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도약’ 최초 달착륙 닐 암스트롱은

입력 2012.08.2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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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참전용사 출신..오바마 행정부 우주정책 비판


"이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첫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지난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우주왕복선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한 39세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인류 최초의 첫발을 내디딘 뒤 이 같은 소감을 밝혔다.

오하이오주(州) 워퍼코네타에서 태어난 암스트롱은 10대에 비행사 자격증을 따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비행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퍼듀대학에서도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 78차례의 전투비행 임무를 수행하고 1952년 8월 제대했다. 특히 그는 한국전 당시 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 1955년 졸업장을 받은 뒤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비행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62년 제2기 우주비행사로 선발돼 1966년 `제미니 8호'의 지휘조종사로 첫 우주비행을 했으며, 아제나 위성과 최초의 도킹에 성공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의 선장으로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 마이클 콜린스 등 동료 우주비행사들과 달을 향해 출발한 그는 7월 20일 오후 10시56분 20초(미 동부시간 기준, 한국시각 7월21일 오전 11시56분 20초),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들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우주개척 분야에서 옛 소련에 짓밟혔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우주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세계 5억2천800만명이 지켜본 가운데 그가 달에 역사적인 첫발을 딛은 순간 심장박동수가 1분에 150회에 달한다는 사실까지 보도되는 등 암스트롱의 일거수일투족은 전인류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달의 분화구에는 암스트롱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암스트롱은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 두 동료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으며, 이어 1971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문위원으로 방한하는 등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아폴로 11호 비행임무 이후에는 연구개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신시내티대학에서 공학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최근에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폐지에 대해 "오바마 정부의 우주 정책은 실질적인 혼란"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그는 최근 관상동맥 협착 증세가 발견돼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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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도약’ 최초 달착륙 닐 암스트롱은
    • 입력 2012-08-26 08:17:34
    연합뉴스
6ㆍ25 참전용사 출신..오바마 행정부 우주정책 비판 "이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첫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지난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우주왕복선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한 39세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인류 최초의 첫발을 내디딘 뒤 이 같은 소감을 밝혔다. 오하이오주(州) 워퍼코네타에서 태어난 암스트롱은 10대에 비행사 자격증을 따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비행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퍼듀대학에서도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 78차례의 전투비행 임무를 수행하고 1952년 8월 제대했다. 특히 그는 한국전 당시 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 1955년 졸업장을 받은 뒤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비행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62년 제2기 우주비행사로 선발돼 1966년 `제미니 8호'의 지휘조종사로 첫 우주비행을 했으며, 아제나 위성과 최초의 도킹에 성공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의 선장으로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 마이클 콜린스 등 동료 우주비행사들과 달을 향해 출발한 그는 7월 20일 오후 10시56분 20초(미 동부시간 기준, 한국시각 7월21일 오전 11시56분 20초),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들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우주개척 분야에서 옛 소련에 짓밟혔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우주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세계 5억2천800만명이 지켜본 가운데 그가 달에 역사적인 첫발을 딛은 순간 심장박동수가 1분에 150회에 달한다는 사실까지 보도되는 등 암스트롱의 일거수일투족은 전인류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달의 분화구에는 암스트롱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암스트롱은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 두 동료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으며, 이어 1971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문위원으로 방한하는 등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아폴로 11호 비행임무 이후에는 연구개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신시내티대학에서 공학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최근에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폐지에 대해 "오바마 정부의 우주 정책은 실질적인 혼란"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그는 최근 관상동맥 협착 증세가 발견돼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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