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항쟁 특집]① 각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입력 2007.06.10 (14:57) 수정 2007.06.1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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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영상자료실.

이곳에는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개되지 못한 영상 기록물들이 있다.

영상의 주요 등장인물은 80년대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군부 독재의 수장과 그 측근들...

<녹취> "한 잔 더 하고 갈까?"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은 권력 앞에 충성을 다 바쳤던 방송이다.

대통령 각.하.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상 자료들, 권력과 방송의 추악한 야합. 그 참담한 기록을 공개한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도 봇물 터지 듯 분출된 민주화의 열망을 잠재울 순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독재 정권 타도. 거리로 나선 시민, 학생들은 하나였고, 민중의 힘은 5공 정권을 굴복시켰다.

<녹취> 노태우(전 민정당 대표위원/1987.6.29) :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우리나라 장래 문제 굳은 신념 갖게 됐다."

KBS는 그러나, 쫓겨나는 순간까지 독재자를 초지일관 찬양했다.

<녹취> 역사를 세운 큰 약속 - 단임의지(1988.2.24.KBS) : "보내는 마음 떠나는 마음이 교차하는 이 순간에 우리는 한 지도자의 초지일관한 신념의 완성과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봅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 퇴임만찬(1988.2.24) : "각하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록되고 찬양될 것입니다."

전두환의 청와대 마지막 밤, KBS는 퇴임만찬을 9시 뉴스에 20분이나 내보냈다.

<녹취> "본인은 오늘 제12대 대통령 임기 끝마치고 고별의 인사 말씀 이 자리에 섰다."

유명 시인이 독재자에게 바치는 송시가 만찬장에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녹취> "그동안 국정 위하여 촌각 쉬지않는 님의 그 정력 열 성 그 용단으로 하여 국운은 날로 선진을 바라고 도약해 갔습니다.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하소서."

쫓겨나듯 퇴임하는 군부 정권의 뒷모습에까지 방송은 그렇게 예를 다 갖췄다.

그 즈음,청와대에 있던 수백 개의 비디오테이프와 필름이 KBS 영상 자료실에 전달됐다.

<인터뷰> 신영규(부장) "굉장히 많은 양의 테잎이 넘와서 저희가 그 때 당시, 그것을 누가 보면 안 된다고
해서 이중 캐비넷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전두환 대통령 기념관 만들 적에 그때까지 보관을 해 달라. 이런 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때 까지 저희가 쭉 보관을 했었죠."

그 이후 이 청와대 이관 영상물에는 전두환 관련 자료라는 딱지가 붙었다.

최근 디지털화 작업을 거친 영상물은 60분 테잎 170여 개 분량. 그러나 20년 동안 대출금지로 묶여 있었다.

극히 일부만 그 존재를 알았던 이 청와대 이관 영상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녹취> 보안뉴스(대장진급 및 축하다과회/1980.8.5) : "자, 준비가 다되셨습니까? 그러면 다같이 건배합시다. 사령관님의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가 내부용으로 제작한 이 보안뉴스 화면은 화질이 나쁘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녹취> "여러분들 덕분에 대장으로 승진의 영광 안았다. 제가 오늘 사성장군이 된 것은 군에 여러 가지 인사법상으로나 절차법상으로는, 불가능 한 것이고, 오로지 이 자리에 참석하신 수경사, 특전사, 각급 지휘관을 위주로 해서 국보위, 그리고 보안부대, 주위에 있는 여러 간부와 전 장병들이 진심으로 국가를 위하는 호국정신에서 여러분들이 모든 난국을 수습하는데 자기희생은 조금도 밝히지 않은 그 대가를 본인이 죄송스럽게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대장 진급이 불법임을 밝히는 최초의 영상기록인 동시에, 쿠데타 세력의 권력찬탈 의지를 확인케 한다.

<녹취> "우리 앞에 산적해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은 책임감과 열렬한 사명감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회장) : "지금 봤잖습니까. 1212로 인해 자기가 별4개 다는 것은 말하자면 합법적은 아니다 거기다 정통성이 없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자네들이 해서 난 된 거다. 그래 끝까지 책임져 그 대신 내가 봐 줄 테니까 이건 완전히 깡패세계죠. 이것은 두목이 야 나를 했으니 앞으로 이유 없이 다 봐줄게 거기 있는 사람들 자 장관하고 다들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그렇게 다 보장했거든요."

청와대 이관 자료에는 대장 진급 파티 등 모두 19편의 보안뉴스가 들어 있다.

기무사의 전신인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통신과가 제작한이 보안뉴스는, 10.26 이후 전두환의 정권 찬탈을 향한 행보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내부용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당시 쿠데타 세력의 각종 파티와 회의 등 내밀한 모습이 가감없이 담겨있다.

지난 90년대에 공개돼 국민을 분노케 했던, 12.12 직후 쿠데타 세력의 샴페인 파티 장면도 바로 이 보안 뉴스에 들어 있었다.

정치군인의 보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 세력은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갈 때마다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 결속력을 다졌다.

12.12 성공 샴페인 파티 며칠 뒤, 또다시 79년 송년 파티가 열렸다.

<녹취> "군의 여러 가지 의혹과 국민들로부터 뭔가 석연치 않다는 내용이 일종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지만 충격적인 군사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우리 사회는 불안감에 얼어붙었지만 이들만의 건배는 이어졌고, 휘하 장교들은 권력의 단 맛을 한껏 즐겼다.

<녹취> "기회주의적인 일부 군 장성들의 반국가적인 행위... 왜곡된 악성 유언비어가 군 내외 일각에 잔존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1980년 새해, 유신독재의 종말 이후 민주화의 열망은 더 없이 높아갔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군 내부의 동요과 민심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권력 핵심에 한발한발 다가섰다.

<인터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회장) : "누가 세면 그쪽에 가서 붙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언론과 정치인들이 당시에 누가 실세냐 누가 이 난국을 잡을 거란 물리적인 힘을 가진 군대인데 그 중에 누가 실세냐 하고 우리 제가 대령 때인데요. 그때 기자들도 되게 관심이 많았어요. 전두환이 이제 기무사를 장악하고 있고 겸해서 우리 중앙정보부 당시에 장악하게 되고 하니까 그 쪽으로 사람이 물밀듯이 몰렸죠."

새로운 권력을 감지한 방송사도 재빨리 추파를 던졌다.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난 지 불과 일주일 후, MBC는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위문공연을 마련했다.

인기 연예인을 동원해 쿠데타 세력 위문공연을 펼친 MBC는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녹취> "귀사는 평소 국가 총력안보와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특히 연말을 맞아 당 부대 장병 위문 이에 감사..."

80년 1월 23일자 보안뉴스. 쿠데타 세력의 초호화판 파티는 계속됐다. 인기 연예인도 어김없이 초청됐다.

휘하 장교와 그 가족들을 다독이고 결속을 다졌다. 연예인들의 큰 절을 받으며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곧 민주화가 오리라던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은 무참히 깨졌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모든 정치 활동을 봉쇄했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광주를 완전 진압한 직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초법적인 기구를 만들어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지 불과 3주 만에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국보위 파티가 열렸다.

이제 노골적으로 정치전면에 나선 신군부는 또 자축의 건배를 들었다.

이번에는 TBC 방송사의 관현악단이 파티의 흥을 돋웠다.

광주를 총칼로 살육한 후, 신군부와 방송사, 그들만의 파티를 보안뉴스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전두환 대장이 군복을 벗은 8월22일, KBS는 새 권력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유례없이 군 장성의 전역식이 중계됐다.

새 지도자를 향해 방송뿐 아니라 모든 신문도 신화 창조에 앞 다퉈 나섰다.

경향신문은 나흘간에 걸쳐 연재기사를 실었다.

출생부터 학창시절, 육사생도시절을 되짚으며 전두환을 새역사 창조의 선도자로 부각시켰다.

전두환 대장의 전역 다음날 각 일간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로 새 지도자를 찬양했다.

인간 전두환은 기사에서 신격화됐고, 쿠데타의 지도자는 민족의 영도자로 둔갑했다.

언론의 충성 경쟁 속에서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의 전력은 사라져 갔다.

<인터뷰> 전규찬(교수) :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 주류 매체는 신문 방송 할 거 없이 기회주의적 매체라고 봅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보면 끊임없이 시대적 정치적 역학이 움직임에 따라서 미디어는 그쪽 추종하고 또 바뀌면 따라가고 합니다. 늘 한 2스텝 정도 뒤에서 시대 상황 빨리 읽어 내면서 가는 거죠 상당히 눈치 빠른 신문과 방송 역사 였다. 그런 식으로 정치적 헤게모니 쫓아가는 그런 신문방송 역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녹취> "대통령으로서 직책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1981년3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 12대 대통령 전두환의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방송의 충성 경쟁은 더욱 노골화됐다.

청와대 이관 영상자료는 갈 데까지 간 방송의 행태를 잘 보여준다.

MBC 보도국이란 글자가 선명한 타이틀 화면.

지난 1982년, 청와대에서 열린 전두환 대통령의 51회 생일 축하 파티.

이른바 생신기념 화면은 MBC가 찍고 편집 제작했다.

<녹취> 이순자 : "그런 것 찍지 말지요. (보도용이 아니라 보관하시도록 비디오에 담는 겁니다.) 네."

<녹취> "각하께 말씀 안 드렸어. 그냥 내려와서 갑작스럽게 즐거움 드리려고 전혀 말씀을 안 드렸거든요."

청와대 비서실과 출입 기자단이 준비한 깜짝 생일 파티를 담기 위해 방송국 카메라와 제작 인력이 동원된 것이다.

<녹취> "생신을 맞이해서 각하 내외분 만수무강과 각하 영도하에 이룩될 우리 조국의 무궁한 번영을 축원하는 뜻에서 건배 건의드리겠습니다."

각하의 말씀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는 분주히 움직였다.

<녹취> "음력으로 52살 양력으로 51살. 이왕이면 나이 적은 걸로 하는 게 좋잖아."

생일 파티장에 둘러 쳐진 무궁화 병풍에는 한국기자협회원 일동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각 언론사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각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녹취> "동남아 갔을 때 그 더운데 무거운 거 짊어지시고 우리 가는데 마다 뛰어다니시느라 참 모두들 고생들 많으셨다."

영부인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도 빠지지 않았다.

대통령 개인의 대소사까지 성실히 챙겨 바치는 것이 당시 방송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인터뷰> 박용규(교수) : "언론사 언론인들 권력과 밀착되는 방식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지난 세월 군사 정권 기간 동안 보면 굉장히 사적인 여러 가지 형태의 결탁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사실 청와대 영상자료실 같은 데서 행사를 찍어서 편집해야 될 것과 같은 일을 지상파 방송사에서 했다는 것인데 이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5공화국 시절, 권력에 대한 방송의 봉사는 단순히 대통령 개인.에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의 집안 행사들은 방송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촬영 현장이었다.

1985년 전두환의 장녀 결혼식은 KBS가 촬영하고 기념 비디오로 제작해 상납했다.

신부 입장을 측면과 정면에서 동시에 찍은 두 개의 영상은 방송 카메라가 적어도 2대 이상 동원됐음을 말해준다.

공영방송 KBS의 카메라가 대통령의 사적인 경조사에까지 동원돼 결혼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담아낸 것이다.

KBS가 촬영한 결혼 기념 영상은 무려 2시간 30분 분량. 결혼식 전후의 다양한 행사들을 모두 담아냈다.

<녹취> "우리 큰아이한테 칙사대접하라고 부탁해봤는데 혼내줘야 되겠네."

함 들어오는 날. 신랑 친구들의 모습까지 지켜보았고, 밤늦도록 이어진 신랑신부 가족의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KBS 카메라는 사적 행사를 촬영해야 했다.

<녹취> "한 잔 더하고 갈까? 잘 몰라. 우리 늙었어."

방송사 카메라는 결혼식 전부터 청와대로 출근해 신랑, 신부와 가족 야외 촬영까지 담는 비디오 기사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녹취> "저 시원한 것 한잔씩 마시고 하지. 사진만 찍으시지 마시고..."

대통령의 집안행사 기념 비디오를 만들어 방송사 이름으로 상납하는 것이 불과 20여 년 전 방송사가 했던 일이다.

다과회와 폐백까지 비슷한 내용의 결혼식 영상은 국립 영화 제작소에서도 제작됐다.

모두 경쟁적으로 대통령 개인의 촬영기사 노릇을 자청했던 것이다.

<인터뷰> 김평호(교수) : "머슴 형태라고, 권력에 수동적 형태든 자발적 형태든 일정한 동의 있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거든요. 전두환 집안 행상에 방송국 기자들이 안해 주었다고 해서 실제 어떤 피해 있지 않죠 그러나 그런 것을 해야만 할 거 같은 분위기를 저 쪽에서 조성한 게 아니라 이쪽에서 일정 부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했다고 봐야 되는 거죠."

청와대에서 KBS로 온 영상자료에는 국립영화제작소가 필름으로 제작한 여러 편의 기록영화도 있다.

전두환 재임 기간을 시기별로 정리한 필름은 특별 제작된 나무상자에 고이 보관돼 있다.

국가 정책 홍보가 주 업무인 공공기관이 각하 개인을 위해 제작한 홍보 영화들.

취임 직후 처음 제작된 [국운개척의 영도자]에서전두환은 새시대 지도자로 신격화됐다.

<녹취> "실로 짧은 기간 동안 국보의 상임 위원장으로써 너무나 큰 업적을 쌓아 올린 전두환 대통령이기에 우리가 맞이한 새 시대의 의미는 더욱 값진 것이다."

이 기록영화 속에서 전두환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으로 칭송된다.

<녹취> "상서로운 새의 비상은 새나라 건설의 길조인가 연꽃의 일종인 순채도 오랜만에 피었다."

합천 생가는 어느새 성지로 승격되고, 성장과정과 그의 과거 행적은 신화로 재구성됐다.

<녹취> "검은 베레들이 일사분란하게 집결해서 별을 만들고 그 별 속으로 장군을 영접하던..."

사병을 동원한 장성 진급 행사 때부터 그는 영웅이었다.

새 영도자 전두환 대통령이야 말로 역대 어느 정권도 어떤 기구도 손대지 못한 큰 일 을 해 냈다.

80년 대 초 암담했던 우리 사회의 현실을 깡그리 무시한,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녹취> "희망의 80년대를 향해 힘차게 전진~"

국립영화제작소는 이런 대통령 찬양 영화를 전두환 재임 기간 중 1년 단위로 제작해 상납했다.

6편 모두 쿠데타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개인숭배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 속에서도 사회 곳곳에서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때마다 군부 독재 세력은 폭력으로 응수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살아남은 언론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매일 보도지침이 언론사에 전달됐고, 권력의 의지는 신문과 방송에 충실히 반영됐다.

뉴스의 가치보다 정부 지침이 우선했던 그 시절 우리 사회의 진실은 왜곡되고 은폐됐다.

청와대에서 KBS에 이관된 영상자료 속에는 80년대 인기를 누렸던 방송 드라마 녹화 테이프도 있다.

청와대 영상 자료에 왜 이런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일까?

<인터뷰> 신영규(부장) : "그때 전두환 대통령이 스포츠를 좋아해서 스포즈나 영화라든가 외화는 카피를 해서 청와대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신영규(부장) : "저희 KBS 비서실을 통해서 제가 알기로 부속실이라고 있는데 부속실이 아마 그쪽 청와대 쪽에서 테잎을 관리 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 쪽에서 관장을 해서 대통령이 보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편리할 때 방송 프로그램을 보도록 방송사 영상자료실이 가동됐던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등을 위해서도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인기 드라마들을 녹화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드라마 뿐 아니라 대통령이 등장하는 뉴스와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녹화돼 청와대로 올라갔다.

당시 이런 테잎 상납 업무는 방송사 사장이 나서서 챙길 정도였다.

담당 직원들은 본래의 업무보다 청와대에 바칠 테잎 녹화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인터뷰> 신영규(부장) :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당시 영상자료실에 우리 일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업무가 그쪽으로 복사해서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잘 못되면 그 때 당시 국장이나 그런 분들이 전부 불려 올라갔으니까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을 부여받기에 유난히 자주 해외 순방을 다녔다.

그 때마다 각 방송사는 장시간을 할애해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생중계했다.

방송사들은 이런 중계 영상과 대통령 찬양 특집 프로그램을 별도의 테잎으로 특별 제작해 상납했다.

<녹취> "이 테잎은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의 아세안 5개국 순방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특별제작한 기록보존용 녹화테잎입니다.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께 충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MBC 보도국 제공 -

청와대에 바치는 테잎 앞머리엔 친절하게 프로그램 내용을 설명하고, 아부하는 자막이 곁들여 졌다.

환송식부터 순방 일정, 환영식까지 모두 담다보니, 테잎 하나로는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녹취>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인 아프리카 및 캐나다 순방을 결산해본 일련의 � 프로그램 중 네 편을 녹화테잎 1권과 2권에 수록해 올립니다." - MBC 문화방송

<녹취> "전두환 대통령의 이번 아프리카 4개국 순방은 외교사에 그야말로 금자탑을 쌓았다. 이렇게 평가가 되겠습니다."

<인터뷰> 전규찬 : "국가 권력 행사 중계 하고 각인 시켜야 될 정권 이해 관계 그런 서비스 행해 줌으로서 자신의 이익 보존 받아야 했던 방송사의 이해 관계. 방송사 내에서 그런 서비스 구체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정권 부름 받아야 될 기지 피디 경영진 이해 관계는 제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말씀 드릴 수 있는 거죠."

독재 정권의 행사 중계에 열을 올리고, 그 내용은 별도로 제작해 상납하는 충성스런 방송사들... 이 또한 불과 20여 년 전 방송의 자화상이다.

영부인 이순자 동정도 충실히 보도하고, 따로 묶어 상납했다. 거기엔 국보위 위원장 시절 인터뷰도 들어있다.

<녹취> 인터뷰 내용 : "KBS와 MBC는 영부인의 동정이 가는데마다 쫓아다니며 주요 뉴스로 다뤘다."

두 방송사의 영부인 관련 리포트는 놀랄 만큼 똑 같다.

당시 청와대 보도 자료를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앵무새처럼 읊조려 댄 증거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런 과잉충성은 역설적으로 방송뿐 아니라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불신은 차츰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방송에 대한 분노로,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인터뷰> 전규찬 : "역사 패러독스 같습니다 선전 하면 마치 대중 끊임없이 선전으로 호출되고 호명 될 거 같지만 사실 거기서 스스로 자기 교육 효과 갖는다 거죠 민중의 현명함이란 겁니다. 선전물에 끊임없이 노출돼 왔기 때문에 민중은 정말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선전 구조 선전한 권력 야합의 체제 인명 살상한 폭력적 체제라 하더라도 그걸 넘어뜨릴 수 있는 저항으로 나타나는 거죠."

권력의 핵심만 바라보고 있어서였을까?

독재 정권과 야합해 그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던 방송은, 점차 사회 전반에 퍼져가던 저항의 목소리엔 귀를 닫았다.

그리고 9시 시보와 함께 시작하던 이른바 땡전 뉴스도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저녁..."

87년 6월 10일, 역사적인 6월 항쟁이 시작된 그날,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녹취> 6월10일 9시 뉴스 : "오늘은 민정당 전당대회 소식과 재야 집회 시위소식 집중 보도하겠다."

KBS 9시 뉴스는 전두환의 후계자로 등장한 노태우 후보를 집중 조명했다.

<녹취>"차기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누구인가?"

학창시절부터... 정치권에 뛰어든 후 상세한 행적까지... 독재권력 승계자의 정치적 능력과 인품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려 9분의 뉴스시간을 할애했다.

정규 뉴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녹취> "그의 외유내강, 결단과 추진력 대단할 것으로 주위에선 본다."

같은 날, 거리를 뒤덮었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어떻게 전했을까?

<녹취>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학생, 시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는 과격한 구호와 격렬한 시위로 규정됐다."

극소수의 발언을 6월 항쟁의 본질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독재 권력에 대한 분노는 방송사로 이어졌다.

6월 항쟁에 나선 시위대의 발길은 자연스레 방송사로 향했다.

오로지 권력만을 바라보며 국민의 간절한 민주화 요구를 외면한 결과였다.

그렇게 격동의 시기는 흘러가 12.12 사태 이후 16년 만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과 신군부의 핵심세력이 구속되고, 12.12는 군사 반란으로 규정됐다.

<녹취> "김영삼 취임 3주년 맞습니다."

80년대 전두환을 민족의 영도자.라 칭송하던 방송은, 같은 입으로 이번에는 그를 반란의 수괴라고 비판하며, 새로 탄생한 권력의 업적을 찬양하고 나섰다.

20년 전, 국민의 힘으로 민주 공간을 열어낸 6월 항쟁의 기억은, 80년대를 관통해온 수많은 이들에게 독재의 상흔을 극복한 공동의 추억이자 정신적 자산으로 남았다.

<인터뷰> 김재영(교수) :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건이나 정치는 있거든요. 그런데 이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었었고 그게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에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된 일이었었는데 이런 것의 가치 자체가 너무 쉬운 것 그렇게 좀 치부되지 않는가."

<인터뷰> 전규찬(교수) : "텔레비전 방송이, 80년에 대해서 생생하고 구체적 자료 이야기들을 자신의 과오를 정권 폭력성들, 이미지로 제공 한바 있는 있느냐 거죠.. 5 18 때나 가끔 씩 보여주죠. 가끔씩 보여 주지만 자신들이 저장하거나 발굴해야 할 생생한 역사적 기록들을 일반 시청자들에게 소개해 우리가 아 그 시대 저렇게 살았었지 뼈저리게 보고 두려워한 효과들..."

권력과 언론의 야합을 꿰뚫고, 진정한 자유를 절규했던 민중의 힘으로 언론도 자유와 자율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언론은 어디에 와 있는가?

<인터뷰> 김평호(교수) : "6월 항쟁이 열어준 공간에 무임 승차한 언론인들이 나름대로 역할 했지만 그 이후에 한 20년 지나면서 여전히 언론의 위치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인들이 무임 승차 했기 때문이고 무임승차 했으면 내릴 때 돈을 내야 한다는 최소한 책임 의식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언론이 대체로 권력 집단과 기생한 관계에 머물러 있거든요 정치든 경제든..."

<인터뷰> 김재영(교수) : "지금의 언론은 국민 일반 대중의 눈높이와 다른 그런 시각에서 사안을 보고 그래서 그들의 독자성이나 자율성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것 자체는 국민의 보편적 이익이라든가 건강한 시선 자체에 부합하지 않는 그런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이 됩니다."

<인터뷰> 신혜진(6.10 당시 대학생) : "언론은 생각하면 화가 나요. 그런 지금 언론이 사회적으로 대우받고 있는 차지하고 있는, 언론 권력이죠. 대단한 권력이거든요. 근데 그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 때로는 역사가 흘러가야하는 정의로운 것을 역행 뒤집는 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때로는 언론이 아닌가..."

1987년 6월,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언론에 민주와 자유를 가져다준 6월 항쟁의 수많은 주역들은 되묻고 있다.

2007년 6월, 현재의 방송, 그리고 신문은 과연, 진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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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0 항쟁 특집]① 각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 입력 2007-06-10 14:18:52
    • 수정2007-06-10 15:05:40
    미디어 포커스
KBS 영상자료실. 이곳에는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개되지 못한 영상 기록물들이 있다. 영상의 주요 등장인물은 80년대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군부 독재의 수장과 그 측근들... <녹취> "한 잔 더 하고 갈까?"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은 권력 앞에 충성을 다 바쳤던 방송이다. 대통령 각.하.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상 자료들, 권력과 방송의 추악한 야합. 그 참담한 기록을 공개한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도 봇물 터지 듯 분출된 민주화의 열망을 잠재울 순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독재 정권 타도. 거리로 나선 시민, 학생들은 하나였고, 민중의 힘은 5공 정권을 굴복시켰다. <녹취> 노태우(전 민정당 대표위원/1987.6.29) :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우리나라 장래 문제 굳은 신념 갖게 됐다." KBS는 그러나, 쫓겨나는 순간까지 독재자를 초지일관 찬양했다. <녹취> 역사를 세운 큰 약속 - 단임의지(1988.2.24.KBS) : "보내는 마음 떠나는 마음이 교차하는 이 순간에 우리는 한 지도자의 초지일관한 신념의 완성과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봅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 퇴임만찬(1988.2.24) : "각하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록되고 찬양될 것입니다." 전두환의 청와대 마지막 밤, KBS는 퇴임만찬을 9시 뉴스에 20분이나 내보냈다. <녹취> "본인은 오늘 제12대 대통령 임기 끝마치고 고별의 인사 말씀 이 자리에 섰다." 유명 시인이 독재자에게 바치는 송시가 만찬장에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녹취> "그동안 국정 위하여 촌각 쉬지않는 님의 그 정력 열 성 그 용단으로 하여 국운은 날로 선진을 바라고 도약해 갔습니다.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하소서." 쫓겨나듯 퇴임하는 군부 정권의 뒷모습에까지 방송은 그렇게 예를 다 갖췄다. 그 즈음,청와대에 있던 수백 개의 비디오테이프와 필름이 KBS 영상 자료실에 전달됐다. <인터뷰> 신영규(부장) "굉장히 많은 양의 테잎이 넘와서 저희가 그 때 당시, 그것을 누가 보면 안 된다고 해서 이중 캐비넷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전두환 대통령 기념관 만들 적에 그때까지 보관을 해 달라. 이런 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때 까지 저희가 쭉 보관을 했었죠." 그 이후 이 청와대 이관 영상물에는 전두환 관련 자료라는 딱지가 붙었다. 최근 디지털화 작업을 거친 영상물은 60분 테잎 170여 개 분량. 그러나 20년 동안 대출금지로 묶여 있었다. 극히 일부만 그 존재를 알았던 이 청와대 이관 영상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녹취> 보안뉴스(대장진급 및 축하다과회/1980.8.5) : "자, 준비가 다되셨습니까? 그러면 다같이 건배합시다. 사령관님의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가 내부용으로 제작한 이 보안뉴스 화면은 화질이 나쁘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녹취> "여러분들 덕분에 대장으로 승진의 영광 안았다. 제가 오늘 사성장군이 된 것은 군에 여러 가지 인사법상으로나 절차법상으로는, 불가능 한 것이고, 오로지 이 자리에 참석하신 수경사, 특전사, 각급 지휘관을 위주로 해서 국보위, 그리고 보안부대, 주위에 있는 여러 간부와 전 장병들이 진심으로 국가를 위하는 호국정신에서 여러분들이 모든 난국을 수습하는데 자기희생은 조금도 밝히지 않은 그 대가를 본인이 죄송스럽게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대장 진급이 불법임을 밝히는 최초의 영상기록인 동시에, 쿠데타 세력의 권력찬탈 의지를 확인케 한다. <녹취> "우리 앞에 산적해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은 책임감과 열렬한 사명감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회장) : "지금 봤잖습니까. 1212로 인해 자기가 별4개 다는 것은 말하자면 합법적은 아니다 거기다 정통성이 없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자네들이 해서 난 된 거다. 그래 끝까지 책임져 그 대신 내가 봐 줄 테니까 이건 완전히 깡패세계죠. 이것은 두목이 야 나를 했으니 앞으로 이유 없이 다 봐줄게 거기 있는 사람들 자 장관하고 다들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그렇게 다 보장했거든요." 청와대 이관 자료에는 대장 진급 파티 등 모두 19편의 보안뉴스가 들어 있다. 기무사의 전신인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통신과가 제작한이 보안뉴스는, 10.26 이후 전두환의 정권 찬탈을 향한 행보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내부용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당시 쿠데타 세력의 각종 파티와 회의 등 내밀한 모습이 가감없이 담겨있다. 지난 90년대에 공개돼 국민을 분노케 했던, 12.12 직후 쿠데타 세력의 샴페인 파티 장면도 바로 이 보안 뉴스에 들어 있었다. 정치군인의 보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 세력은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갈 때마다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 결속력을 다졌다. 12.12 성공 샴페인 파티 며칠 뒤, 또다시 79년 송년 파티가 열렸다. <녹취> "군의 여러 가지 의혹과 국민들로부터 뭔가 석연치 않다는 내용이 일종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지만 충격적인 군사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우리 사회는 불안감에 얼어붙었지만 이들만의 건배는 이어졌고, 휘하 장교들은 권력의 단 맛을 한껏 즐겼다. <녹취> "기회주의적인 일부 군 장성들의 반국가적인 행위... 왜곡된 악성 유언비어가 군 내외 일각에 잔존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1980년 새해, 유신독재의 종말 이후 민주화의 열망은 더 없이 높아갔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군 내부의 동요과 민심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권력 핵심에 한발한발 다가섰다. <인터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회장) : "누가 세면 그쪽에 가서 붙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언론과 정치인들이 당시에 누가 실세냐 누가 이 난국을 잡을 거란 물리적인 힘을 가진 군대인데 그 중에 누가 실세냐 하고 우리 제가 대령 때인데요. 그때 기자들도 되게 관심이 많았어요. 전두환이 이제 기무사를 장악하고 있고 겸해서 우리 중앙정보부 당시에 장악하게 되고 하니까 그 쪽으로 사람이 물밀듯이 몰렸죠." 새로운 권력을 감지한 방송사도 재빨리 추파를 던졌다.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난 지 불과 일주일 후, MBC는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위문공연을 마련했다. 인기 연예인을 동원해 쿠데타 세력 위문공연을 펼친 MBC는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녹취> "귀사는 평소 국가 총력안보와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특히 연말을 맞아 당 부대 장병 위문 이에 감사..." 80년 1월 23일자 보안뉴스. 쿠데타 세력의 초호화판 파티는 계속됐다. 인기 연예인도 어김없이 초청됐다. 휘하 장교와 그 가족들을 다독이고 결속을 다졌다. 연예인들의 큰 절을 받으며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곧 민주화가 오리라던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은 무참히 깨졌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모든 정치 활동을 봉쇄했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광주를 완전 진압한 직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초법적인 기구를 만들어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지 불과 3주 만에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국보위 파티가 열렸다. 이제 노골적으로 정치전면에 나선 신군부는 또 자축의 건배를 들었다. 이번에는 TBC 방송사의 관현악단이 파티의 흥을 돋웠다. 광주를 총칼로 살육한 후, 신군부와 방송사, 그들만의 파티를 보안뉴스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전두환 대장이 군복을 벗은 8월22일, KBS는 새 권력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유례없이 군 장성의 전역식이 중계됐다. 새 지도자를 향해 방송뿐 아니라 모든 신문도 신화 창조에 앞 다퉈 나섰다. 경향신문은 나흘간에 걸쳐 연재기사를 실었다. 출생부터 학창시절, 육사생도시절을 되짚으며 전두환을 새역사 창조의 선도자로 부각시켰다. 전두환 대장의 전역 다음날 각 일간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로 새 지도자를 찬양했다. 인간 전두환은 기사에서 신격화됐고, 쿠데타의 지도자는 민족의 영도자로 둔갑했다. 언론의 충성 경쟁 속에서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의 전력은 사라져 갔다. <인터뷰> 전규찬(교수) :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 주류 매체는 신문 방송 할 거 없이 기회주의적 매체라고 봅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보면 끊임없이 시대적 정치적 역학이 움직임에 따라서 미디어는 그쪽 추종하고 또 바뀌면 따라가고 합니다. 늘 한 2스텝 정도 뒤에서 시대 상황 빨리 읽어 내면서 가는 거죠 상당히 눈치 빠른 신문과 방송 역사 였다. 그런 식으로 정치적 헤게모니 쫓아가는 그런 신문방송 역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녹취> "대통령으로서 직책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1981년3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 12대 대통령 전두환의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방송의 충성 경쟁은 더욱 노골화됐다. 청와대 이관 영상자료는 갈 데까지 간 방송의 행태를 잘 보여준다. MBC 보도국이란 글자가 선명한 타이틀 화면. 지난 1982년, 청와대에서 열린 전두환 대통령의 51회 생일 축하 파티. 이른바 생신기념 화면은 MBC가 찍고 편집 제작했다. <녹취> 이순자 : "그런 것 찍지 말지요. (보도용이 아니라 보관하시도록 비디오에 담는 겁니다.) 네." <녹취> "각하께 말씀 안 드렸어. 그냥 내려와서 갑작스럽게 즐거움 드리려고 전혀 말씀을 안 드렸거든요." 청와대 비서실과 출입 기자단이 준비한 깜짝 생일 파티를 담기 위해 방송국 카메라와 제작 인력이 동원된 것이다. <녹취> "생신을 맞이해서 각하 내외분 만수무강과 각하 영도하에 이룩될 우리 조국의 무궁한 번영을 축원하는 뜻에서 건배 건의드리겠습니다." 각하의 말씀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는 분주히 움직였다. <녹취> "음력으로 52살 양력으로 51살. 이왕이면 나이 적은 걸로 하는 게 좋잖아." 생일 파티장에 둘러 쳐진 무궁화 병풍에는 한국기자협회원 일동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각 언론사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각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녹취> "동남아 갔을 때 그 더운데 무거운 거 짊어지시고 우리 가는데 마다 뛰어다니시느라 참 모두들 고생들 많으셨다." 영부인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도 빠지지 않았다. 대통령 개인의 대소사까지 성실히 챙겨 바치는 것이 당시 방송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인터뷰> 박용규(교수) : "언론사 언론인들 권력과 밀착되는 방식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지난 세월 군사 정권 기간 동안 보면 굉장히 사적인 여러 가지 형태의 결탁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사실 청와대 영상자료실 같은 데서 행사를 찍어서 편집해야 될 것과 같은 일을 지상파 방송사에서 했다는 것인데 이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5공화국 시절, 권력에 대한 방송의 봉사는 단순히 대통령 개인.에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의 집안 행사들은 방송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촬영 현장이었다. 1985년 전두환의 장녀 결혼식은 KBS가 촬영하고 기념 비디오로 제작해 상납했다. 신부 입장을 측면과 정면에서 동시에 찍은 두 개의 영상은 방송 카메라가 적어도 2대 이상 동원됐음을 말해준다. 공영방송 KBS의 카메라가 대통령의 사적인 경조사에까지 동원돼 결혼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담아낸 것이다. KBS가 촬영한 결혼 기념 영상은 무려 2시간 30분 분량. 결혼식 전후의 다양한 행사들을 모두 담아냈다. <녹취> "우리 큰아이한테 칙사대접하라고 부탁해봤는데 혼내줘야 되겠네." 함 들어오는 날. 신랑 친구들의 모습까지 지켜보았고, 밤늦도록 이어진 신랑신부 가족의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KBS 카메라는 사적 행사를 촬영해야 했다. <녹취> "한 잔 더하고 갈까? 잘 몰라. 우리 늙었어." 방송사 카메라는 결혼식 전부터 청와대로 출근해 신랑, 신부와 가족 야외 촬영까지 담는 비디오 기사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녹취> "저 시원한 것 한잔씩 마시고 하지. 사진만 찍으시지 마시고..." 대통령의 집안행사 기념 비디오를 만들어 방송사 이름으로 상납하는 것이 불과 20여 년 전 방송사가 했던 일이다. 다과회와 폐백까지 비슷한 내용의 결혼식 영상은 국립 영화 제작소에서도 제작됐다. 모두 경쟁적으로 대통령 개인의 촬영기사 노릇을 자청했던 것이다. <인터뷰> 김평호(교수) : "머슴 형태라고, 권력에 수동적 형태든 자발적 형태든 일정한 동의 있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거든요. 전두환 집안 행상에 방송국 기자들이 안해 주었다고 해서 실제 어떤 피해 있지 않죠 그러나 그런 것을 해야만 할 거 같은 분위기를 저 쪽에서 조성한 게 아니라 이쪽에서 일정 부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했다고 봐야 되는 거죠." 청와대에서 KBS로 온 영상자료에는 국립영화제작소가 필름으로 제작한 여러 편의 기록영화도 있다. 전두환 재임 기간을 시기별로 정리한 필름은 특별 제작된 나무상자에 고이 보관돼 있다. 국가 정책 홍보가 주 업무인 공공기관이 각하 개인을 위해 제작한 홍보 영화들. 취임 직후 처음 제작된 [국운개척의 영도자]에서전두환은 새시대 지도자로 신격화됐다. <녹취> "실로 짧은 기간 동안 국보의 상임 위원장으로써 너무나 큰 업적을 쌓아 올린 전두환 대통령이기에 우리가 맞이한 새 시대의 의미는 더욱 값진 것이다." 이 기록영화 속에서 전두환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으로 칭송된다. <녹취> "상서로운 새의 비상은 새나라 건설의 길조인가 연꽃의 일종인 순채도 오랜만에 피었다." 합천 생가는 어느새 성지로 승격되고, 성장과정과 그의 과거 행적은 신화로 재구성됐다. <녹취> "검은 베레들이 일사분란하게 집결해서 별을 만들고 그 별 속으로 장군을 영접하던..." 사병을 동원한 장성 진급 행사 때부터 그는 영웅이었다. 새 영도자 전두환 대통령이야 말로 역대 어느 정권도 어떤 기구도 손대지 못한 큰 일 을 해 냈다. 80년 대 초 암담했던 우리 사회의 현실을 깡그리 무시한,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녹취> "희망의 80년대를 향해 힘차게 전진~" 국립영화제작소는 이런 대통령 찬양 영화를 전두환 재임 기간 중 1년 단위로 제작해 상납했다. 6편 모두 쿠데타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개인숭배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 속에서도 사회 곳곳에서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때마다 군부 독재 세력은 폭력으로 응수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살아남은 언론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매일 보도지침이 언론사에 전달됐고, 권력의 의지는 신문과 방송에 충실히 반영됐다. 뉴스의 가치보다 정부 지침이 우선했던 그 시절 우리 사회의 진실은 왜곡되고 은폐됐다. 청와대에서 KBS에 이관된 영상자료 속에는 80년대 인기를 누렸던 방송 드라마 녹화 테이프도 있다. 청와대 영상 자료에 왜 이런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일까? <인터뷰> 신영규(부장) : "그때 전두환 대통령이 스포츠를 좋아해서 스포즈나 영화라든가 외화는 카피를 해서 청와대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신영규(부장) : "저희 KBS 비서실을 통해서 제가 알기로 부속실이라고 있는데 부속실이 아마 그쪽 청와대 쪽에서 테잎을 관리 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 쪽에서 관장을 해서 대통령이 보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편리할 때 방송 프로그램을 보도록 방송사 영상자료실이 가동됐던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등을 위해서도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인기 드라마들을 녹화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드라마 뿐 아니라 대통령이 등장하는 뉴스와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녹화돼 청와대로 올라갔다. 당시 이런 테잎 상납 업무는 방송사 사장이 나서서 챙길 정도였다. 담당 직원들은 본래의 업무보다 청와대에 바칠 테잎 녹화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인터뷰> 신영규(부장) :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당시 영상자료실에 우리 일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업무가 그쪽으로 복사해서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잘 못되면 그 때 당시 국장이나 그런 분들이 전부 불려 올라갔으니까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을 부여받기에 유난히 자주 해외 순방을 다녔다. 그 때마다 각 방송사는 장시간을 할애해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생중계했다. 방송사들은 이런 중계 영상과 대통령 찬양 특집 프로그램을 별도의 테잎으로 특별 제작해 상납했다. <녹취> "이 테잎은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의 아세안 5개국 순방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특별제작한 기록보존용 녹화테잎입니다.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께 충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MBC 보도국 제공 - 청와대에 바치는 테잎 앞머리엔 친절하게 프로그램 내용을 설명하고, 아부하는 자막이 곁들여 졌다. 환송식부터 순방 일정, 환영식까지 모두 담다보니, 테잎 하나로는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녹취>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인 아프리카 및 캐나다 순방을 결산해본 일련의 � 프로그램 중 네 편을 녹화테잎 1권과 2권에 수록해 올립니다." - MBC 문화방송 <녹취> "전두환 대통령의 이번 아프리카 4개국 순방은 외교사에 그야말로 금자탑을 쌓았다. 이렇게 평가가 되겠습니다." <인터뷰> 전규찬 : "국가 권력 행사 중계 하고 각인 시켜야 될 정권 이해 관계 그런 서비스 행해 줌으로서 자신의 이익 보존 받아야 했던 방송사의 이해 관계. 방송사 내에서 그런 서비스 구체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정권 부름 받아야 될 기지 피디 경영진 이해 관계는 제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말씀 드릴 수 있는 거죠." 독재 정권의 행사 중계에 열을 올리고, 그 내용은 별도로 제작해 상납하는 충성스런 방송사들... 이 또한 불과 20여 년 전 방송의 자화상이다. 영부인 이순자 동정도 충실히 보도하고, 따로 묶어 상납했다. 거기엔 국보위 위원장 시절 인터뷰도 들어있다. <녹취> 인터뷰 내용 : "KBS와 MBC는 영부인의 동정이 가는데마다 쫓아다니며 주요 뉴스로 다뤘다." 두 방송사의 영부인 관련 리포트는 놀랄 만큼 똑 같다. 당시 청와대 보도 자료를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앵무새처럼 읊조려 댄 증거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런 과잉충성은 역설적으로 방송뿐 아니라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불신은 차츰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방송에 대한 분노로,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인터뷰> 전규찬 : "역사 패러독스 같습니다 선전 하면 마치 대중 끊임없이 선전으로 호출되고 호명 될 거 같지만 사실 거기서 스스로 자기 교육 효과 갖는다 거죠 민중의 현명함이란 겁니다. 선전물에 끊임없이 노출돼 왔기 때문에 민중은 정말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선전 구조 선전한 권력 야합의 체제 인명 살상한 폭력적 체제라 하더라도 그걸 넘어뜨릴 수 있는 저항으로 나타나는 거죠." 권력의 핵심만 바라보고 있어서였을까? 독재 정권과 야합해 그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던 방송은, 점차 사회 전반에 퍼져가던 저항의 목소리엔 귀를 닫았다. 그리고 9시 시보와 함께 시작하던 이른바 땡전 뉴스도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저녁..." 87년 6월 10일, 역사적인 6월 항쟁이 시작된 그날,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녹취> 6월10일 9시 뉴스 : "오늘은 민정당 전당대회 소식과 재야 집회 시위소식 집중 보도하겠다." KBS 9시 뉴스는 전두환의 후계자로 등장한 노태우 후보를 집중 조명했다. <녹취>"차기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누구인가?" 학창시절부터... 정치권에 뛰어든 후 상세한 행적까지... 독재권력 승계자의 정치적 능력과 인품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려 9분의 뉴스시간을 할애했다. 정규 뉴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녹취> "그의 외유내강, 결단과 추진력 대단할 것으로 주위에선 본다." 같은 날, 거리를 뒤덮었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어떻게 전했을까? <녹취>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학생, 시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는 과격한 구호와 격렬한 시위로 규정됐다." 극소수의 발언을 6월 항쟁의 본질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독재 권력에 대한 분노는 방송사로 이어졌다. 6월 항쟁에 나선 시위대의 발길은 자연스레 방송사로 향했다. 오로지 권력만을 바라보며 국민의 간절한 민주화 요구를 외면한 결과였다. 그렇게 격동의 시기는 흘러가 12.12 사태 이후 16년 만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과 신군부의 핵심세력이 구속되고, 12.12는 군사 반란으로 규정됐다. <녹취> "김영삼 취임 3주년 맞습니다." 80년대 전두환을 민족의 영도자.라 칭송하던 방송은, 같은 입으로 이번에는 그를 반란의 수괴라고 비판하며, 새로 탄생한 권력의 업적을 찬양하고 나섰다. 20년 전, 국민의 힘으로 민주 공간을 열어낸 6월 항쟁의 기억은, 80년대를 관통해온 수많은 이들에게 독재의 상흔을 극복한 공동의 추억이자 정신적 자산으로 남았다. <인터뷰> 김재영(교수) :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건이나 정치는 있거든요. 그런데 이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었었고 그게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에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된 일이었었는데 이런 것의 가치 자체가 너무 쉬운 것 그렇게 좀 치부되지 않는가." <인터뷰> 전규찬(교수) : "텔레비전 방송이, 80년에 대해서 생생하고 구체적 자료 이야기들을 자신의 과오를 정권 폭력성들, 이미지로 제공 한바 있는 있느냐 거죠.. 5 18 때나 가끔 씩 보여주죠. 가끔씩 보여 주지만 자신들이 저장하거나 발굴해야 할 생생한 역사적 기록들을 일반 시청자들에게 소개해 우리가 아 그 시대 저렇게 살았었지 뼈저리게 보고 두려워한 효과들..." 권력과 언론의 야합을 꿰뚫고, 진정한 자유를 절규했던 민중의 힘으로 언론도 자유와 자율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언론은 어디에 와 있는가? <인터뷰> 김평호(교수) : "6월 항쟁이 열어준 공간에 무임 승차한 언론인들이 나름대로 역할 했지만 그 이후에 한 20년 지나면서 여전히 언론의 위치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인들이 무임 승차 했기 때문이고 무임승차 했으면 내릴 때 돈을 내야 한다는 최소한 책임 의식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언론이 대체로 권력 집단과 기생한 관계에 머물러 있거든요 정치든 경제든..." <인터뷰> 김재영(교수) : "지금의 언론은 국민 일반 대중의 눈높이와 다른 그런 시각에서 사안을 보고 그래서 그들의 독자성이나 자율성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것 자체는 국민의 보편적 이익이라든가 건강한 시선 자체에 부합하지 않는 그런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이 됩니다." <인터뷰> 신혜진(6.10 당시 대학생) : "언론은 생각하면 화가 나요. 그런 지금 언론이 사회적으로 대우받고 있는 차지하고 있는, 언론 권력이죠. 대단한 권력이거든요. 근데 그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 때로는 역사가 흘러가야하는 정의로운 것을 역행 뒤집는 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때로는 언론이 아닌가..." 1987년 6월,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언론에 민주와 자유를 가져다준 6월 항쟁의 수많은 주역들은 되묻고 있다. 2007년 6월, 현재의 방송, 그리고 신문은 과연, 진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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