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30㎝ 자로 머리카락 굵기를 재다

입력 2014.01.20 (11:39) 수정 2014.01.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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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일선 교육청과 학교에서 방사능 측정기를 잘 쓰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A 교육청에서 방사능 측정기 수십 대를 샀다고 들었는데, 서너 달이 지난 지금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었습니다.

A 교육청 담당 직원을 찾아갔습니다. "한 달여 동안 마흔 차례 넘게 측정을 했는데 방사능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랍에서 꺼내 보여준 방사능 측정기. 스마트폰보다도 작은 크기에 한눈에 봐도 허술해 보였습니다. 조금 큰‘삐삐'같기도 하고... 저걸로 식품 속에 들어있는 방사능을 측정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갔죠.

제조업체에 확인을 해봤습니다. 방사능 관련 종사자들이 개인 방호용으로 쓰는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라고 하더군요. 원전 등에서 방사성 물질이 유출됐을 경우 '대기 중의 방사선'을 감지해 위험 신호를 주는 용도였습니다. 제조사는 식품 측정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A 교육청만 구입했을 것 같지는 않아 17개 시도교육청에 일일이 물어봤습니다. 5개 교육청에서 비슷한 성능의 기기를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구입 시기도 지난 9월에서 11월 사이로 비슷했습니다. 이들 교육청이 구입한 기기는 70여 대, 6천만 원어치나 됐습니다.



제조업체 말대로라면 대기용 측정기로 식품 속 방사능을 쟀다는 말이고, 결과적으로 예산 낭비가 된 건데 바로 보도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식품 속 방사능을 감지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찾아 실험을 해봤는데요, 우리나라 식품 방사능 기준인 100베크렐로 오염시킨 쌀에 휴대용 측정기를 가져다 댔습니다. 예상대로(?)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염도를 5배, 10배로 늘려봐도 마찬가지. 100배 이상 농도를 올리자 그제야 반응을 했습니다. 지난 3년간 식약청에서 검출한 일본산 수산물의 방사능의 평균 농도는 2~5베크렐. 1,000베크렐도 감지하지 못하는 기계가 1,000베크렐의 0.5% 수준의 방사능을 검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죠.

실험을 도와준 박사는 "이 기기로 식품 속 방사능 오염물질을 감지하려는 것은 문구점에서 파는 30cm 자로 머리카락의 굵기를 재려는 것과 같다. 식품용으로는 무용지물이다" 라고 비유했습니다. 일부 교육청은 이 기기로 학교 급식재료의 방사능을 측정하고 식재료가 모두 안전하다는 보도자료까지 당당히 냈는데, 이 모든 게 '쇼'였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쇼'를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교육청들이 내놓은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방사능 공포가 워낙 심해 뭔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학부모 단체와 언론에서 압박이 들어와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인데, 전문가 의 의견을 듣지 않고 구입을 서두르다 보니 사실상 무용지물인 기기를 사게 된 겁니다.

같은 상황이었지만 다른 선택을 했던 공무원도 있습니다. 전남과 전북교육청의 경우가 대표적인데요, 이들 교육청도 학생 먹을거리 안전에 손을 놓고 있다는 학부모와 언론의 압박이 심해 측정기 구입을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교육청에겐 다른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구입 전 한국 원자력 안전 연구원이나 식약처 등에 성능 문의를 했던 겁니다. 전문 기관에서 해당 기기들은 식품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답변을 듣고 구입을 포기한 거죠.

올해도 서울과 부산 등 4개 교육청이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 구입을 위해 수백에서 6천만 원대의 예산을 세워 놓은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쓰여야 할 소중한 교육 예산이 '30cm 자로 머리카락 굵기를 재는' 어리석은 전시 행정에 낭비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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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30㎝ 자로 머리카락 굵기를 재다
    • 입력 2014-01-20 11:39:42
    • 수정2014-01-20 16:49:02
    취재후·사건후
사실 처음엔 '일선 교육청과 학교에서 방사능 측정기를 잘 쓰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A 교육청에서 방사능 측정기 수십 대를 샀다고 들었는데, 서너 달이 지난 지금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었습니다.

A 교육청 담당 직원을 찾아갔습니다. "한 달여 동안 마흔 차례 넘게 측정을 했는데 방사능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랍에서 꺼내 보여준 방사능 측정기. 스마트폰보다도 작은 크기에 한눈에 봐도 허술해 보였습니다. 조금 큰‘삐삐'같기도 하고... 저걸로 식품 속에 들어있는 방사능을 측정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갔죠.

제조업체에 확인을 해봤습니다. 방사능 관련 종사자들이 개인 방호용으로 쓰는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라고 하더군요. 원전 등에서 방사성 물질이 유출됐을 경우 '대기 중의 방사선'을 감지해 위험 신호를 주는 용도였습니다. 제조사는 식품 측정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A 교육청만 구입했을 것 같지는 않아 17개 시도교육청에 일일이 물어봤습니다. 5개 교육청에서 비슷한 성능의 기기를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구입 시기도 지난 9월에서 11월 사이로 비슷했습니다. 이들 교육청이 구입한 기기는 70여 대, 6천만 원어치나 됐습니다.



제조업체 말대로라면 대기용 측정기로 식품 속 방사능을 쟀다는 말이고, 결과적으로 예산 낭비가 된 건데 바로 보도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식품 속 방사능을 감지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찾아 실험을 해봤는데요, 우리나라 식품 방사능 기준인 100베크렐로 오염시킨 쌀에 휴대용 측정기를 가져다 댔습니다. 예상대로(?)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염도를 5배, 10배로 늘려봐도 마찬가지. 100배 이상 농도를 올리자 그제야 반응을 했습니다. 지난 3년간 식약청에서 검출한 일본산 수산물의 방사능의 평균 농도는 2~5베크렐. 1,000베크렐도 감지하지 못하는 기계가 1,000베크렐의 0.5% 수준의 방사능을 검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죠.

실험을 도와준 박사는 "이 기기로 식품 속 방사능 오염물질을 감지하려는 것은 문구점에서 파는 30cm 자로 머리카락의 굵기를 재려는 것과 같다. 식품용으로는 무용지물이다" 라고 비유했습니다. 일부 교육청은 이 기기로 학교 급식재료의 방사능을 측정하고 식재료가 모두 안전하다는 보도자료까지 당당히 냈는데, 이 모든 게 '쇼'였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쇼'를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교육청들이 내놓은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방사능 공포가 워낙 심해 뭔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학부모 단체와 언론에서 압박이 들어와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인데, 전문가 의 의견을 듣지 않고 구입을 서두르다 보니 사실상 무용지물인 기기를 사게 된 겁니다.

같은 상황이었지만 다른 선택을 했던 공무원도 있습니다. 전남과 전북교육청의 경우가 대표적인데요, 이들 교육청도 학생 먹을거리 안전에 손을 놓고 있다는 학부모와 언론의 압박이 심해 측정기 구입을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교육청에겐 다른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구입 전 한국 원자력 안전 연구원이나 식약처 등에 성능 문의를 했던 겁니다. 전문 기관에서 해당 기기들은 식품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답변을 듣고 구입을 포기한 거죠.

올해도 서울과 부산 등 4개 교육청이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 구입을 위해 수백에서 6천만 원대의 예산을 세워 놓은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쓰여야 할 소중한 교육 예산이 '30cm 자로 머리카락 굵기를 재는' 어리석은 전시 행정에 낭비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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