시절에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실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1959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4.19혁명 직후에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동해전력.쌍용양회.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1973년에는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으며 75년에 보건사회부 장관, 78년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정부.정치.경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 작년초 입원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73년에 금탄산업훈장, 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5일간 사회장으로 엄수되며 대전 현충원에 안치된다. 장례위원장은 남덕우 전 총리가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b>‘현대사 증인’ 신현확, 역사 속으로</b> 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조문객 이어지는 故 신현확 전총리 빈소 27일 오후 조문객들이 지난 26일 별세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故 신총리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박근혜 전대표, 故 신현확 전총리 빈소 조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7일 오후 지난 26일 별세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故 신 전총리의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신 전 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보통학교와 경성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생활을 시작한 신 전 총리는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과시했다. 국장시절에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실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1959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4.19혁명 직후에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동해전력.쌍용양회.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1973년에는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으며 75년에 보건사회부 장관, 78년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정부.정치.경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 작년초 입원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73년에 금탄산업훈장, 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5일간 사회장으로 엄수되며 대전 현충원에 안치된다. 장례위원장은 남덕우 전 총리가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현대사 증인’ 신현확, 역사 속으로
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서 3년을 보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임용된 뒤 고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1959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재계에 몸을 담았던 그가 다시 관계에 복귀한 것은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1973년 9대 총선이 계기가 됐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됐고,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국무총리로 임명된 그의 행적에 대해선 당시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사를 표현해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고, 이에 따라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거나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980년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모인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전두환(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과 신 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지난 1995년 검찰의 12.12 수사과정에서는 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직 겸직을 반대하는 등 신군부의 무리한 요구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의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총리직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그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지난 1986년엔 삼성물산 회장으로 임명돼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재임시절인 지난 1988년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지난 1999년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추진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같은 해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기업윤리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등 말년까지 쉬지않고 활동했다.
유족으론 외아들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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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현확 전 국무총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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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신 전 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보통학교와 경성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생활을 시작한 신 전 총리는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과시했다. 국장시절에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실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1959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4.19혁명 직후에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동해전력.쌍용양회.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1973년에는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으며 75년에 보건사회부 장관, 78년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정부.정치.경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 작년초 입원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73년에 금탄산업훈장, 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5일간 사회장으로 엄수되며 대전 현충원에 안치된다. 장례위원장은 남덕우 전 총리가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b>‘현대사 증인’ 신현확, 역사 속으로</b> 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신 전 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보통학교와 경성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생활을 시작한 신 전 총리는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과시했다. 국장시절에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실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1959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4.19혁명 직후에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동해전력.쌍용양회.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1973년에는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으며 75년에 보건사회부 장관, 78년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정부.정치.경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 작년초 입원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73년에 금탄산업훈장, 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5일간 사회장으로 엄수되며 대전 현충원에 안치된다. 장례위원장은 남덕우 전 총리가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b>‘현대사 증인’ 신현확, 역사 속으로</b> 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신 전 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보통학교와 경성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생활을 시작한 신 전 총리는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과시했다. 국장시절에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실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1959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4.19혁명 직후에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동해전력.쌍용양회.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1973년에는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으며 75년에 보건사회부 장관, 78년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정부.정치.경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 작년초 입원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73년에 금탄산업훈장, 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5일간 사회장으로 엄수되며 대전 현충원에 안치된다. 장례위원장은 남덕우 전 총리가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b>‘현대사 증인’ 신현확, 역사 속으로</b> 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신 전 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보통학교와 경성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생활을 시작한 신 전 총리는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과시했다. 국장시절에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실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1959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4.19혁명 직후에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동해전력.쌍용양회.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1973년에는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으며 75년에 보건사회부 장관, 78년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정부.정치.경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 작년초 입원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73년에 금탄산업훈장, 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은 5일간 사회장으로 엄수되며 대전 현충원에 안치된다. 장례위원장은 남덕우 전 총리가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현대사 증인’ 신현확, 역사 속으로 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서 3년을 보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임용된 뒤 고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1959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재계에 몸을 담았던 그가 다시 관계에 복귀한 것은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1973년 9대 총선이 계기가 됐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됐고,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국무총리로 임명된 그의 행적에 대해선 당시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사를 표현해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고, 이에 따라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거나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980년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모인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전두환(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과 신 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지난 1995년 검찰의 12.12 수사과정에서는 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직 겸직을 반대하는 등 신군부의 무리한 요구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의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총리직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그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지난 1986년엔 삼성물산 회장으로 임명돼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재임시절인 지난 1988년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지난 1999년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추진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같은 해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기업윤리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등 말년까지 쉬지않고 활동했다. 유족으론 외아들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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