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인] 일본군에 유린된 제주 오름

입력 2013.08.16 (23:15) 수정 2013.08.1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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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제주도에는 보시는 것처럼 오름이 많습니다.

화산섬인 제주 특유의 지형인데요.

최근 조사 결과,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제주도 오름 3분 1 가량에 전쟁을 위한 땅굴을 파놓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파헤쳐진 오름.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제주 동북부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안돌오름.

천연기념물인 검독수리가 터를 잡고 살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이 안돌오름 8부 능선 쯤을 올라가자 땅굴 입구가 보입니다.

바로 일본군 땅굴, 일본군의 동굴 진지입니다.

사람들에겐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위치...

최근에서야 그 정확한 존재가 알려질 만큼 비밀한 곳에 굴을 파고 진지를 만들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굴 속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입니다.

일본군 지도에는 유격진지, 즉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한 진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인터뷰> 이윤형 : "미군이 계속 밀고 들어올 경우 이쪽 후방지역은 게릴라 성격의 진지들을 구축해서, 여기서 계속적으로 일본군들이 최후의 1인까지 저항하겠다는 그런 신념으로 만들어진..."

이곳 안돌 오름을 중심으로 일대 오름에 6천 여 명의 일본군이 땅굴을 파고 숨어들었습니다.

<녹취> :"(여기 (땅굴이) 몇 개나?) 지금 이 분화구 안쪽에만 9개의 갱도가 있습니다."

제주 서남부 해안.

우뚝 솟아있는 오름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산방산입니다.

이 산방산 꼭대기에도 일본군이 굴을 파 놓았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탐사에 나섰습니다.

<녹취> "여기서 이렇게 해서, 골짜기 따라서..."

우거진 수풀을 뚫고 나아갑니다.

<녹취> "완전히 밀림인데요."

경사는 더욱 급해지고, 2시간 여 만에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곳이 곡괭이를 이용해 사람이 직접 땅굴을 팠다면, 전체가 암반 지형인 이곳 산방산은 폭약까지 쓰며 굴을 냈습니다.

<녹취> "착암기라는 도구를 쓰게 됩니다. 30~40cm 정도 깊게 파서, 그 안에 화약을 집어 넣어서 발파를 하면서 뚫고 나가는..."

산 정상부까지 장비를 끌고 올라와 바위를 뚫고 진지를 만든 것입니다.

굴파기 작업에 동원된 사람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이윤형(제주역사문화진흥원 연구원) : "갱도를 뚫을 수 있는 기술자들이 (제주도에는) 없었어요. 바위로 된 갱도라든가, 정밀한 작업을 요하는 데는, 육지부에서 특히 전라남도나 경상도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강제 노무 동원시킵니다"

굴은 산 뒤쪽에서 시작해, 암반을 관통한 뒤 바다 쪽으로 뚫려 있습니다.

산방산에만 모두 4개의 땅굴, 100미터 가량의 갱도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군은 왜, 암반이라는 악조건 속에 폭파까지 해가며, 산 정상부에 굴을 뚫었을까?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뒤 다음은 제주도를 노릴 것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상륙 지점으로 산방산 앞 해안을 예상했습니다.

더구나 미군 상륙 예상지점 바로 뒤에는 일본군의 '알뜨르 비행장'이 있어 이 지역 방어가 중요했던 만큼, 일본군은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슬봉과 단산, 산방산, 섯알오름, 송악산 등 주변의 모든 오름에 땅굴을 파고 기지를 구축했습니다.

일본군에게 오름은 군사 기지에 적합한 지형지물일 뿐이었습니다.

새신 오름.

내륙부의 그리 크지 않은 오름입니다.

이곳에서도 최근 일본군 땅굴이 발견됐습니다.

수풀을 헤치고 땅굴로 내려갑니다.

경사진 입구.

굴에 들어서자, 박쥐떼가 날아 오릅니다.

땅굴 천장에 박쥐가 집단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밑에는 박쥐 배설물이 수북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듯 계속되는 땅굴.

양 옆으론 땅굴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댔던 갱목 자리가 확연합니다.

<녹취>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계속 있는데요"

<녹취> "양쪽으로 나무를 대서 천정부까지 댑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만드는 거죠. (나무를 세우고 위에다 나무를 대고...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있네요.) 원래 갱도를 굴착하면서 1~1.5미터 정도 간격으로 굴착하고 난 다음에는 갱목을 세웁니다"

146미터나 이어지는 땅굴은 반대편 경사면의 출구로 연결됩니다.

새신 오름 전체를 한 달간 정밀 조사한 결과, 이곳에만 모두 56개의 땅굴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름을 거의 벌집 수준으로 파헤쳐 놓은 것입니다.

일본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보관중인 1945년 당시 일본군 지도를 보면, 일본이 얼마나, 많은 땅굴 기지를 제주도에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해안에서 내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진지 표시가 이어져 있습니다.

미군이 상륙해 올 경우 해안의 오름을 중심으로 1차 저항 진지를 만든 뒤, 한라산 지역까지 오름을 이용한 저항선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당시 제주도에 집결한 일본군만 7만 5천 여명.

제주 인구의 3분 1에 해당하는 일본군 병력이 땅굴을 판 뒤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 HK연구교수) : "일본군은 미군이라면 분명히 제주도를 가장 우선적으로 공격할거다. 따라서 이것을 막는 것이 본토수호, 다른 용어로 본토 결전이죠. 본토 결전에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라고 해서 제주도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당시 일본군 진지 지도를 바탕으로 제주특별자치도가 3년간, 제주도 전역의 오름을 조사한 결과, 368개 오름 가운데, 3분의 1에 이르는 120여 개 오름에 일본군이 군사 기지를 위한 땅굴을 파놓은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습니다.

땅굴 수만 720여 개에 이릅니다.

대부분이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봄부터 여름 사이 단 너댓 달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뷰> 이윤형(제주역사문화진흥원 연구원) : "갈 때마다 새로운 갱도들이 고구마 줄기 캐 나오듯 줄줄 하나씩 나오는 상황에서 얼마나 제주도 오름을 헤집어 놨는지..."

당시 제주도는 미군의 B-29 폭격기가 출몰해 폭격을 가하고, 일본의 자살특공대가 대기할 정도로 태평양 전쟁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인터뷰> 김용두(제주도 제주시 화북동) : "저 비행기가 이상하다. 이쪽으로 오더니 고도를 좀 낮춘 것 같아. 슬그머니 낮추더니 쿵쿵하는 소리가 나..."

<인터뷰> 좌정인(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 "오노 부대, 일개 부대니까 한 몇 십명이 있었는데, 정확한 숫자는 나도...한 30명 가량?(그 사람들이 다 자살 특공대?) 자살 특공대..."

제주항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사라봉에도 폭격을 막고 미군 상륙에 대비한 땅굴 진지가 있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김용두 할아버지는 사라봉 동굴 진지를 파는데 동원됐었습니다.

<인터뷰> 김용두(제주도 제주시 화북동) : "목(木)괭이 같은 걸로 찍으면서 들어갔는데, 조선놈이라면서 말이지 개패듯이 패고 말이지. 한국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안했어."

동원된 사람들은 겉겨도 제대로 벗겨내지 않은 잡곡밥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밥을 준 걸 보니깐, 그 껍질도 안 벗긴 것으로 밥을 해서 까끌까끌하니 안 넘어가, 너무 거칠어서 말이지.국도 말이지 썩은 장국, 채소 하나 없이 그것 뿐이야"

1945년 당시 제주도 인구의 20% 가량인 4만에서 4만 5천 명 정도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땅굴을 파는 노역에 동원됐다 숨지는 사람도 나오는 등 희생이 컸습니다.

<인터뷰> 좌정인 할아버지 : "(굴) 안에서 작업하다가 (무너지니까) 밖으로 나오려고 도망가다가 거기서, 압력에서 매몰돼 가지고 죽은 사람들이..(몇 명이나 죽었어요?) (거기서) 한 10명 정도 되고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거문 오름.

관광객들이 해설사를 따라, 오름을 둘러봅니다.

삼나무 숲을 지나고, 오름 분화구 속 생태계를 보며, 제주도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일본군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땅굴을 파놓았습니다.

<녹취> "이 거문오름 안에는 한 (땅굴이) 20여 개로 알고 있는데..."

땅굴을 둘러본 사람들은 이런 곳에 일본군 진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인터뷰> 조동건(경기도 고양시 장항동) : "오늘 처음 알았는데요. 저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였지만, 그 시대의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인터뷰> 송영건(제주도 제주시 노형동) : "저희는 아름다운 자연유산이라고 해서 왔는데, 아름다운 자연유산 속에서 또 이런 아픈 역사가 숨어 있구나 이런 생각이..."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잊혀져 가고, 지금까지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제주의 일본군 땅굴.

자기 땅인양 피헤쳐 놓은 오름의 이 일본군 동굴진지는 일제에 의한 우리 민족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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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커스 인] 일본군에 유린된 제주 오름
    • 입력 2013-08-16 17:33:57
    • 수정2013-08-16 23:32:00
    취재파일K
<앵커 멘트>

제주도에는 보시는 것처럼 오름이 많습니다.

화산섬인 제주 특유의 지형인데요.

최근 조사 결과,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제주도 오름 3분 1 가량에 전쟁을 위한 땅굴을 파놓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파헤쳐진 오름.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제주 동북부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안돌오름.

천연기념물인 검독수리가 터를 잡고 살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이 안돌오름 8부 능선 쯤을 올라가자 땅굴 입구가 보입니다.

바로 일본군 땅굴, 일본군의 동굴 진지입니다.

사람들에겐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위치...

최근에서야 그 정확한 존재가 알려질 만큼 비밀한 곳에 굴을 파고 진지를 만들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굴 속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입니다.

일본군 지도에는 유격진지, 즉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한 진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인터뷰> 이윤형 : "미군이 계속 밀고 들어올 경우 이쪽 후방지역은 게릴라 성격의 진지들을 구축해서, 여기서 계속적으로 일본군들이 최후의 1인까지 저항하겠다는 그런 신념으로 만들어진..."

이곳 안돌 오름을 중심으로 일대 오름에 6천 여 명의 일본군이 땅굴을 파고 숨어들었습니다.

<녹취> :"(여기 (땅굴이) 몇 개나?) 지금 이 분화구 안쪽에만 9개의 갱도가 있습니다."

제주 서남부 해안.

우뚝 솟아있는 오름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산방산입니다.

이 산방산 꼭대기에도 일본군이 굴을 파 놓았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탐사에 나섰습니다.

<녹취> "여기서 이렇게 해서, 골짜기 따라서..."

우거진 수풀을 뚫고 나아갑니다.

<녹취> "완전히 밀림인데요."

경사는 더욱 급해지고, 2시간 여 만에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곳이 곡괭이를 이용해 사람이 직접 땅굴을 팠다면, 전체가 암반 지형인 이곳 산방산은 폭약까지 쓰며 굴을 냈습니다.

<녹취> "착암기라는 도구를 쓰게 됩니다. 30~40cm 정도 깊게 파서, 그 안에 화약을 집어 넣어서 발파를 하면서 뚫고 나가는..."

산 정상부까지 장비를 끌고 올라와 바위를 뚫고 진지를 만든 것입니다.

굴파기 작업에 동원된 사람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이윤형(제주역사문화진흥원 연구원) : "갱도를 뚫을 수 있는 기술자들이 (제주도에는) 없었어요. 바위로 된 갱도라든가, 정밀한 작업을 요하는 데는, 육지부에서 특히 전라남도나 경상도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강제 노무 동원시킵니다"

굴은 산 뒤쪽에서 시작해, 암반을 관통한 뒤 바다 쪽으로 뚫려 있습니다.

산방산에만 모두 4개의 땅굴, 100미터 가량의 갱도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군은 왜, 암반이라는 악조건 속에 폭파까지 해가며, 산 정상부에 굴을 뚫었을까?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뒤 다음은 제주도를 노릴 것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상륙 지점으로 산방산 앞 해안을 예상했습니다.

더구나 미군 상륙 예상지점 바로 뒤에는 일본군의 '알뜨르 비행장'이 있어 이 지역 방어가 중요했던 만큼, 일본군은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슬봉과 단산, 산방산, 섯알오름, 송악산 등 주변의 모든 오름에 땅굴을 파고 기지를 구축했습니다.

일본군에게 오름은 군사 기지에 적합한 지형지물일 뿐이었습니다.

새신 오름.

내륙부의 그리 크지 않은 오름입니다.

이곳에서도 최근 일본군 땅굴이 발견됐습니다.

수풀을 헤치고 땅굴로 내려갑니다.

경사진 입구.

굴에 들어서자, 박쥐떼가 날아 오릅니다.

땅굴 천장에 박쥐가 집단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밑에는 박쥐 배설물이 수북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듯 계속되는 땅굴.

양 옆으론 땅굴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댔던 갱목 자리가 확연합니다.

<녹취>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계속 있는데요"

<녹취> "양쪽으로 나무를 대서 천정부까지 댑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만드는 거죠. (나무를 세우고 위에다 나무를 대고...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있네요.) 원래 갱도를 굴착하면서 1~1.5미터 정도 간격으로 굴착하고 난 다음에는 갱목을 세웁니다"

146미터나 이어지는 땅굴은 반대편 경사면의 출구로 연결됩니다.

새신 오름 전체를 한 달간 정밀 조사한 결과, 이곳에만 모두 56개의 땅굴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름을 거의 벌집 수준으로 파헤쳐 놓은 것입니다.

일본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보관중인 1945년 당시 일본군 지도를 보면, 일본이 얼마나, 많은 땅굴 기지를 제주도에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해안에서 내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진지 표시가 이어져 있습니다.

미군이 상륙해 올 경우 해안의 오름을 중심으로 1차 저항 진지를 만든 뒤, 한라산 지역까지 오름을 이용한 저항선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당시 제주도에 집결한 일본군만 7만 5천 여명.

제주 인구의 3분 1에 해당하는 일본군 병력이 땅굴을 판 뒤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 HK연구교수) : "일본군은 미군이라면 분명히 제주도를 가장 우선적으로 공격할거다. 따라서 이것을 막는 것이 본토수호, 다른 용어로 본토 결전이죠. 본토 결전에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라고 해서 제주도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당시 일본군 진지 지도를 바탕으로 제주특별자치도가 3년간, 제주도 전역의 오름을 조사한 결과, 368개 오름 가운데, 3분의 1에 이르는 120여 개 오름에 일본군이 군사 기지를 위한 땅굴을 파놓은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습니다.

땅굴 수만 720여 개에 이릅니다.

대부분이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봄부터 여름 사이 단 너댓 달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뷰> 이윤형(제주역사문화진흥원 연구원) : "갈 때마다 새로운 갱도들이 고구마 줄기 캐 나오듯 줄줄 하나씩 나오는 상황에서 얼마나 제주도 오름을 헤집어 놨는지..."

당시 제주도는 미군의 B-29 폭격기가 출몰해 폭격을 가하고, 일본의 자살특공대가 대기할 정도로 태평양 전쟁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인터뷰> 김용두(제주도 제주시 화북동) : "저 비행기가 이상하다. 이쪽으로 오더니 고도를 좀 낮춘 것 같아. 슬그머니 낮추더니 쿵쿵하는 소리가 나..."

<인터뷰> 좌정인(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 "오노 부대, 일개 부대니까 한 몇 십명이 있었는데, 정확한 숫자는 나도...한 30명 가량?(그 사람들이 다 자살 특공대?) 자살 특공대..."

제주항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사라봉에도 폭격을 막고 미군 상륙에 대비한 땅굴 진지가 있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김용두 할아버지는 사라봉 동굴 진지를 파는데 동원됐었습니다.

<인터뷰> 김용두(제주도 제주시 화북동) : "목(木)괭이 같은 걸로 찍으면서 들어갔는데, 조선놈이라면서 말이지 개패듯이 패고 말이지. 한국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안했어."

동원된 사람들은 겉겨도 제대로 벗겨내지 않은 잡곡밥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밥을 준 걸 보니깐, 그 껍질도 안 벗긴 것으로 밥을 해서 까끌까끌하니 안 넘어가, 너무 거칠어서 말이지.국도 말이지 썩은 장국, 채소 하나 없이 그것 뿐이야"

1945년 당시 제주도 인구의 20% 가량인 4만에서 4만 5천 명 정도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땅굴을 파는 노역에 동원됐다 숨지는 사람도 나오는 등 희생이 컸습니다.

<인터뷰> 좌정인 할아버지 : "(굴) 안에서 작업하다가 (무너지니까) 밖으로 나오려고 도망가다가 거기서, 압력에서 매몰돼 가지고 죽은 사람들이..(몇 명이나 죽었어요?) (거기서) 한 10명 정도 되고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거문 오름.

관광객들이 해설사를 따라, 오름을 둘러봅니다.

삼나무 숲을 지나고, 오름 분화구 속 생태계를 보며, 제주도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일본군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땅굴을 파놓았습니다.

<녹취> "이 거문오름 안에는 한 (땅굴이) 20여 개로 알고 있는데..."

땅굴을 둘러본 사람들은 이런 곳에 일본군 진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인터뷰> 조동건(경기도 고양시 장항동) : "오늘 처음 알았는데요. 저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였지만, 그 시대의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인터뷰> 송영건(제주도 제주시 노형동) : "저희는 아름다운 자연유산이라고 해서 왔는데, 아름다운 자연유산 속에서 또 이런 아픈 역사가 숨어 있구나 이런 생각이..."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잊혀져 가고, 지금까지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제주의 일본군 땅굴.

자기 땅인양 피헤쳐 놓은 오름의 이 일본군 동굴진지는 일제에 의한 우리 민족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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