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첫사랑의 설렘과 얼룩 ‘건축학개론’

입력 2012.03.1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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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 어떤 인연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순백한 감정이 가장 미숙한 방식으로 발산되는 그 시기 첫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괴물’이 찾아온다면 말이다.



가슴을 마구 뒤흔드는 설렘과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머릿속에 박히는 상처.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사랑과 치욕을 견디다 보면 첫사랑이 가져온 ’찬란한 슬픔의 봄’은 어느덧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스무 살 무렵 찾아온 첫사랑과 15년 후 그들이 나누는 후일담을 그린 멜로영화다. 아릿한 첫사랑과 담담한 30대의 사랑을 비교적 담백한 손길로 그린 흔치 않은 작품이다.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분) 앞에 15년 만에 불쑥 나타난 대학 동창생 서연(한가인). 부유한 사모님 ’포스’를 풍기는 서연은 고향 제주도에 집을 설계해 달라며 승민에게 부탁한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려던 승민은 서연의 제안을 야멸차게 뿌리치지 못한 채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그리고 재건축을 통해 만남이 잦아진 두 남녀는 15년 전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건축학개론’은 감독이 써놓은 빛바랜 비밀 일기를 들춰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래서다. 마치 감독의 경험담을 풀어놓은 듯한 이 영화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117분을 단박에 달린다.



감독의 확신이 깊이 배어서일까. 영화는 이야기뿐 아니라 날씨와 조명까지 매우 디테일하다. 버스에 들어오는 모든 햇살을 빨아들이는 듯한 서연의 뒷모습,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함께 듣는 승민과 서연 사이에 멈춰선 공기, 초저녁 어느 시골버스 역에서 행해지는 쭈뼛쭈뼛한 첫 키스의 추억 등에서는 실제 ’사연’이 숨쉬는 듯 구체적이다.



영화는 그런 사연을 통해 연애의 흥망성쇠, 그리고 십수 년 후 찾아온 담담한 사랑을 그린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물 흐르듯 교차시키며 사랑의 ’기묘한’ 정서를 끝까지 유지하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다.



’파수꾼’(2011)으로 각종 신인배우상을 싹쓸이한 이제훈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스무 살 승민을 소화하고, 아이돌 그룹 미스에이의 수지는 청순한 매력을 뽐내며 역시 스무 살의 수지를 연기했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 이후 8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한가인의 매력도 스크린에 돋을새김한다. 건들건들 거리는 ’착한’ 눈빛의 엄태웅도 제 몫을 했다.



’저 여자의 진의는 뭘까?’ ’고백해야 할까? 만약 한다면 어떻게 하지?’ 등을 놓고 골목길에서 나누는 친구와의 대화, 질투와 기대, 그리고 주정과 토악질과 눈물로 마무리되는 첫사랑의 진통은 관객 각자의 추억을 들쑤실 것 같다. 승민의 연애를 코치해주는 재수생 납뜩이(조정석)의 코믹 연기도 폭소를 자아낸다. 19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옛 가요들의 향연도 귓가를 기울이게 한다.



영화는 연기부터 스토리, 미장센(화면구도)까지 별다른 흠 없이 잘 굴러간다. 격정과 담담함을 오가는 편집조차 영리하다. (앞으로 흘러갈 주인공의 격정을 생각한다면 담담한 오프닝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할 만한 막판 강력한 한방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슴까지 울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모든 감정의 끄나풀이 적당한 선에서 멈춰 서기 때문이다. 영화는 불편한 감정을 뚫고 진실까지 다가가는 용기를 보여주진 못한다. 영리하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지만 관객의 심장까지 움켜쥐지 못하는 이유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등을 제작한 명필름이 제작했다. ’불신지옥’(2009)으로 호평을 얻은 이용주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다. 3월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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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영화> 첫사랑의 설렘과 얼룩 ‘건축학개론’
    • 입력 2012-03-14 11:18:32
    연합뉴스
스무 살 무렵, 어떤 인연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순백한 감정이 가장 미숙한 방식으로 발산되는 그 시기 첫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괴물’이 찾아온다면 말이다.

가슴을 마구 뒤흔드는 설렘과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머릿속에 박히는 상처.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사랑과 치욕을 견디다 보면 첫사랑이 가져온 ’찬란한 슬픔의 봄’은 어느덧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스무 살 무렵 찾아온 첫사랑과 15년 후 그들이 나누는 후일담을 그린 멜로영화다. 아릿한 첫사랑과 담담한 30대의 사랑을 비교적 담백한 손길로 그린 흔치 않은 작품이다.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분) 앞에 15년 만에 불쑥 나타난 대학 동창생 서연(한가인). 부유한 사모님 ’포스’를 풍기는 서연은 고향 제주도에 집을 설계해 달라며 승민에게 부탁한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려던 승민은 서연의 제안을 야멸차게 뿌리치지 못한 채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그리고 재건축을 통해 만남이 잦아진 두 남녀는 15년 전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건축학개론’은 감독이 써놓은 빛바랜 비밀 일기를 들춰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래서다. 마치 감독의 경험담을 풀어놓은 듯한 이 영화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117분을 단박에 달린다.

감독의 확신이 깊이 배어서일까. 영화는 이야기뿐 아니라 날씨와 조명까지 매우 디테일하다. 버스에 들어오는 모든 햇살을 빨아들이는 듯한 서연의 뒷모습,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함께 듣는 승민과 서연 사이에 멈춰선 공기, 초저녁 어느 시골버스 역에서 행해지는 쭈뼛쭈뼛한 첫 키스의 추억 등에서는 실제 ’사연’이 숨쉬는 듯 구체적이다.

영화는 그런 사연을 통해 연애의 흥망성쇠, 그리고 십수 년 후 찾아온 담담한 사랑을 그린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물 흐르듯 교차시키며 사랑의 ’기묘한’ 정서를 끝까지 유지하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다.

’파수꾼’(2011)으로 각종 신인배우상을 싹쓸이한 이제훈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스무 살 승민을 소화하고, 아이돌 그룹 미스에이의 수지는 청순한 매력을 뽐내며 역시 스무 살의 수지를 연기했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 이후 8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한가인의 매력도 스크린에 돋을새김한다. 건들건들 거리는 ’착한’ 눈빛의 엄태웅도 제 몫을 했다.

’저 여자의 진의는 뭘까?’ ’고백해야 할까? 만약 한다면 어떻게 하지?’ 등을 놓고 골목길에서 나누는 친구와의 대화, 질투와 기대, 그리고 주정과 토악질과 눈물로 마무리되는 첫사랑의 진통은 관객 각자의 추억을 들쑤실 것 같다. 승민의 연애를 코치해주는 재수생 납뜩이(조정석)의 코믹 연기도 폭소를 자아낸다. 19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옛 가요들의 향연도 귓가를 기울이게 한다.

영화는 연기부터 스토리, 미장센(화면구도)까지 별다른 흠 없이 잘 굴러간다. 격정과 담담함을 오가는 편집조차 영리하다. (앞으로 흘러갈 주인공의 격정을 생각한다면 담담한 오프닝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할 만한 막판 강력한 한방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슴까지 울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모든 감정의 끄나풀이 적당한 선에서 멈춰 서기 때문이다. 영화는 불편한 감정을 뚫고 진실까지 다가가는 용기를 보여주진 못한다. 영리하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지만 관객의 심장까지 움켜쥐지 못하는 이유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등을 제작한 명필름이 제작했다. ’불신지옥’(2009)으로 호평을 얻은 이용주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다. 3월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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