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구 GS 감독 “배구는 나의 시작과 끝”

입력 2014.04.1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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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프로배구 GS칼텍스를 2013-2014 V리그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끈 이선구(62) 감독은 지난 시즌을 돌아보며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란 말을 자주 썼다.

GS칼텍스는 파란만장한 시즌을 보내며 우여곡절 끝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선구 감독의 인생도 그랬다.

20년 동안 중동에서 '배구 전도사'로 일한 그는 2010-2011시즌 최하위에 그친 GS칼텍스 사령탑에 올라 3시즌 만에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1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 감독은 "최하위 팀과 함께 성장하면서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 자체가 지도자에겐 뿌듯한 과정"이라고 지난 3년을 돌아본 후 "생각해보면 내 인생도 GS칼텍스에서의 3년과 꼭 닮았다"고 했다.

◇ "팀에 필요하다면, 절이라도"

지난 시즌 GS칼텍스는 불안하게 출발했다.

이 감독이 삼고초려 끝에 현역생활을 1년 연장한 세터 이숙자(34)가 지난해 7월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팀의 두 번째 세터였던 이나연(22)은 "배구를 쉬고 싶다"며 임의탈퇴를 택했다.

이 감독은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고 떠올렸다.

2013년 11월 2일 열린 IBK기업은행과의 정규리그 첫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0-3으로 완패하자, 이 감독은 바로 경상남도 양산으로 내려갔다.

실업팀 양산시청 관계자를 만난 이 감독은 "정지윤 세터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선수를 설득하기 위한 '작전'도 짰다.

이 감독은 "동기 이숙자에게 '정지윤에게 수시로 연락해서 프로 복귀를 유도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11월 8일 GS칼텍스는 정지윤을 영입했다.

그는 "당시에는 정말 양산시청 관계자와 정지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며 웃었다.

◇ 이선구 리더십 "대화와 설득"

정규리그 막판, 포스트시즌을 준비하던 이 감독은 레프트 이소영(20)과 한송이(30)의 포지션 중복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베테랑 한송이가 블로킹과 수비 부담이 큰 라이트로 옮겼다.

한송이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지시였다.

이 감독은 "두 경기 정도 라이트로 뛰고 나서, 한송이가 나를 찾아와 '제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아무래도 개인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서니, 많이 서운하지 않았겠나"며 "'팀을 위해 희생해 달라. 그리고 자유계약선수(FA)를 눈앞에 둔 상황이니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이미지를 쌓는 것도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 감독은 직접 움직이며 애원하고, 설득했다.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는 일부러 호통도 쳤다.

이 감독은 "한 번쯤 감독이 나서서 팀 분위기를 다잡아야 할 때가 있다. 그때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라며 "이번 시즌 동안 두 번 정도 화를 냈다"고 전했다.

하지만 화를 낼 때도 이 감독만의 룰이 있다.

이 감독은 "정대영·이숙자·정지윤 등 베테랑 선수들은 절대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지 않는다. 반면 이소영 등 젊은 선수들은 모두가 볼 때 호되게 질책했다"며 "베테랑이 솔선수범해서 팀을 이끄는 게 가장 이상적인 구도다. 젊은 유망주를 편애하면 팀 분위기가 깨진다"는 '교육 철학'을 설명했다.

배구인들은 이 감독을 "대화와 설득, 그리고 적절한 질책으로 팀을 뭉치게 하는 사령탑"으로 평가한다.

◇ 우여곡절 끝, 코트에 발을 들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이 감독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을 뽐냈고, 초교 때 축구를 시작했다.

집안 사정으로 인천으로 이사하고 나서도 축구를 계속했고, 인천남중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이 감독은 "꽤 유능한 왼쪽 미드필더였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팀이 계속 패하자 인천남중은 축구부를 없애버렸다.

이 감독은 "서울로 축구 유학을 갈 생각도 했는데 '유급해야 한다'는 말에 생각을 접었고, 럭비를 시작했지만 체벌이 심해 금방 포기했다"고 했다.

1년 동안 운동을 쉬던 이 감독에게 인천남중 배구부 교사가 "배구 한번 해보자"고 권유했고, 이 감독은 배구 코트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키가 자라지 않자 고교 진학 후에는 배구를 포기했다.

이 감독은 "'이제 뭘 해야 하나'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고교 1학년 말에 심재화 선생님이 집으로 오셔서 '1년만 더 해보자'고 설득하셨다"고 전하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키가 크더니 고 3때는 세터로 청소년 대표에 뽑혔다"고 전했다.

구력이 짧은 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이 감독은 "고2 때부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천자유공원을 뛰었다. 등하굣길에는 차돌을 하나 들고 다니며 손목 힘을 키웠다"고 했다.

1970년 한양대에 입학한 이 감독은 곧바로 실업배구 한국전력에 들어갔다가 1975년 복학했다.

전위·후위 세터로 나뉘던 그 시절 전위 세터를 맡으며 레프트 공격수로서도 활약해 1977년 대학·실업 통합 최강팀을 가리는 박계조배 대회에서 한양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레프트 전향도 극적이었다.

이 감독은 "한국전력 시절, 나는 장신 세터를 꿈꿨다. 그런데 주전 레프트가 부상을 당했고, 감독님께서 '너 키가 큰 편이니 레프트를 해보라'고 하셨다"며 "당시에는 황당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여러 포지션을 경험해본 게 지금 큰 도움이 됐다"고 떠올렸다.

◇ 중동의 한국 호랑이

또 한 번 배구 인생 전환기가 왔다.

이 감독은 1978년 "중동에서 한국 선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진출해 한국 선수 최초의 중동 진출 선수가 됐다.

2년 동안 현역으로 뛴 그는 1980년 쿠웨이트 알 아라빅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중동 6개 클럽에서 14차례나 우승을 일궈낸 그는 '한국 호랑이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다.

1993년과 1995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 국가대표 사령탑에 올랐다.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이 감독은 "중동 선수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 안 듣기로 유명하다"고 껄껄 웃고서 "'시간관념', '공중도덕' 등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선수들이 훈련 시간에 늦으면 벌금 등을 부과했고, 차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선수가 보이면 차를 멈춰 "쓰레기 주워오라"고 명령했다.

"배구 감독보다 주임 선생님 같았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큰 사건도 있었다.

주전 레프트가 경기를 앞두고 훈련 시간이 끝난 뒤에나 경기장에 도착했다.

이 감독은 그 선수를 관중석으로 올려 보냈다.

해당 선수는 물론 구단 관계자까지 "이게 무슨 짓이냐"라며 이 감독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꿈쩍하지 않았고 팀은 이날 승리를 거뒀다.

이 감독은 "사실 패배를 각오하고 결단을 내렸는데, 남은 선수들이 똘똘 뭉쳐 승리했다"며 "지도자 생활의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이후 이 감독은 '한국에서 온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해졌고, 각 구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 "배구는 내 인생의 시작과 끝"

20년의 중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 감독은 대한배구협회 강화이사와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감독관, KOVO 경기운영위원장을 거친 후 2011년 4월 GS칼텍스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2010-2011 시즌 GS칼텍스는 최하위에 그쳤다.

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11-2012시즌에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12-2013시즌에 2위로 반등에 성공했고, 2013-2014시즌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이 감독은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9월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2014-2015시즌 2연패에 도전한다.

이 감독은 "제2의 고향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라 더 긴장된다"고 했다.

하지만 큰 그림은 이미 그려놨다.

그는 "김연경(터키 페네르바체)을 중심으로 공격을 펼치겠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팀워크로 세트 플레이를 펼치는 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어 "서브 리시브가 잠시 흔들려도 안전한 배구를 할 수 있는 끈끈한 전력을 갖춰, 팬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이 감독은 "국가대표 훈련에 앞서 선수들에게 '확실한 국가관'을 심어주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2014-2015 V리그가 시작한다.

GS칼텍스는 '디펜딩챔피언'으로 다른 팀의 도전에 맞선다.

그러나 이 감독은 "나는 GS칼텍스가 도전자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를 현역 최고참 감독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선구는 '이제 겨우 네 번째 시즌을 치르는 초보 감독'이다"라고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그래서 이 감독은 2013-2014 우승의 감격도 잊으려 한다.

이 감독은 "4월까지만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며 "5월 초 고교 종별선수권대회 경기를 보며 스카우트에 집중해야 하고, 5월 6일부터는 GS칼텍스 팀 훈련을 시작한다. 7월에는 대표팀 소집 훈련에 돌입한다"고 향후 계획을 말했다.

그리고 "짬짬이 선술집에서 배구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배구 얘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 생각"이라며 웃었다.

'60대 도전자' 이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배구가, 이제 내 인생 전부가 됐다"며 "파란만장한 내 인생은 배구로 시작해서 배구로 끝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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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구 GS 감독 “배구는 나의 시작과 끝”
    • 입력 2014-04-17 10:04:19
    연합뉴스
여자 프로배구 GS칼텍스를 2013-2014 V리그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끈 이선구(62) 감독은 지난 시즌을 돌아보며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란 말을 자주 썼다. GS칼텍스는 파란만장한 시즌을 보내며 우여곡절 끝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선구 감독의 인생도 그랬다. 20년 동안 중동에서 '배구 전도사'로 일한 그는 2010-2011시즌 최하위에 그친 GS칼텍스 사령탑에 올라 3시즌 만에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1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 감독은 "최하위 팀과 함께 성장하면서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 자체가 지도자에겐 뿌듯한 과정"이라고 지난 3년을 돌아본 후 "생각해보면 내 인생도 GS칼텍스에서의 3년과 꼭 닮았다"고 했다. ◇ "팀에 필요하다면, 절이라도" 지난 시즌 GS칼텍스는 불안하게 출발했다. 이 감독이 삼고초려 끝에 현역생활을 1년 연장한 세터 이숙자(34)가 지난해 7월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팀의 두 번째 세터였던 이나연(22)은 "배구를 쉬고 싶다"며 임의탈퇴를 택했다. 이 감독은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고 떠올렸다. 2013년 11월 2일 열린 IBK기업은행과의 정규리그 첫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0-3으로 완패하자, 이 감독은 바로 경상남도 양산으로 내려갔다. 실업팀 양산시청 관계자를 만난 이 감독은 "정지윤 세터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선수를 설득하기 위한 '작전'도 짰다. 이 감독은 "동기 이숙자에게 '정지윤에게 수시로 연락해서 프로 복귀를 유도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11월 8일 GS칼텍스는 정지윤을 영입했다. 그는 "당시에는 정말 양산시청 관계자와 정지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며 웃었다. ◇ 이선구 리더십 "대화와 설득" 정규리그 막판, 포스트시즌을 준비하던 이 감독은 레프트 이소영(20)과 한송이(30)의 포지션 중복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베테랑 한송이가 블로킹과 수비 부담이 큰 라이트로 옮겼다. 한송이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지시였다. 이 감독은 "두 경기 정도 라이트로 뛰고 나서, 한송이가 나를 찾아와 '제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아무래도 개인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서니, 많이 서운하지 않았겠나"며 "'팀을 위해 희생해 달라. 그리고 자유계약선수(FA)를 눈앞에 둔 상황이니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라는 이미지를 쌓는 것도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 감독은 직접 움직이며 애원하고, 설득했다.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는 일부러 호통도 쳤다. 이 감독은 "한 번쯤 감독이 나서서 팀 분위기를 다잡아야 할 때가 있다. 그때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라며 "이번 시즌 동안 두 번 정도 화를 냈다"고 전했다. 하지만 화를 낼 때도 이 감독만의 룰이 있다. 이 감독은 "정대영·이숙자·정지윤 등 베테랑 선수들은 절대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지 않는다. 반면 이소영 등 젊은 선수들은 모두가 볼 때 호되게 질책했다"며 "베테랑이 솔선수범해서 팀을 이끄는 게 가장 이상적인 구도다. 젊은 유망주를 편애하면 팀 분위기가 깨진다"는 '교육 철학'을 설명했다. 배구인들은 이 감독을 "대화와 설득, 그리고 적절한 질책으로 팀을 뭉치게 하는 사령탑"으로 평가한다. ◇ 우여곡절 끝, 코트에 발을 들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이 감독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을 뽐냈고, 초교 때 축구를 시작했다. 집안 사정으로 인천으로 이사하고 나서도 축구를 계속했고, 인천남중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이 감독은 "꽤 유능한 왼쪽 미드필더였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팀이 계속 패하자 인천남중은 축구부를 없애버렸다. 이 감독은 "서울로 축구 유학을 갈 생각도 했는데 '유급해야 한다'는 말에 생각을 접었고, 럭비를 시작했지만 체벌이 심해 금방 포기했다"고 했다. 1년 동안 운동을 쉬던 이 감독에게 인천남중 배구부 교사가 "배구 한번 해보자"고 권유했고, 이 감독은 배구 코트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키가 자라지 않자 고교 진학 후에는 배구를 포기했다. 이 감독은 "'이제 뭘 해야 하나'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고교 1학년 말에 심재화 선생님이 집으로 오셔서 '1년만 더 해보자'고 설득하셨다"고 전하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키가 크더니 고 3때는 세터로 청소년 대표에 뽑혔다"고 전했다. 구력이 짧은 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이 감독은 "고2 때부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천자유공원을 뛰었다. 등하굣길에는 차돌을 하나 들고 다니며 손목 힘을 키웠다"고 했다. 1970년 한양대에 입학한 이 감독은 곧바로 실업배구 한국전력에 들어갔다가 1975년 복학했다. 전위·후위 세터로 나뉘던 그 시절 전위 세터를 맡으며 레프트 공격수로서도 활약해 1977년 대학·실업 통합 최강팀을 가리는 박계조배 대회에서 한양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레프트 전향도 극적이었다. 이 감독은 "한국전력 시절, 나는 장신 세터를 꿈꿨다. 그런데 주전 레프트가 부상을 당했고, 감독님께서 '너 키가 큰 편이니 레프트를 해보라'고 하셨다"며 "당시에는 황당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여러 포지션을 경험해본 게 지금 큰 도움이 됐다"고 떠올렸다. ◇ 중동의 한국 호랑이 또 한 번 배구 인생 전환기가 왔다. 이 감독은 1978년 "중동에서 한국 선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진출해 한국 선수 최초의 중동 진출 선수가 됐다. 2년 동안 현역으로 뛴 그는 1980년 쿠웨이트 알 아라빅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중동 6개 클럽에서 14차례나 우승을 일궈낸 그는 '한국 호랑이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다. 1993년과 1995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 국가대표 사령탑에 올랐다.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이 감독은 "중동 선수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 안 듣기로 유명하다"고 껄껄 웃고서 "'시간관념', '공중도덕' 등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선수들이 훈련 시간에 늦으면 벌금 등을 부과했고, 차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선수가 보이면 차를 멈춰 "쓰레기 주워오라"고 명령했다. "배구 감독보다 주임 선생님 같았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큰 사건도 있었다. 주전 레프트가 경기를 앞두고 훈련 시간이 끝난 뒤에나 경기장에 도착했다. 이 감독은 그 선수를 관중석으로 올려 보냈다. 해당 선수는 물론 구단 관계자까지 "이게 무슨 짓이냐"라며 이 감독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꿈쩍하지 않았고 팀은 이날 승리를 거뒀다. 이 감독은 "사실 패배를 각오하고 결단을 내렸는데, 남은 선수들이 똘똘 뭉쳐 승리했다"며 "지도자 생활의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이후 이 감독은 '한국에서 온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해졌고, 각 구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 "배구는 내 인생의 시작과 끝" 20년의 중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 감독은 대한배구협회 강화이사와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감독관, KOVO 경기운영위원장을 거친 후 2011년 4월 GS칼텍스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2010-2011 시즌 GS칼텍스는 최하위에 그쳤다. 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11-2012시즌에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12-2013시즌에 2위로 반등에 성공했고, 2013-2014시즌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이 감독은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9월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2014-2015시즌 2연패에 도전한다. 이 감독은 "제2의 고향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라 더 긴장된다"고 했다. 하지만 큰 그림은 이미 그려놨다. 그는 "김연경(터키 페네르바체)을 중심으로 공격을 펼치겠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팀워크로 세트 플레이를 펼치는 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어 "서브 리시브가 잠시 흔들려도 안전한 배구를 할 수 있는 끈끈한 전력을 갖춰, 팬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이 감독은 "국가대표 훈련에 앞서 선수들에게 '확실한 국가관'을 심어주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2014-2015 V리그가 시작한다. GS칼텍스는 '디펜딩챔피언'으로 다른 팀의 도전에 맞선다. 그러나 이 감독은 "나는 GS칼텍스가 도전자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를 현역 최고참 감독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선구는 '이제 겨우 네 번째 시즌을 치르는 초보 감독'이다"라고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그래서 이 감독은 2013-2014 우승의 감격도 잊으려 한다. 이 감독은 "4월까지만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며 "5월 초 고교 종별선수권대회 경기를 보며 스카우트에 집중해야 하고, 5월 6일부터는 GS칼텍스 팀 훈련을 시작한다. 7월에는 대표팀 소집 훈련에 돌입한다"고 향후 계획을 말했다. 그리고 "짬짬이 선술집에서 배구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배구 얘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 생각"이라며 웃었다. '60대 도전자' 이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배구가, 이제 내 인생 전부가 됐다"며 "파란만장한 내 인생은 배구로 시작해서 배구로 끝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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