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사진 찍는 날

입력 2010.03.0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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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말을 꺼내기가 송구스러운 게 바로 영정사진입니다.

그렇다고 어르신들이 스스로 찍자니 사진관이 드문 시골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벽지를 찾아다니며 영정 사진을 찍어드리는 자원봉사도 많은데요, 일생을 거쳐 만들어진 표정을 사진 한 장에 담는 순간,

그 분위기는 어떨까요?

경기도 여주의 한 시골 교회에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듭니다.

구석에 있는 작은 방은 분장실이 됐습니다.

<녹취> "(한복 입고 오라고 그랬잖아.) 드라이하려고 다 뜯어놓았어."

무대 공연을 앞둔 여배우들처럼 마음이 들뜹니다.

턱도 이렇게 갸름하게 깎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입체로, 이렇게 갸름하게, 달걀형으로.

머리 모양도 매만지고 입술도 곱게 바릅니다.

<녹취> "(여자가 변신하면...) 무죄에요, 여자의 변신은."

<녹취> "우리 애들이 와서 나 죽는 날 (사진을) 보면 깜짝 놀라겠네."

할아버지들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얼굴을 가꿉니다.

<녹취> "면도할 때 밑에도 좀 깎아요, 어르신. 밑에는 안 깎아가지고 길어. 그럼 안 되지. 예쁘장하게 지내셔야지."

<녹취> "업어갈 과부가 어디 있어, 지내리에서."

배경막이 펼쳐지고 조명까지 설치되니 사진관이나 다름없습니다.

드디어 어르신들이 영정사진을 찍는 시간.

얼굴 표정들이 조금씩 굳어졌습니다.

<녹취> "표정을 밝게 해주셔야돼요, 아버님! 속으로 웃으시면 표정이 밝거든요. 저희는 볼 수 있어요, 속으로 웃으시면. 좋습니다. 지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조금은 긴장이 됩니다.

<인터뷰> 강영례(73세) : "내가 이 세상 사는데 잘못한 것은 없나 생각해보고. (지금 그런 생각이 드세요? 혹시 뭘 잘못했다, 생각나는 것 있으세요?) 영감이 환자로 있으니까, 그 영감도 성하면 와서 사진도 찍고 그러는데 집에 있잖아. 한평생 걸려."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느라 자식을 보지 못한 강영례 할머니도, 91살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임정희 할머니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자신의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녹취> 임정희(68세) : "(귀고리도 하고 오셨네, 오늘. 누가 업어 가면 어떡하려고?) 업어 가면 쫓아가야지 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올해 58살인 이봉준 씨.

취미 삼아 사진을 찍다가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영정 사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시골 마을 100여 곳을 돌며 6천 명이 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액자에 담아드렸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께서 마흔 다섯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을 때,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어 더욱 서러웠던 기억이 이 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이봉준(사진작가) : "(혹시 찍다 본인 어머니랑 닮으셨던 분 보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많이 있었죠. 충청도 쪽에서 찍을 때인데, 유성에서 찍었던 것 같아요. 저희 고향이 전주이기 때문에 말소리가 전주하고 유성하고 똑같습니다. 사투리가 갑자기 들렸는데 목소리도 똑같고 해서 어머니 아닌가 돌아볼 때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아파서 돌아가신 게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도 방송에서 가족 찾기 볼 때 어머니가 나오는 게 아닌가 볼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오늘은 사진이 주인을 찾아가는 날.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해서 마음이 설레입니다.

<녹취> "아가씨 같아요. 부부로 찍은 것도 잘 나오고. 아가씨처럼 나왔잖아. 눈썹도 그려주더니 눈썹도 하나는 짝짝이고."

젊어 보인다는 말이 가장 듣기 좋습니다.

<녹취> "(좌우간 득남해도 되겠어요. 한참 젊어 보이시는 것 보니까) 네, 감사합니다."

<녹취> "너무 잘 나왔죠? 미남이잖아요. 국회의원 같아요."

<녹취> "돈이나 좀 있으면 국회의원보다는 군수나 한 번 나오고 싶은데..."

하지만 사진이 잘 나와 기쁜 것도, 잘 나오지 못해 서운한 것도 잠시.

이내 만감이 교차합니다.

<녹취> 김순옥(71세) : "죽을 때가 됐구나 싶어요. (더 오래 사시라고 찍는데...) 오래 사는 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병들어서 오래 살면 되레 나쁘지요."

<녹취> 이정숙(72세) : "(사진 찍으면 더 장수한다고 그러시던데….) 오래 살까 걱정이에요. (오래 사셔야죠.) 너무 오래 살아도 그렇잖아요."

사진을 받아들고 집으로 가는 길.

허리가 아파서 밀고 다니는 유모차에 자신의 사진을 앉혔습니다.

혼자 지내는 썰렁한 집에 자신의 사진을 들여놓고 나니 먼저 가신 영감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인터뷰> 김무순(85세) :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안 보고 싶어요. 너무 고생시켜서 너무 고생시켜서 안 보고 싶어요.
어떨 때는 죽은 귀신도 밉고, 너무 고생을 시켜서."

<인터뷰> 김무순(85세) : "작은 마누라 얻어서 한 집에서 살다가 먹을 거 없으면 나가고... 내가 벌어먹고 사는데."

열여섯 살에 시집을 와서 이제 여든 다섯, 아직도 딸들 걱정이 태산입니다.

<인터뷰> 김무순(85세) : "우리 애들, 딸들 건강할 때 가야지. 그래도 사진을 찍어놓으니 밀린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경기도 안산의 경로당에서도 촬영 준비가 한창입니다.

<녹취> 김종섬(74세) : "(루즈는 왜 바르려고 해, 남자가?) 사진이 잘 나온다면서."

그런데 사진을 찍는 사람은 84살의 권동규 옹.

자신보다 10살이나 젊은 노인들의 영정 사진을 만들어주는 건 먼저 보낸 부인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인터뷰> 권동규(84세) : "내가 사람을 하나 잃었거든요. 사별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사진이 없어, 내가 평소에 사진을 찍으면서 그 사진은 안 해 놓은 거예요. "

이렇게 영정 사진 봉사를 자청한 노인들만 20여 명.

함께 사진을 공부하는 모임까지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라영수(노인정보화교육원 원장) : "노인들이 스스로 제 주머니에서 돈을 빼서 사진관에 가서 자기 영정을 찍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또 자제들이 아버지 영정을 찍읍시다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노인을 위해 무료 봉사를 하는 것이죠."

촬영뿐만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사진을 교정하는 방법까지 익힙니다.

솜씨가 젊은이들 못지않아서 사진 속 주인공은 금세 젊음을 되찾았습니다.

<인터뷰> 박창선(71세) : "(본인 사진은 어떻게 고치고 싶으세요?) 젊게, 젊게 고쳐야지. 주름 같은 거 펴고 밝은 빛으로 고치고 싶어요."

세상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긴 인생 여정을 대신 말해줄 한 장의 표정.

영정 사진이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인생은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곱게 단장을 하고 사진기 앞에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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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정 사진 찍는 날
    • 입력 2010-03-08 11:43:11
    취재파일K
자식이 말을 꺼내기가 송구스러운 게 바로 영정사진입니다. 그렇다고 어르신들이 스스로 찍자니 사진관이 드문 시골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벽지를 찾아다니며 영정 사진을 찍어드리는 자원봉사도 많은데요, 일생을 거쳐 만들어진 표정을 사진 한 장에 담는 순간, 그 분위기는 어떨까요? 경기도 여주의 한 시골 교회에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듭니다. 구석에 있는 작은 방은 분장실이 됐습니다. <녹취> "(한복 입고 오라고 그랬잖아.) 드라이하려고 다 뜯어놓았어." 무대 공연을 앞둔 여배우들처럼 마음이 들뜹니다. 턱도 이렇게 갸름하게 깎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입체로, 이렇게 갸름하게, 달걀형으로. 머리 모양도 매만지고 입술도 곱게 바릅니다. <녹취> "(여자가 변신하면...) 무죄에요, 여자의 변신은." <녹취> "우리 애들이 와서 나 죽는 날 (사진을) 보면 깜짝 놀라겠네." 할아버지들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얼굴을 가꿉니다. <녹취> "면도할 때 밑에도 좀 깎아요, 어르신. 밑에는 안 깎아가지고 길어. 그럼 안 되지. 예쁘장하게 지내셔야지." <녹취> "업어갈 과부가 어디 있어, 지내리에서." 배경막이 펼쳐지고 조명까지 설치되니 사진관이나 다름없습니다. 드디어 어르신들이 영정사진을 찍는 시간. 얼굴 표정들이 조금씩 굳어졌습니다. <녹취> "표정을 밝게 해주셔야돼요, 아버님! 속으로 웃으시면 표정이 밝거든요. 저희는 볼 수 있어요, 속으로 웃으시면. 좋습니다. 지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조금은 긴장이 됩니다. <인터뷰> 강영례(73세) : "내가 이 세상 사는데 잘못한 것은 없나 생각해보고. (지금 그런 생각이 드세요? 혹시 뭘 잘못했다, 생각나는 것 있으세요?) 영감이 환자로 있으니까, 그 영감도 성하면 와서 사진도 찍고 그러는데 집에 있잖아. 한평생 걸려."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느라 자식을 보지 못한 강영례 할머니도, 91살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임정희 할머니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자신의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녹취> 임정희(68세) : "(귀고리도 하고 오셨네, 오늘. 누가 업어 가면 어떡하려고?) 업어 가면 쫓아가야지 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올해 58살인 이봉준 씨. 취미 삼아 사진을 찍다가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영정 사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시골 마을 100여 곳을 돌며 6천 명이 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액자에 담아드렸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께서 마흔 다섯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을 때,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어 더욱 서러웠던 기억이 이 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이봉준(사진작가) : "(혹시 찍다 본인 어머니랑 닮으셨던 분 보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많이 있었죠. 충청도 쪽에서 찍을 때인데, 유성에서 찍었던 것 같아요. 저희 고향이 전주이기 때문에 말소리가 전주하고 유성하고 똑같습니다. 사투리가 갑자기 들렸는데 목소리도 똑같고 해서 어머니 아닌가 돌아볼 때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아파서 돌아가신 게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도 방송에서 가족 찾기 볼 때 어머니가 나오는 게 아닌가 볼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오늘은 사진이 주인을 찾아가는 날.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해서 마음이 설레입니다. <녹취> "아가씨 같아요. 부부로 찍은 것도 잘 나오고. 아가씨처럼 나왔잖아. 눈썹도 그려주더니 눈썹도 하나는 짝짝이고." 젊어 보인다는 말이 가장 듣기 좋습니다. <녹취> "(좌우간 득남해도 되겠어요. 한참 젊어 보이시는 것 보니까) 네, 감사합니다." <녹취> "너무 잘 나왔죠? 미남이잖아요. 국회의원 같아요." <녹취> "돈이나 좀 있으면 국회의원보다는 군수나 한 번 나오고 싶은데..." 하지만 사진이 잘 나와 기쁜 것도, 잘 나오지 못해 서운한 것도 잠시. 이내 만감이 교차합니다. <녹취> 김순옥(71세) : "죽을 때가 됐구나 싶어요. (더 오래 사시라고 찍는데...) 오래 사는 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병들어서 오래 살면 되레 나쁘지요." <녹취> 이정숙(72세) : "(사진 찍으면 더 장수한다고 그러시던데….) 오래 살까 걱정이에요. (오래 사셔야죠.) 너무 오래 살아도 그렇잖아요." 사진을 받아들고 집으로 가는 길. 허리가 아파서 밀고 다니는 유모차에 자신의 사진을 앉혔습니다. 혼자 지내는 썰렁한 집에 자신의 사진을 들여놓고 나니 먼저 가신 영감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인터뷰> 김무순(85세) :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안 보고 싶어요. 너무 고생시켜서 너무 고생시켜서 안 보고 싶어요. 어떨 때는 죽은 귀신도 밉고, 너무 고생을 시켜서." <인터뷰> 김무순(85세) : "작은 마누라 얻어서 한 집에서 살다가 먹을 거 없으면 나가고... 내가 벌어먹고 사는데." 열여섯 살에 시집을 와서 이제 여든 다섯, 아직도 딸들 걱정이 태산입니다. <인터뷰> 김무순(85세) : "우리 애들, 딸들 건강할 때 가야지. 그래도 사진을 찍어놓으니 밀린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경기도 안산의 경로당에서도 촬영 준비가 한창입니다. <녹취> 김종섬(74세) : "(루즈는 왜 바르려고 해, 남자가?) 사진이 잘 나온다면서." 그런데 사진을 찍는 사람은 84살의 권동규 옹. 자신보다 10살이나 젊은 노인들의 영정 사진을 만들어주는 건 먼저 보낸 부인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인터뷰> 권동규(84세) : "내가 사람을 하나 잃었거든요. 사별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사진이 없어, 내가 평소에 사진을 찍으면서 그 사진은 안 해 놓은 거예요. " 이렇게 영정 사진 봉사를 자청한 노인들만 20여 명. 함께 사진을 공부하는 모임까지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라영수(노인정보화교육원 원장) : "노인들이 스스로 제 주머니에서 돈을 빼서 사진관에 가서 자기 영정을 찍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또 자제들이 아버지 영정을 찍읍시다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노인을 위해 무료 봉사를 하는 것이죠." 촬영뿐만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사진을 교정하는 방법까지 익힙니다. 솜씨가 젊은이들 못지않아서 사진 속 주인공은 금세 젊음을 되찾았습니다. <인터뷰> 박창선(71세) : "(본인 사진은 어떻게 고치고 싶으세요?) 젊게, 젊게 고쳐야지. 주름 같은 거 펴고 밝은 빛으로 고치고 싶어요." 세상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긴 인생 여정을 대신 말해줄 한 장의 표정. 영정 사진이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인생은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곱게 단장을 하고 사진기 앞에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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