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람] 흙으로 빚은 ‘기다림의 철학’

입력 2009.02.2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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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우리 음식은 우리 그릇에 담고 보관해야 우리 고유의 맛이 나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들어지기에 더 귀한, 우리의 전통 그릇 옹기. 정성호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늘어선 장독들에서 간장과 된장.

우리 전통의 맛이 익어가는 모습은 한국인에겐 푸근한 고향집 풍경입니다.

겨우내 처마 밑 양지에서 말린 메주는 바로 우리 맛의 원천입니다.

메주를 띄우기 위해 소금을 휘젓는 종갓집 며느리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합니다.

<녹취> "우수여서 장 담그는 날 적기에요. 장 담그기엔 제일 좋은 날이네."

소박하지만 깊은 고향의 장맛.

그 속엔 오랜 삶의 지혜가 배여 있습니다.

<녹취> 김전순(강진 된장마을 주민) : "고추는 매콤하니 맛있게 우러나라고 담고, 대추도 달면서 반지랍고(윤이 나고) 좋은 맛 나게..."

양지바른 곳, 넉넉한 옹기 안에서 달포 가량 곰삭은 메줏덩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옹기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햇간장을 품에 안습니다.

<인터뷰> 백정자(강진 된장마을 대표) : "우리 시어머니가 시집 왔을 때 그 항아리가 지금도 장항아리인데요. 그러니까 그 항아리가 몇 년이 됐겠어요. 적어도 거의 100년이 됐겠죠."

깨지기 쉬운 옹기보다 가볍고 간편한 플라스틱 그릇이 넘쳐나면서 스무 명이 넘던 마을 옹기장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반세기 넘게 옹기와 씨름해온 정윤석씨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대견스레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아들 때문이었는 지 모릅니다.

그 사이 포구를 오가며 옹기를 실어나르던 30여척의 배들도 모두 자취를 감췄습니다.

<녹취> 정윤석(칠량옹기 장인) : "저희가 만든 옹기를 전부 다 배로 싣고 다니면서 팔아 왔거든요. 그랬었는데, 선원들이 수지 타산이 안 맞으니까..."

남도의 논밭, 지천에 깔린 흙으로 만들어지는 옹기.

'떡매질'을 반복하며 굵은 돌만 골라낼 뿐, 자연 그대로입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장인의 손끝에서 옹기는 고운 곡선을 드러냅니다.

<인터뷰> 정영균(칠량옹기 전수자) : "선이 정말 아름다워요. 어떻게 보면 전라도 옹기는 백자 항아리 그 모습, 그 자체거든요."

기나 긴 기다림의 시간.

바람을 쐰 독은, 유약을 머금은 채 다시 한 번 바람에 맡겨집니다.

<녹취> "고생한 보람있게 옹기 잘 되게 해주쇼."

이글거리는 가마에서 며칠씩 불길을 감내하는 항아리.

인고의 세월을 거치고 나서야 옹기는 작은 숨구멍을 엽니다.

거칠지만, 단순하면서도 수수한 우리의 그릇입니다.

<인터뷰> 정윤석(칠량옹기 장인) : "여러 그릇이 있지만, 써 보고 옹기가 최고다 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올 것이다."

뒷마당 한켠, 볕이 드는 곳이면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던 옹기.

흙과 바람과 불이 빚어낸 자연의 예술품, 옹기에는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가 담겨 있습니다.

KBS 뉴스 정성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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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와 사람] 흙으로 빚은 ‘기다림의 철학’
    • 입력 2009-02-21 21:27:29
    뉴스 9
<앵커 멘트> 우리 음식은 우리 그릇에 담고 보관해야 우리 고유의 맛이 나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들어지기에 더 귀한, 우리의 전통 그릇 옹기. 정성호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늘어선 장독들에서 간장과 된장. 우리 전통의 맛이 익어가는 모습은 한국인에겐 푸근한 고향집 풍경입니다. 겨우내 처마 밑 양지에서 말린 메주는 바로 우리 맛의 원천입니다. 메주를 띄우기 위해 소금을 휘젓는 종갓집 며느리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합니다. <녹취> "우수여서 장 담그는 날 적기에요. 장 담그기엔 제일 좋은 날이네." 소박하지만 깊은 고향의 장맛. 그 속엔 오랜 삶의 지혜가 배여 있습니다. <녹취> 김전순(강진 된장마을 주민) : "고추는 매콤하니 맛있게 우러나라고 담고, 대추도 달면서 반지랍고(윤이 나고) 좋은 맛 나게..." 양지바른 곳, 넉넉한 옹기 안에서 달포 가량 곰삭은 메줏덩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옹기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햇간장을 품에 안습니다. <인터뷰> 백정자(강진 된장마을 대표) : "우리 시어머니가 시집 왔을 때 그 항아리가 지금도 장항아리인데요. 그러니까 그 항아리가 몇 년이 됐겠어요. 적어도 거의 100년이 됐겠죠." 깨지기 쉬운 옹기보다 가볍고 간편한 플라스틱 그릇이 넘쳐나면서 스무 명이 넘던 마을 옹기장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반세기 넘게 옹기와 씨름해온 정윤석씨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대견스레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아들 때문이었는 지 모릅니다. 그 사이 포구를 오가며 옹기를 실어나르던 30여척의 배들도 모두 자취를 감췄습니다. <녹취> 정윤석(칠량옹기 장인) : "저희가 만든 옹기를 전부 다 배로 싣고 다니면서 팔아 왔거든요. 그랬었는데, 선원들이 수지 타산이 안 맞으니까..." 남도의 논밭, 지천에 깔린 흙으로 만들어지는 옹기. '떡매질'을 반복하며 굵은 돌만 골라낼 뿐, 자연 그대로입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장인의 손끝에서 옹기는 고운 곡선을 드러냅니다. <인터뷰> 정영균(칠량옹기 전수자) : "선이 정말 아름다워요. 어떻게 보면 전라도 옹기는 백자 항아리 그 모습, 그 자체거든요." 기나 긴 기다림의 시간. 바람을 쐰 독은, 유약을 머금은 채 다시 한 번 바람에 맡겨집니다. <녹취> "고생한 보람있게 옹기 잘 되게 해주쇼." 이글거리는 가마에서 며칠씩 불길을 감내하는 항아리. 인고의 세월을 거치고 나서야 옹기는 작은 숨구멍을 엽니다. 거칠지만, 단순하면서도 수수한 우리의 그릇입니다. <인터뷰> 정윤석(칠량옹기 장인) : "여러 그릇이 있지만, 써 보고 옹기가 최고다 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올 것이다." 뒷마당 한켠, 볕이 드는 곳이면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던 옹기. 흙과 바람과 불이 빚어낸 자연의 예술품, 옹기에는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가 담겨 있습니다. KBS 뉴스 정성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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