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흑인 정권 14년, 그 후

입력 2008.05.11 (10:51) 수정 2008.05.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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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14년 전 오늘, 지독한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로 악명이 높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최초의 흑인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오랫동안 설움을 받아오던 흑인들은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에 환호성을 질렀고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로 들떴었는데요.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흑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고 백인들도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인종이 화합하는 무지개 국가를 만들겠다며 출범했던 흑인정권 14년의 현주소를 윤양균 순회특파원이 밀착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94년 5월 10일. 세계인들의 축하 속에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습니다. 지독한 인종차별정책이 남아공에서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인터뷰> 만델라(남아공 첫 흑인대통령) :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이어줄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대를 시작할 시간이 왔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만델라 대통령의 출신지이자 남아공 최대의 빈민지역 소웨토를 찾았습니다.

과거 백인들이 통치하던 시절 흑인들이 요하네스버그 시내로 출퇴근하며 일한 뒤 쉴 수 있도록 만든 집단 거주지이기도 합니다.

지난 1994년 5월 이곳은 자유총선거를 통한 흑인정권의 탄생에 환호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14년이 된 지금 그들의 환호성은 생존을 위한 고달픈 한숨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흑인 대통령을 맞은 지 14년이 됐지만, 판자촌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식수와 전기는 몰래 끌어다 써야하고, 오물처리시설도 없습니다. 구멍 난 양철 지붕은 날이 맑을 때 잽싸게 손을 봐야합니다.

<인터뷰> 제우고(소웨토 거주민) : "정부가 우리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웃들이 온통 범죄에 노출돼있지만 정부는 신경도 안쓰잖아요."

소웨토 거주민의 대다수는 막노동 일을 하며 대부분 한달 100달러 이하의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46살의 마쇼아도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어린 2명의 자녀와 부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15제곱미터 남짓한 판잣집에 커튼으로 절반을 막아 4명의 가족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가난을 벗어날 것이라던 14년 전의 꿈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인터뷰> 마쇼아(소웨토 거주민) : "흑인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수만 부자가 되게 했을 뿐 저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도움이 된 게 없어요."

과거 남아공 경제를 이끌던 요하네스버그의 도심은 우뚝 솟아있는 고층빌딩들이 예전의 영화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도심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거대한 슬럼가로 변해있습니다. 거리에는 온통 흑인만 보일뿐 백인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과거 이곳 요하네스버그 도심은 흑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곳입니다.

14년이 흐른 지금 백인들은 도심을 떠나고 흑인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흑인들의 통행 제한이 사라지면서 일자리를 찾아 흑인들이 밀려오자 백인들이 떠난 것입니다.

백인들이 떠나면서 일자리는 더욱 사라지고 이제는 인근 짐바브웨나 나이지리아에서 밀입국한 흑인들까지 몰려들고 있습니다.

도심 치안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낯선 이방인이 20분 이상 머물경우 강력범죄를 당할 확률이 8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인터뷰> 아토니(남아공대학 경제학교수) : "범죄를 유발하는 실업이 감소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업은 단기간 내에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요하네스버그 도심에서 십여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백인거주지역.

만델라 동상이 세워져있지만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대부분 백인입니다.

마치 유럽의 한 도시를 옮겨다 놓은 듯한 이곳은 잘 정돈된 도로에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흑인 거주지역과 비교하면 별천지와 같은 이곳은 10년 전부터 백인들이 살기 위해 새로 만든 곳입니다.

백인들이 사는 집은 높은 담장 위로 2만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습니다. 입구에는 사설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고, 내부를 들어서면 잔디 깔린 정원에 곳곳에서 스프링클러가 돌고 있습니다.

제도상으로는 인종차별이 없어졌지만 흑과 백은 엄연히 분리돼 살고 있고 빈부격차도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니키웨(CNBC 비지니스 뉴스 앵커) : "제 생각에 (남아공 정부가) 가장 큰 도전과제는 (흑인들의) 실업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빈부격차를 어떻게 좁히느냐하는 것입니다."

남아공의 전체인구는 대략 4천7백만명. 이 가운데 흑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정도입니다.

남아공의 공식 실업률은 25%. 실제 실업률은 4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흑인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아공 정부는 흑인들의 빈곤타개를 위해 강력한 흑인 우대 경제정책 즉 BEE를 발표했습니다.

이에따라 정부 발주 공사는 흑인 사장이 있는 건설회사에 우선권을 줍니다.

또 공무원은 대부분 흑인들로 채워지게 됐고, 민간기업도 업종에 따라 25~40%까지 흑인을 의무적으로 채용하도록 했습니다.

능력보다는 피부색깔을 기준으로 우선 채용하는 결과. 당연히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가 시장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인터뷰> 음흐람비(압사은행 흑인경제담당) : "BEE는 기업지향적인 정책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정치적 배경의 힘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흑인 우대 정책이 당초의 취지에서 벗어나 정부 고위 인사와 친분이 있는 흑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 음베키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된 주마 ANC의장도 각종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차별을 받던 흑인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준다던 당초의 명분은 사라지고 정권과 친분이 있는 소수 흑인들만 특혜를 보고 있다는 불만이 커진 것입니다.

<인터뷰> 아토니(남아공대학 경제학교수) : "1994년의 남아공에는 장미빛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 도덕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정의로운 의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백인들 역시 흑인 우대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취업에서 흑인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 것은 물론 공무원이 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콜린(남아공 메일 앤 가디언 편집장) : "결국 남아공에는 우수인재 부족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만약 흑인 우대정책을 완화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고위 관료부터 이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흑인 대통령 집권 14년간 겉으로 드러난 남아공의 경제성적표는 나쁘지 않습니다.

연평균 3-4%의 견조한 성장을 하고 있고, 백인 쿠데타나 종족분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은 마음대로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고 흑인 중산층도 늘었습니다.

하지만 14년 전 한껏 부풀었던 흑인들의 기대치는 이제 가라앉고 있습니다. 집과 직업을 하루아침에 보장해줄 것처럼 약속한 흑인지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권 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흑인지도자들의 선동과는 달리 정치적 승리가 소수 흑인에게만 혜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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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아공 흑인 정권 14년, 그 후
    • 입력 2008-05-11 09:53:54
    • 수정2008-05-11 11:11:42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멘트> 14년 전 오늘, 지독한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로 악명이 높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최초의 흑인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오랫동안 설움을 받아오던 흑인들은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에 환호성을 질렀고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로 들떴었는데요.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흑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고 백인들도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인종이 화합하는 무지개 국가를 만들겠다며 출범했던 흑인정권 14년의 현주소를 윤양균 순회특파원이 밀착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94년 5월 10일. 세계인들의 축하 속에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습니다. 지독한 인종차별정책이 남아공에서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인터뷰> 만델라(남아공 첫 흑인대통령) :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이어줄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대를 시작할 시간이 왔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만델라 대통령의 출신지이자 남아공 최대의 빈민지역 소웨토를 찾았습니다. 과거 백인들이 통치하던 시절 흑인들이 요하네스버그 시내로 출퇴근하며 일한 뒤 쉴 수 있도록 만든 집단 거주지이기도 합니다. 지난 1994년 5월 이곳은 자유총선거를 통한 흑인정권의 탄생에 환호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14년이 된 지금 그들의 환호성은 생존을 위한 고달픈 한숨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흑인 대통령을 맞은 지 14년이 됐지만, 판자촌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식수와 전기는 몰래 끌어다 써야하고, 오물처리시설도 없습니다. 구멍 난 양철 지붕은 날이 맑을 때 잽싸게 손을 봐야합니다. <인터뷰> 제우고(소웨토 거주민) : "정부가 우리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웃들이 온통 범죄에 노출돼있지만 정부는 신경도 안쓰잖아요." 소웨토 거주민의 대다수는 막노동 일을 하며 대부분 한달 100달러 이하의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46살의 마쇼아도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어린 2명의 자녀와 부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15제곱미터 남짓한 판잣집에 커튼으로 절반을 막아 4명의 가족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가난을 벗어날 것이라던 14년 전의 꿈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인터뷰> 마쇼아(소웨토 거주민) : "흑인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수만 부자가 되게 했을 뿐 저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도움이 된 게 없어요." 과거 남아공 경제를 이끌던 요하네스버그의 도심은 우뚝 솟아있는 고층빌딩들이 예전의 영화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도심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거대한 슬럼가로 변해있습니다. 거리에는 온통 흑인만 보일뿐 백인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과거 이곳 요하네스버그 도심은 흑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곳입니다. 14년이 흐른 지금 백인들은 도심을 떠나고 흑인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흑인들의 통행 제한이 사라지면서 일자리를 찾아 흑인들이 밀려오자 백인들이 떠난 것입니다. 백인들이 떠나면서 일자리는 더욱 사라지고 이제는 인근 짐바브웨나 나이지리아에서 밀입국한 흑인들까지 몰려들고 있습니다. 도심 치안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낯선 이방인이 20분 이상 머물경우 강력범죄를 당할 확률이 8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인터뷰> 아토니(남아공대학 경제학교수) : "범죄를 유발하는 실업이 감소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업은 단기간 내에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요하네스버그 도심에서 십여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백인거주지역. 만델라 동상이 세워져있지만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대부분 백인입니다. 마치 유럽의 한 도시를 옮겨다 놓은 듯한 이곳은 잘 정돈된 도로에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흑인 거주지역과 비교하면 별천지와 같은 이곳은 10년 전부터 백인들이 살기 위해 새로 만든 곳입니다. 백인들이 사는 집은 높은 담장 위로 2만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습니다. 입구에는 사설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고, 내부를 들어서면 잔디 깔린 정원에 곳곳에서 스프링클러가 돌고 있습니다. 제도상으로는 인종차별이 없어졌지만 흑과 백은 엄연히 분리돼 살고 있고 빈부격차도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니키웨(CNBC 비지니스 뉴스 앵커) : "제 생각에 (남아공 정부가) 가장 큰 도전과제는 (흑인들의) 실업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빈부격차를 어떻게 좁히느냐하는 것입니다." 남아공의 전체인구는 대략 4천7백만명. 이 가운데 흑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정도입니다. 남아공의 공식 실업률은 25%. 실제 실업률은 4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흑인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아공 정부는 흑인들의 빈곤타개를 위해 강력한 흑인 우대 경제정책 즉 BEE를 발표했습니다. 이에따라 정부 발주 공사는 흑인 사장이 있는 건설회사에 우선권을 줍니다. 또 공무원은 대부분 흑인들로 채워지게 됐고, 민간기업도 업종에 따라 25~40%까지 흑인을 의무적으로 채용하도록 했습니다. 능력보다는 피부색깔을 기준으로 우선 채용하는 결과. 당연히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가 시장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인터뷰> 음흐람비(압사은행 흑인경제담당) : "BEE는 기업지향적인 정책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정치적 배경의 힘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흑인 우대 정책이 당초의 취지에서 벗어나 정부 고위 인사와 친분이 있는 흑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 음베키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된 주마 ANC의장도 각종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차별을 받던 흑인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준다던 당초의 명분은 사라지고 정권과 친분이 있는 소수 흑인들만 특혜를 보고 있다는 불만이 커진 것입니다. <인터뷰> 아토니(남아공대학 경제학교수) : "1994년의 남아공에는 장미빛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 도덕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정의로운 의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백인들 역시 흑인 우대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취업에서 흑인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 것은 물론 공무원이 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콜린(남아공 메일 앤 가디언 편집장) : "결국 남아공에는 우수인재 부족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만약 흑인 우대정책을 완화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고위 관료부터 이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흑인 대통령 집권 14년간 겉으로 드러난 남아공의 경제성적표는 나쁘지 않습니다. 연평균 3-4%의 견조한 성장을 하고 있고, 백인 쿠데타나 종족분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은 마음대로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고 흑인 중산층도 늘었습니다. 하지만 14년 전 한껏 부풀었던 흑인들의 기대치는 이제 가라앉고 있습니다. 집과 직업을 하루아침에 보장해줄 것처럼 약속한 흑인지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권 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흑인지도자들의 선동과는 달리 정치적 승리가 소수 흑인에게만 혜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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