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었던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총독부조차 부담감 때문에 반대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관련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KBS가 단독 입수했습니다.
도쿄 김대홍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일본 와세다 대학이 지난 1958년부터 4년간 전 조선 총독부 고위 간부 120명의 증언을 채취한 육성 테이프입니다.
총독부 제2인자였던 정무총감은 창씨개명은 총독부로서도 큰 부담이었음을 토로했습니다.
<녹취> 오노(조선총독부 당시 정무총감 : "강제로 (창씨개명을) 실행했어요. 그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총독은 ’무리하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속마음은 무리해서라도 바꾸라는 거죠."
거부하는 조선인에겐 자녀들의 교육중지 등 갖은 협박을 했지만 저항만 더 커졌다는 겁니다.
치안을 담당했던 경무국장마저 창씨개명에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녹취> 미쯔하시(조선총독부 당시 경무국장) : "(일본이름으로 바꾸면)누가 누군지, 알수 없게 돼 곤란했거든요. 경찰은 창씨 개명에 협력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또 조선인 징병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육군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 이하라(조선총독부 당시 군사보좌관) : (왜, 육군은 조선인 징병을 꺼려했나요?) " 그것은 조선인이 우리에게 총포를 겨누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부대를 편성하면서 일제는 조선출신 병사들을 격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육성 증언의 존재는 10년전 알려졌지만, 800분이나 돼 창씨개명 등과 관련된 실제 육성증언은 이번에 KBS가 처음 입수했습니다.
도쿄에서 KBS 뉴스 김대홍입니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었던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총독부조차 부담감 때문에 반대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관련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KBS가 단독 입수했습니다.
도쿄 김대홍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일본 와세다 대학이 지난 1958년부터 4년간 전 조선 총독부 고위 간부 120명의 증언을 채취한 육성 테이프입니다.
총독부 제2인자였던 정무총감은 창씨개명은 총독부로서도 큰 부담이었음을 토로했습니다.
<녹취> 오노(조선총독부 당시 정무총감 : "강제로 (창씨개명을) 실행했어요. 그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총독은 ’무리하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속마음은 무리해서라도 바꾸라는 거죠."
거부하는 조선인에겐 자녀들의 교육중지 등 갖은 협박을 했지만 저항만 더 커졌다는 겁니다.
치안을 담당했던 경무국장마저 창씨개명에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녹취> 미쯔하시(조선총독부 당시 경무국장) : "(일본이름으로 바꾸면)누가 누군지, 알수 없게 돼 곤란했거든요. 경찰은 창씨 개명에 협력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또 조선인 징병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육군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 이하라(조선총독부 당시 군사보좌관) : (왜, 육군은 조선인 징병을 꺼려했나요?) " 그것은 조선인이 우리에게 총포를 겨누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부대를 편성하면서 일제는 조선출신 병사들을 격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육성 증언의 존재는 10년전 알려졌지만, 800분이나 돼 창씨개명 등과 관련된 실제 육성증언은 이번에 KBS가 처음 입수했습니다.
도쿄에서 KBS 뉴스 김대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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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간부도 ‘창씨개명’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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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0-08-13 22:08:00
<앵커 멘트>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었던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총독부조차 부담감 때문에 반대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관련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KBS가 단독 입수했습니다.
도쿄 김대홍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일본 와세다 대학이 지난 1958년부터 4년간 전 조선 총독부 고위 간부 120명의 증언을 채취한 육성 테이프입니다.
총독부 제2인자였던 정무총감은 창씨개명은 총독부로서도 큰 부담이었음을 토로했습니다.
<녹취> 오노(조선총독부 당시 정무총감 : "강제로 (창씨개명을) 실행했어요. 그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총독은 ’무리하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속마음은 무리해서라도 바꾸라는 거죠."
거부하는 조선인에겐 자녀들의 교육중지 등 갖은 협박을 했지만 저항만 더 커졌다는 겁니다.
치안을 담당했던 경무국장마저 창씨개명에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녹취> 미쯔하시(조선총독부 당시 경무국장) : "(일본이름으로 바꾸면)누가 누군지, 알수 없게 돼 곤란했거든요. 경찰은 창씨 개명에 협력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또 조선인 징병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육군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 이하라(조선총독부 당시 군사보좌관) : (왜, 육군은 조선인 징병을 꺼려했나요?) " 그것은 조선인이 우리에게 총포를 겨누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부대를 편성하면서 일제는 조선출신 병사들을 격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육성 증언의 존재는 10년전 알려졌지만, 800분이나 돼 창씨개명 등과 관련된 실제 육성증언은 이번에 KBS가 처음 입수했습니다.
도쿄에서 KBS 뉴스 김대홍입니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었던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총독부조차 부담감 때문에 반대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관련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KBS가 단독 입수했습니다.
도쿄 김대홍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일본 와세다 대학이 지난 1958년부터 4년간 전 조선 총독부 고위 간부 120명의 증언을 채취한 육성 테이프입니다.
총독부 제2인자였던 정무총감은 창씨개명은 총독부로서도 큰 부담이었음을 토로했습니다.
<녹취> 오노(조선총독부 당시 정무총감 : "강제로 (창씨개명을) 실행했어요. 그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총독은 ’무리하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속마음은 무리해서라도 바꾸라는 거죠."
거부하는 조선인에겐 자녀들의 교육중지 등 갖은 협박을 했지만 저항만 더 커졌다는 겁니다.
치안을 담당했던 경무국장마저 창씨개명에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녹취> 미쯔하시(조선총독부 당시 경무국장) : "(일본이름으로 바꾸면)누가 누군지, 알수 없게 돼 곤란했거든요. 경찰은 창씨 개명에 협력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또 조선인 징병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육군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 이하라(조선총독부 당시 군사보좌관) : (왜, 육군은 조선인 징병을 꺼려했나요?) " 그것은 조선인이 우리에게 총포를 겨누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부대를 편성하면서 일제는 조선출신 병사들을 격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육성 증언의 존재는 10년전 알려졌지만, 800분이나 돼 창씨개명 등과 관련된 실제 육성증언은 이번에 KBS가 처음 입수했습니다.
도쿄에서 KBS 뉴스 김대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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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기자 kdhon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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