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이산가족 상봉, 그 후…

입력 2010.11.0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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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1년 만에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어제 끝났습니다.



꿈에 그리던 혈육을 60년 만에 만났지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에 2박 3일은 너무 짧았습니다.



<리포트>



“10분 남았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상봉장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남한의 동생은 북한의 오빠 손을 차마 놓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또 형을 만날 수 있을까 동생은 몇 번이고 형의 뺨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비빕니다.



1.4 후퇴 때 북한에 남겨둔 딸의 마지막 인사,



딸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휠체어를 타고 금강산에 온 아흔 여섯 살의 김례정 할머니는 어느새 일흔이 넘은 딸의 손을 말없이 꼭 잡았습니다.



김례정 할머니는 아들의 손에 들어 올려져 떠나가는 딸을 한 번 더 품에 안았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린 자매는 또 한 번의 이별 앞에 오열합니다.



60년만의 만남이 어색한 듯 내내 굳어있던 북한의 오빠는 헤어질 때가 되서야 참아왔던 굵은 눈물을 떨궜습니다.



60년 세월을 나누기엔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녹취> 떨어져주세요. 나와 주세요.



만나는 데 60년이 걸릴 줄 몰랐듯 또 다시 만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알지 못한 채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는 이별했습니다.

큰 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김례정 할머니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녹취> 김례정(96세/우정혜 씨(딸) 상봉) : "꿈에만 만나고 꿈에만 그리던 딸을 만나니까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기쁘고 너무 좋았어요."



재회의 기쁨은 컸지만, 60년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에 2박 3일은 턱없이 짧았습니다.



<인터뷰> 우영식(74세/우정혜 씨(동생) 상봉) : "6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면서 11시간 가서 무슨 얘기를 다 하겠습니까.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만났다가 또 막상 그것도 잊어버리고 얘기도 못하고."



이제 남쪽의 어머니에겐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딸을 만난 기억과 그 딸이 준 비단 옷감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우영식(74세/우정혜 씨(동생) 상봉) : "짧은 이 순간의 것으로 다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쟤네들은 저쪽에 가서 어떻게 살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은 있지만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한편 앞서더라고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갑니다.



<녹취> 김례정(96세/우정혜 씨(딸) 상봉) : "너무 그립고 섭섭하고 다시 한 번 또 만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뿐이지. 어떻게 해줄 수는 없고, 내가 뭐 해주고 싶은 거 맘대로 해줄 수도 없고. 마음뿐이지."



최오식 씨 가족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던 형이 살아서 형제들을 찾는다는 소식에 감격했습니다.



<인터뷰>최오식(63세/최의식 씨(형) 상봉) : "내 형이 살아계셨다는 데 너무 고맙고 그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또... (울먹) 멍한데... 그건 하...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못 느낄 거예요."



부모님은 큰아들이라도 살리겠다고 황해도 연백의 큰집으로 피난을 보냈지만 나중에 들려온 건 큰집 식구 모두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인터뷰>최오식(63세/최의식 씨(형) 상봉) : "북측에 내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살아계셨고 거기로 우리 형을 보냈는데 가족이 다 살해당했다고 하니까 우리 형만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까 돌아가셨겠지…."



60년 만에 살아있는 형을 만났지만 상봉 내내 웃음보다 눈물이 앞섰습니다.



<인터뷰>최예식(68세/최의식 씨(오빠) 상봉) : "아… 헤어져서 다시는 못 볼 거니까 그냥 눈물만 나지, 뭐.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하겠어. 거기에 함축이 다 돼있지."



혈육을 북한에 홀로 남겨두고 돌아온 가족들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인터뷰>최예식(68세/최의식 씨(오빠) 상봉) : "오빠만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져.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방법이 없잖아. 연락을 해볼 수가 있나. 안 만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안타까워서…."



상봉의 순간은 이제 영상으로만 남았고 다시 서로 오갈 수도 소식도 주고받을 수도 없는 남남으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인터뷰>최지식(66세/최의식 씨(오빠) 상봉) : "그 분이 내일 돌아가신다고 해도 우린 모르고 못 볼 것이고 또 그 분 역시도 그렇고. 그렇게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또 남남이 돼서 오빠는 이북에서, 우리는 남한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지난달 30일부터 이뤄진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북측 신청자 97명과 남측의 가족 436명이, 남측 신청자 94명과 북측의 가족 207명이 재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2박 3일 동안 혈육을 만난 건 단 11시간이었습니다.



짧은 만남 뒤 기약 없는 이별에 이산가족들은 다시 슬픔에 빠졌습니다.



60년 만에 이뤄진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남은 생애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야하는 이산가족들.



그래서 만나기 전에 이별부터 걱정했습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이산가족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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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이산가족 상봉, 그 후…
    • 입력 2010-11-06 14:27:12
    남북의 창
<앵커 멘트>

1년 만에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어제 끝났습니다.

꿈에 그리던 혈육을 60년 만에 만났지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에 2박 3일은 너무 짧았습니다.

<리포트>

“10분 남았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상봉장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남한의 동생은 북한의 오빠 손을 차마 놓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또 형을 만날 수 있을까 동생은 몇 번이고 형의 뺨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비빕니다.

1.4 후퇴 때 북한에 남겨둔 딸의 마지막 인사,

딸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휠체어를 타고 금강산에 온 아흔 여섯 살의 김례정 할머니는 어느새 일흔이 넘은 딸의 손을 말없이 꼭 잡았습니다.

김례정 할머니는 아들의 손에 들어 올려져 떠나가는 딸을 한 번 더 품에 안았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린 자매는 또 한 번의 이별 앞에 오열합니다.

60년만의 만남이 어색한 듯 내내 굳어있던 북한의 오빠는 헤어질 때가 되서야 참아왔던 굵은 눈물을 떨궜습니다.

60년 세월을 나누기엔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녹취> 떨어져주세요. 나와 주세요.

만나는 데 60년이 걸릴 줄 몰랐듯 또 다시 만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알지 못한 채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는 이별했습니다.
큰 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김례정 할머니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녹취> 김례정(96세/우정혜 씨(딸) 상봉) : "꿈에만 만나고 꿈에만 그리던 딸을 만나니까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기쁘고 너무 좋았어요."

재회의 기쁨은 컸지만, 60년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에 2박 3일은 턱없이 짧았습니다.

<인터뷰> 우영식(74세/우정혜 씨(동생) 상봉) : "6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면서 11시간 가서 무슨 얘기를 다 하겠습니까.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만났다가 또 막상 그것도 잊어버리고 얘기도 못하고."

이제 남쪽의 어머니에겐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딸을 만난 기억과 그 딸이 준 비단 옷감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우영식(74세/우정혜 씨(동생) 상봉) : "짧은 이 순간의 것으로 다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쟤네들은 저쪽에 가서 어떻게 살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은 있지만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한편 앞서더라고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갑니다.

<녹취> 김례정(96세/우정혜 씨(딸) 상봉) : "너무 그립고 섭섭하고 다시 한 번 또 만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뿐이지. 어떻게 해줄 수는 없고, 내가 뭐 해주고 싶은 거 맘대로 해줄 수도 없고. 마음뿐이지."

최오식 씨 가족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던 형이 살아서 형제들을 찾는다는 소식에 감격했습니다.

<인터뷰>최오식(63세/최의식 씨(형) 상봉) : "내 형이 살아계셨다는 데 너무 고맙고 그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또... (울먹) 멍한데... 그건 하...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못 느낄 거예요."

부모님은 큰아들이라도 살리겠다고 황해도 연백의 큰집으로 피난을 보냈지만 나중에 들려온 건 큰집 식구 모두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인터뷰>최오식(63세/최의식 씨(형) 상봉) : "북측에 내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살아계셨고 거기로 우리 형을 보냈는데 가족이 다 살해당했다고 하니까 우리 형만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까 돌아가셨겠지…."

60년 만에 살아있는 형을 만났지만 상봉 내내 웃음보다 눈물이 앞섰습니다.

<인터뷰>최예식(68세/최의식 씨(오빠) 상봉) : "아… 헤어져서 다시는 못 볼 거니까 그냥 눈물만 나지, 뭐.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하겠어. 거기에 함축이 다 돼있지."

혈육을 북한에 홀로 남겨두고 돌아온 가족들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인터뷰>최예식(68세/최의식 씨(오빠) 상봉) : "오빠만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져.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방법이 없잖아. 연락을 해볼 수가 있나. 안 만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안타까워서…."

상봉의 순간은 이제 영상으로만 남았고 다시 서로 오갈 수도 소식도 주고받을 수도 없는 남남으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인터뷰>최지식(66세/최의식 씨(오빠) 상봉) : "그 분이 내일 돌아가신다고 해도 우린 모르고 못 볼 것이고 또 그 분 역시도 그렇고. 그렇게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또 남남이 돼서 오빠는 이북에서, 우리는 남한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지난달 30일부터 이뤄진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북측 신청자 97명과 남측의 가족 436명이, 남측 신청자 94명과 북측의 가족 207명이 재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2박 3일 동안 혈육을 만난 건 단 11시간이었습니다.

짧은 만남 뒤 기약 없는 이별에 이산가족들은 다시 슬픔에 빠졌습니다.

60년 만에 이뤄진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남은 생애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야하는 이산가족들.

그래서 만나기 전에 이별부터 걱정했습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이산가족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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