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고아 돕는 입양 한인 美 언론서 또 화제
입력 2010.12.30 (07:20)
수정 2010.12.3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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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 설립 한상만씨
한국전쟁 고아 출신으로 미국에 입양돼 성공하고 암과 투병하면서도 북한 고아를 돕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는 한상만(65)씨의 이야기가 미국 언론에 또다시 소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AP통신은 29일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설립해 북한과 캄보디아, 탄자니아 등의 고아를 돕는 활동을 해온 한 씨의 인생역정을 장문의 기사를 통해 소개했다.
한 씨의 이야기는 지난해 2월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AP는 한 씨가 "고아로 자란 성장배경을 되살려 외국의 고아들을 계속 돕기를 원하고 있으나 그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 씨는 2002년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다가 골수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들은 3∼5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 판정을 내렸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AP통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삶의 목표와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워줬다"고 논평했다.
한 씨는 암 진단 후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로스앤젤레스(LA) 인근 패서디나에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만들었다. 슈나이더는 그를 입양했던 미국인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한 씨는 한국전쟁 피난길에 가족과 헤어진 후 여섯살의 나이로 구걸로 연명했다. 12세 때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한 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슈나이더 미 미네소타대 교수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서울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슈나이더 교수는 한 씨의 사연을 듣고 교육비를 지원했고 4년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를 데리고 갔다.
한 씨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화학회사 듀폰에 취업했고 몇년 후 화학제품 무역회사를 창업해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그러나 골수암 판정을 받은 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일, 바로 다른 고아를 도움으로써 그의 양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5만 달러를 출연해 재단을 설립했다.
한 씨는 단순한 북한 고아 지원사업에 그치지 않고 미 의회에서 `탈북고아 입양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열심히 로비활동도 벌이고 있다.
그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내가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것은 매일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가장 위대한 약이기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고아 출신으로 미국에 입양돼 성공하고 암과 투병하면서도 북한 고아를 돕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는 한상만(65)씨의 이야기가 미국 언론에 또다시 소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AP통신은 29일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설립해 북한과 캄보디아, 탄자니아 등의 고아를 돕는 활동을 해온 한 씨의 인생역정을 장문의 기사를 통해 소개했다.
한 씨의 이야기는 지난해 2월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AP는 한 씨가 "고아로 자란 성장배경을 되살려 외국의 고아들을 계속 돕기를 원하고 있으나 그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 씨는 2002년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다가 골수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들은 3∼5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 판정을 내렸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AP통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삶의 목표와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워줬다"고 논평했다.
한 씨는 암 진단 후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로스앤젤레스(LA) 인근 패서디나에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만들었다. 슈나이더는 그를 입양했던 미국인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한 씨는 한국전쟁 피난길에 가족과 헤어진 후 여섯살의 나이로 구걸로 연명했다. 12세 때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한 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슈나이더 미 미네소타대 교수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서울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슈나이더 교수는 한 씨의 사연을 듣고 교육비를 지원했고 4년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를 데리고 갔다.
한 씨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화학회사 듀폰에 취업했고 몇년 후 화학제품 무역회사를 창업해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그러나 골수암 판정을 받은 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일, 바로 다른 고아를 도움으로써 그의 양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5만 달러를 출연해 재단을 설립했다.
한 씨는 단순한 북한 고아 지원사업에 그치지 않고 미 의회에서 `탈북고아 입양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열심히 로비활동도 벌이고 있다.
그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내가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것은 매일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가장 위대한 약이기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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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0-12-30 07:20:11
- 수정2010-12-30 17:36:53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 설립 한상만씨
한국전쟁 고아 출신으로 미국에 입양돼 성공하고 암과 투병하면서도 북한 고아를 돕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는 한상만(65)씨의 이야기가 미국 언론에 또다시 소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AP통신은 29일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설립해 북한과 캄보디아, 탄자니아 등의 고아를 돕는 활동을 해온 한 씨의 인생역정을 장문의 기사를 통해 소개했다.
한 씨의 이야기는 지난해 2월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AP는 한 씨가 "고아로 자란 성장배경을 되살려 외국의 고아들을 계속 돕기를 원하고 있으나 그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 씨는 2002년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다가 골수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들은 3∼5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 판정을 내렸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AP통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삶의 목표와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워줬다"고 논평했다.
한 씨는 암 진단 후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로스앤젤레스(LA) 인근 패서디나에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만들었다. 슈나이더는 그를 입양했던 미국인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한 씨는 한국전쟁 피난길에 가족과 헤어진 후 여섯살의 나이로 구걸로 연명했다. 12세 때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한 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슈나이더 미 미네소타대 교수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서울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슈나이더 교수는 한 씨의 사연을 듣고 교육비를 지원했고 4년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를 데리고 갔다.
한 씨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화학회사 듀폰에 취업했고 몇년 후 화학제품 무역회사를 창업해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그러나 골수암 판정을 받은 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일, 바로 다른 고아를 도움으로써 그의 양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5만 달러를 출연해 재단을 설립했다.
한 씨는 단순한 북한 고아 지원사업에 그치지 않고 미 의회에서 `탈북고아 입양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열심히 로비활동도 벌이고 있다.
그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내가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것은 매일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가장 위대한 약이기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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