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입력 2013.06.28 (23:04) 수정 2013.06.28 (23:2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꼭 63년이 되던 지난 25일.

경북 경산의 한 산 중턱에서 작은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바로 그해 이곳에서 집단으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달래는 자리입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그 당시에 여기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하여튼 7월달부터 9월, 내내 총소리 나고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군과 경찰은 형무소 재소자와 좌익 활동 전력자 등 민간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사살했습니다.

<인터뷰> 최승호(경산 유족회 이사) : "이거는 총탄 흔적입니다. 앉은 자세에서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 옆에 관자놀이를 권총으로 사살한 건데..."

그동안 수습된 유해만 500여 구, 아직도 천5백여 구가 더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나정태(경산 유족회 부회장) : "정말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지어도 사형을 하고 나면 유해라도 돌려줘야 하잖아요. 발굴한 유해마저도 갈 곳을 못 찾고 허름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돼 있습니다. 한을 품고 평생을 지내온 유족들, 부모의 죽음을 이제는 제발 되돌아 봐달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애절합니다."

경산의 산 중턱에 있는 폐광산. 일제강점기, 일본이 개발한 코발트 광산입니다. 지하자원 수탈의 대표적인 현장입니다.

<인터뷰> 최승호(경산 유족회 이사) : "여기가 예전에 코발트 광산의 승강장, 그러니까 지하에서 채광했던 완석들을 끌어올리던 지점이에요."

1950년 7월, 바로 이 자리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여덟 명씩 묶어와서 여기다가 일렬로 세워놓고 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총을 쏘면 맞는 분도 있고 안 맞는 분도 있었지만 여기로 한꺼번에 다 떨어졌죠. 떨어져가지고 저 밑에서 자연적으로 죽게 된 겁니다. 저는 6.25 때 초둥학교 6학년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알고 있는 겁니다."

산허리를 돌아내려 가니 갱도 입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좁은 갱도 안에 있는 깊은 물웅덩이, 민간인들을 죽여 떨어뜨린 수직 갱도와 만나는 지점.

유해들이 발굴된 바로 그곳입니다.

지난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곳에서 세 차례에 걸쳐 유해 500여 구를 발굴했습니다.

<인터뷰> 노용석(부산외대 교수/당시 발굴팀장) : "이 갱도 안에 유해가 있을 것이 예상이 되니까 갱도 안의 돌들을 빼냈죠. 그 다음에 위에서 내려오는 낙석을 조심을 하려고 보강 공사하면서 빼냈고 이게 56미터 지점인데 이 밑에도 유해 있다고, 유해 나오고 그래서 이 위에 껄 막으면서 밑의 것도 팠죠. 2007,8,9, 3년 동안 여기서 5백 구 수습했으니까"

미처 수습하지 못한 뼛조각이 지금도 발견됩니다.

<인터뷰> 나정태(경산 유족회 부회장) : "지금 이거는 작업하다가 흘린 거고 물만 다 빼내버리고 나면 유해가 거의 다 보입니다. 그래서 엉키고 엉키고"

올해 72살 이정우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좌익인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만들었던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해에 군인에 의해 가지고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끌고 가서 경산에 수리조합 창고에 감금시켰습니다. 그 무렵에 저희 모친이 사식을 가져다주고 했습니다. 하다가 어느 날 이쪽으로 끌고 와 가지고 여러 사람과 함께 총살을 당한 겁니다."

가족을 잃고도 유족들은 시신 수습은 엄두도 못 냈고, 이른바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숨죽여 지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정말 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제대하고 공직에 있으면서 또 이 문제 때문에 신원조회 문제 때문에 공직에 있다가도 제가 나왔습니다. 못 있고."

숱한 세월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시작된 유해 발굴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 활동을 끝내면서 발굴이 중단됐습니다.

<인터뷰> 노용석(부산외대 교수/당시 발굴팀장) : "정작 본 단계에 들어갈 시기에 위원회가 종료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보시다시피 이렇게 장화가 널려있고 작업 도구들이 널려있는 상태로 발굴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인터뷰> 나정태(경산 유족회 부회장) : "잘잘못을 떠나더라도 일단 유해부터 수습을 하고, 그게 사람이 예의고. 잘잘못은 우리가 또 해도(가려도) 되잖아요…"

경남 진주의 진성고개.

감나무 과수원 한쪽에서 2009년 유해 55구가 수습됐습니다.

열을 지어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의 유해들의 모습은 학살 당시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인터뷰> 노용석(부산외대 교수/당시 발굴팀장) : "사망 당시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도록 그 당시의 트라우마를 굉장히 잘 알 수 있도록 유해들이 질서정연하게 있었어요." (어떤 식으로 추정이 되던가요? 그 모습이) 결박해가지고. 줄로 열을 세워가지고 차례차례 죽였더라고요. 보니까 쭉 내려오면서. 보통 유해가 많이 흐트러져있는데, 그런 경우에 발굴하면. 여기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곳에서도 형무소 재소자들, 그리고 보도연맹에 가입된 민간인들이 사살됐습니다.

<인터뷰> 강병현(진주 유족회 회장) : "아버님이 집으로 오셨더랍니다. 논 매기를 하시다가.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왜 왔나 했더니 면사무소에 회의가 있다고 잠깐 오라고 그런다고, 그래서 와가지고. 그럼 국수 삶았으니까 국수 자시고 가라니까 내가 퍼뜩 갔다오면 된다고 자전거를 타고 거리가 얼마 안 되니까 면사무소하고 그냥 가셨습니다. 그걸로 끝이랍니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은 김상길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아직도 진주 곳곳을 헤매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상길(진주 희생자 유족) : "막 눈물이 나고 막 국가에 대한 원망이 막 한이 맺히지. 지금 50년간 아버지 원한을, 아주 잠을 못 자요. 50년간 불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요. 내가 정신 피해자라."

진주 지역에서만 14곳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던 걸로 추정되지만 진실화해위가 발굴을 마친 곳은 3곳에 불과합니다.

다른 곳은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인근의 다른 야산.

유족들이 직접 유해를 찾아낸 곳입니다.

흙을 조금 걷어내자 어른 다리뼈가 드러납니다.

<녹취> "이게 대퇴부입니다. 대퇴부 골반 쪽이야."

이렇게 유골을 발견하고도 수습을 못 하고 다시 묻어야만 합니다.

<인터뷰> 정연조(진주 유족회 총무) : "내 아버지, 누군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63년 동안 고향 찾아서 영면을 해드려야 되는데 어떤 비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해는 항상 어떤 지인이 보자고 하면 확인하자고 하면 보고 덮어놓고, 보고 덮어야 돼."

6.25 전후의 민간인 집단 희생자 수는 2,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진실화해위가 진실이라고 규명한 집단 희생 지역만도 2백10여 곳에 이릅니다.

북한군과 좌익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가 61곳, 나머지는 국군이나 경찰 등에 의한 집단 희생지입니다.

이 가운데 발굴을 한 곳은 충남 공주와 경북 경산, 경남 진주 등 10곳에 불과합니다.

언제 다시 재개할지 기약조차 없습니다.

<전화> 정부 관계자 (음성변조) : "유해 발굴은요 지금 법적이라든가 근거라든가 그런 게 하나도 없고 조직도 없고, 유해발굴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적 근거라든가 그것도 없는데 무조건 발굴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진실화해위 활동의 근거가 됐던 관련 법의 효력이 2010년 끝나버린 뒤 아직 후속 조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발굴한 유해 천6백여 구도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한 대학교 안 추모관에 임시로 안치했을 뿐입니다.

<인터뷰> 박선주(충북대 명예교수/당시 유해발굴단장) : "원래는 저희가 작년까지 3년간 모시고 있기로 정부하고 MOU를 맺었는데 작년까지 국가시설을 안 만들어지면서 다시 3년간 연장을 했어요. 2015년까지 연장을 했는데 2015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진실화해위의 발굴이 있기 전, 경산 지역 유족들이 직접 수습한 유해 90여 구는 임시 안치소에조차 가지 못하고, 현장 근처 컨테이너에 그냥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인터뷰> 최승호(경산 유족회 이사) : "유해들을 안장할 수 있도록 안장시설을 해달라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안장시설을 안 해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임의로 이걸 화장을 해서 안장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보존 시설이라고는 일회용 제습제가 전부. 뜨거운 열기와 높은 습도 속에서 유골들은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63년이 흘렀습니다.

또다시 6.25를 맞은 전국 각지의 유족 대표들이 머리를 맞댔습니다.

유해 발굴을 재개하고 위령, 추모 시설을 만들어 달라는 호소가 이어집니다.

<녹취> 박봉자(임실 유족회) : "저희들이 제일 가슴에 한이 맺힌 것은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가슴 속에 아버지 어머니라는 그 이름 석 자를 지금까지 이 가슴 속에 묻고 삽니다. 불러보지를 못하고 어디 가서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지를 못하고 그러고 살아왔습니다."

<녹취> 서영선(강화 유족회 고문) : "우리의 육친이 어디 가서 썩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 가서 발굴이 돼서 어디 보관돼 있다, 이렇게는 적어도 우리 유족들이 알고는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민족의 비극, 6.25 한국전쟁.

북한군에, 또는 국군 등에 의해 살해, 처형된 민간인들.

희생 당시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백발의 아들들은 오늘도 아버지를 찾아 산에 오릅니다.

어딘가에 아버지가 묻혀있을 곳, 무덤 아닌 야산의 잡초를 뽑아 벌초를 대신하며 마음을 달랩니다.

<인터뷰> 김상길(진주 희생자 유족) : "아버지의, 그, 나 죽기 전에라도 어디 무슨 위령탑이라도 해놓고 죽어야 안 되겠소?"

뒤늦게나마 국가가 진실을 밝힌 집단 학살,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고 넋을 달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유족들이 묻고 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포커스 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 입력 2013-06-28 23:05:57
    • 수정2013-06-28 23:20:22
    취재파일K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꼭 63년이 되던 지난 25일.

경북 경산의 한 산 중턱에서 작은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바로 그해 이곳에서 집단으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달래는 자리입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그 당시에 여기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하여튼 7월달부터 9월, 내내 총소리 나고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군과 경찰은 형무소 재소자와 좌익 활동 전력자 등 민간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사살했습니다.

<인터뷰> 최승호(경산 유족회 이사) : "이거는 총탄 흔적입니다. 앉은 자세에서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 옆에 관자놀이를 권총으로 사살한 건데..."

그동안 수습된 유해만 500여 구, 아직도 천5백여 구가 더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나정태(경산 유족회 부회장) : "정말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지어도 사형을 하고 나면 유해라도 돌려줘야 하잖아요. 발굴한 유해마저도 갈 곳을 못 찾고 허름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돼 있습니다. 한을 품고 평생을 지내온 유족들, 부모의 죽음을 이제는 제발 되돌아 봐달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애절합니다."

경산의 산 중턱에 있는 폐광산. 일제강점기, 일본이 개발한 코발트 광산입니다. 지하자원 수탈의 대표적인 현장입니다.

<인터뷰> 최승호(경산 유족회 이사) : "여기가 예전에 코발트 광산의 승강장, 그러니까 지하에서 채광했던 완석들을 끌어올리던 지점이에요."

1950년 7월, 바로 이 자리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여덟 명씩 묶어와서 여기다가 일렬로 세워놓고 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총을 쏘면 맞는 분도 있고 안 맞는 분도 있었지만 여기로 한꺼번에 다 떨어졌죠. 떨어져가지고 저 밑에서 자연적으로 죽게 된 겁니다. 저는 6.25 때 초둥학교 6학년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알고 있는 겁니다."

산허리를 돌아내려 가니 갱도 입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좁은 갱도 안에 있는 깊은 물웅덩이, 민간인들을 죽여 떨어뜨린 수직 갱도와 만나는 지점.

유해들이 발굴된 바로 그곳입니다.

지난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곳에서 세 차례에 걸쳐 유해 500여 구를 발굴했습니다.

<인터뷰> 노용석(부산외대 교수/당시 발굴팀장) : "이 갱도 안에 유해가 있을 것이 예상이 되니까 갱도 안의 돌들을 빼냈죠. 그 다음에 위에서 내려오는 낙석을 조심을 하려고 보강 공사하면서 빼냈고 이게 56미터 지점인데 이 밑에도 유해 있다고, 유해 나오고 그래서 이 위에 껄 막으면서 밑의 것도 팠죠. 2007,8,9, 3년 동안 여기서 5백 구 수습했으니까"

미처 수습하지 못한 뼛조각이 지금도 발견됩니다.

<인터뷰> 나정태(경산 유족회 부회장) : "지금 이거는 작업하다가 흘린 거고 물만 다 빼내버리고 나면 유해가 거의 다 보입니다. 그래서 엉키고 엉키고"

올해 72살 이정우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좌익인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만들었던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해에 군인에 의해 가지고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끌고 가서 경산에 수리조합 창고에 감금시켰습니다. 그 무렵에 저희 모친이 사식을 가져다주고 했습니다. 하다가 어느 날 이쪽으로 끌고 와 가지고 여러 사람과 함께 총살을 당한 겁니다."

가족을 잃고도 유족들은 시신 수습은 엄두도 못 냈고, 이른바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숨죽여 지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정우(경산 유족회 이사) : "정말 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제대하고 공직에 있으면서 또 이 문제 때문에 신원조회 문제 때문에 공직에 있다가도 제가 나왔습니다. 못 있고."

숱한 세월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시작된 유해 발굴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 활동을 끝내면서 발굴이 중단됐습니다.

<인터뷰> 노용석(부산외대 교수/당시 발굴팀장) : "정작 본 단계에 들어갈 시기에 위원회가 종료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보시다시피 이렇게 장화가 널려있고 작업 도구들이 널려있는 상태로 발굴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인터뷰> 나정태(경산 유족회 부회장) : "잘잘못을 떠나더라도 일단 유해부터 수습을 하고, 그게 사람이 예의고. 잘잘못은 우리가 또 해도(가려도) 되잖아요…"

경남 진주의 진성고개.

감나무 과수원 한쪽에서 2009년 유해 55구가 수습됐습니다.

열을 지어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의 유해들의 모습은 학살 당시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인터뷰> 노용석(부산외대 교수/당시 발굴팀장) : "사망 당시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도록 그 당시의 트라우마를 굉장히 잘 알 수 있도록 유해들이 질서정연하게 있었어요." (어떤 식으로 추정이 되던가요? 그 모습이) 결박해가지고. 줄로 열을 세워가지고 차례차례 죽였더라고요. 보니까 쭉 내려오면서. 보통 유해가 많이 흐트러져있는데, 그런 경우에 발굴하면. 여기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곳에서도 형무소 재소자들, 그리고 보도연맹에 가입된 민간인들이 사살됐습니다.

<인터뷰> 강병현(진주 유족회 회장) : "아버님이 집으로 오셨더랍니다. 논 매기를 하시다가.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왜 왔나 했더니 면사무소에 회의가 있다고 잠깐 오라고 그런다고, 그래서 와가지고. 그럼 국수 삶았으니까 국수 자시고 가라니까 내가 퍼뜩 갔다오면 된다고 자전거를 타고 거리가 얼마 안 되니까 면사무소하고 그냥 가셨습니다. 그걸로 끝이랍니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은 김상길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아직도 진주 곳곳을 헤매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상길(진주 희생자 유족) : "막 눈물이 나고 막 국가에 대한 원망이 막 한이 맺히지. 지금 50년간 아버지 원한을, 아주 잠을 못 자요. 50년간 불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요. 내가 정신 피해자라."

진주 지역에서만 14곳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던 걸로 추정되지만 진실화해위가 발굴을 마친 곳은 3곳에 불과합니다.

다른 곳은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인근의 다른 야산.

유족들이 직접 유해를 찾아낸 곳입니다.

흙을 조금 걷어내자 어른 다리뼈가 드러납니다.

<녹취> "이게 대퇴부입니다. 대퇴부 골반 쪽이야."

이렇게 유골을 발견하고도 수습을 못 하고 다시 묻어야만 합니다.

<인터뷰> 정연조(진주 유족회 총무) : "내 아버지, 누군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63년 동안 고향 찾아서 영면을 해드려야 되는데 어떤 비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해는 항상 어떤 지인이 보자고 하면 확인하자고 하면 보고 덮어놓고, 보고 덮어야 돼."

6.25 전후의 민간인 집단 희생자 수는 2,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진실화해위가 진실이라고 규명한 집단 희생 지역만도 2백10여 곳에 이릅니다.

북한군과 좌익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가 61곳, 나머지는 국군이나 경찰 등에 의한 집단 희생지입니다.

이 가운데 발굴을 한 곳은 충남 공주와 경북 경산, 경남 진주 등 10곳에 불과합니다.

언제 다시 재개할지 기약조차 없습니다.

<전화> 정부 관계자 (음성변조) : "유해 발굴은요 지금 법적이라든가 근거라든가 그런 게 하나도 없고 조직도 없고, 유해발굴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적 근거라든가 그것도 없는데 무조건 발굴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진실화해위 활동의 근거가 됐던 관련 법의 효력이 2010년 끝나버린 뒤 아직 후속 조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발굴한 유해 천6백여 구도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한 대학교 안 추모관에 임시로 안치했을 뿐입니다.

<인터뷰> 박선주(충북대 명예교수/당시 유해발굴단장) : "원래는 저희가 작년까지 3년간 모시고 있기로 정부하고 MOU를 맺었는데 작년까지 국가시설을 안 만들어지면서 다시 3년간 연장을 했어요. 2015년까지 연장을 했는데 2015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진실화해위의 발굴이 있기 전, 경산 지역 유족들이 직접 수습한 유해 90여 구는 임시 안치소에조차 가지 못하고, 현장 근처 컨테이너에 그냥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인터뷰> 최승호(경산 유족회 이사) : "유해들을 안장할 수 있도록 안장시설을 해달라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안장시설을 안 해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임의로 이걸 화장을 해서 안장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보존 시설이라고는 일회용 제습제가 전부. 뜨거운 열기와 높은 습도 속에서 유골들은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63년이 흘렀습니다.

또다시 6.25를 맞은 전국 각지의 유족 대표들이 머리를 맞댔습니다.

유해 발굴을 재개하고 위령, 추모 시설을 만들어 달라는 호소가 이어집니다.

<녹취> 박봉자(임실 유족회) : "저희들이 제일 가슴에 한이 맺힌 것은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가슴 속에 아버지 어머니라는 그 이름 석 자를 지금까지 이 가슴 속에 묻고 삽니다. 불러보지를 못하고 어디 가서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지를 못하고 그러고 살아왔습니다."

<녹취> 서영선(강화 유족회 고문) : "우리의 육친이 어디 가서 썩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 가서 발굴이 돼서 어디 보관돼 있다, 이렇게는 적어도 우리 유족들이 알고는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민족의 비극, 6.25 한국전쟁.

북한군에, 또는 국군 등에 의해 살해, 처형된 민간인들.

희생 당시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백발의 아들들은 오늘도 아버지를 찾아 산에 오릅니다.

어딘가에 아버지가 묻혀있을 곳, 무덤 아닌 야산의 잡초를 뽑아 벌초를 대신하며 마음을 달랩니다.

<인터뷰> 김상길(진주 희생자 유족) : "아버지의, 그, 나 죽기 전에라도 어디 무슨 위령탑이라도 해놓고 죽어야 안 되겠소?"

뒤늦게나마 국가가 진실을 밝힌 집단 학살,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고 넋을 달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유족들이 묻고 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