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팀’에서 ‘의리’까지…‘대표팀 감독’ 홍명보 1년의 기록

입력 2014.07.10 (16:21) 수정 2014.07.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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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14 브라질월드컵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10일 자진 사퇴했다.

월드컵 직후 사의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던 홍 감독은 축구협회의 설득으로 내년 1월 아시안컵까지 사령탑을 맡기로 했지만, 악화되는 여론 속에 결국 축구협회의 유임 발표 1주일 만에 감독직을 내려 놓았다.



지난해 7월, 동아시안컵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시작한 홍명보 감독은 브라질월드컵까지 5승 4무 10패의 초라한 성적표를 남긴 채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게 됐다.

선수로서 월드컵 4강 무대를 밟았고, 지도자로 올림픽 동메달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홍 감독 역시 국가대표팀 사령탑 잔혹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셈이다.

▶ 월드컵 4강 주역, ‘아시아의 리베로’ 화려했던 선수생활

“1990년 선수로 처음 국가대표에 들어가 24년 정도 대표팀에서 시간을 보냈다”

1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대로 홍명보 감독은 20년 넘게 선수로, 지도자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누구보다 화려한 시간을 보냈다.

고려대 재학 중이던 1990년 2월 성인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홍 감독은 6개월 만에 이탈리아월드컵에 출전했고, 4년 후 미국월드컵에서는 스페인·독일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98년 프랑스월드컵을 거쳐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네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홍 감독은 총 135회 A매치 출장에 10골을 넣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했고, '영원한 리베로'라는 별명과 함께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 됐다.

▶ 한국·일본·미국 프로무대 경험...K리그 드래프트 파동 주인공

프로축구에서도 홍명보 감독은 한국과 일본, 미국 무대를 두루 거치며 활약했다.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現 포항스틸러스) 유니폼을 입으며 프로무대를 밟은 홍명보 감독은 데뷔 첫 해 한국프로축구연맹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는 첫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91년, 프로구단의 신인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단 건 프로축구 31년 역사에서 최초의 드래프트 거부 사건으로 남아있다)



상대의 공격을 미리 차단하는 영리한 수비와 주특기인 중거리슛을 무기로 팀의 주축이 된 그는 1992년 K리그 우승, 1996년 FA컵 우승, 1997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팀의 화려한 시절을 함께 했다.

국내 리그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홍명보 감독은 1997년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다. J리그 벨마레 히라스카(現 쇼난 벨마레)를 거쳐 1999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한 그는 2000년 J리그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주장 완장을 찼고, 만년 하위권이던 팀을 리그 3위로 올려놓았다. 2002년 다시 포항으로 복귀했다가 200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갤럭시 유니폼을 입으며 일본에 이어 미국 진출에도 성공했다.

▶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원팀’ 깨뜨린 ‘의리축구’ 논란

2004년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 홍명보 감독은 국가대표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감독 체제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대표팀에서 수석코치를 거쳐 2009년 처음 사령탑을 맡은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을 18년 만에 세계 대회 8강에 올려놓았다.

특히 2010년 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첫 동메달을 따내며 국민적 지지를 한 몸에 받았는데, 당시 KBS 스포츠다큐 <공간과 압박>을 통해 지도자로서 면면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홍명보 감독은 브라질월드컵 지역 최종예선이 끝난 후 팀을 떠난 최강희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다. 당시 축구협회가 2018 러시아월드컵까지 임기를 맡기려 했지만 "임기가 보장되면 스스로 느슨해질 수 있다"며 2년 임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의 대표팀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취임 초부터 대표팀 일부 선수의 ‘SNS 파문’으로 홍역을 치렀고, 올 초에는 박지성 선수의 대표팀 복귀를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을 겪으며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무엇보다 월드컵대표팀 선발과 팀 운영과정에서 스스로 내걸었던 원칙을 깨뜨리며 이른바 ‘의리 축구’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6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홍 감독이 내 걸었던 ‘원 팀, 원 스피릿, 원 골’(One Team, One Spirit, One Goal) 슬로건에 기대를 걸었던 축구팬들의 여론이 결정적으로 돌아선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우려와 기대 속에 출범한 홍명보호는 평가전에서의 잇단 부진에 이어, 월드컵 본선에서도 전술 부재라는 비판 속에 1무 2패의 부진한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 귀국길에는 축구팬들의 엿세례를 받기도 했다.

지난 3일 축구협회의 유임 발표가 나온 후에도 악화된 여론은 가라앉지 않고, 급기야 '훈련기간 동안 땅 구매', '술판 회식' 등의 보도가 언론을 통해 나오면서 홍명보 감독은 24년간의 ‘국가 대표’ 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마무리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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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팀’에서 ‘의리’까지…‘대표팀 감독’ 홍명보 1년의 기록
    • 입력 2014-07-10 16:21:00
    • 수정2014-07-10 17:01:37
    월드컵 특별취재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14 브라질월드컵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10일 자진 사퇴했다.

월드컵 직후 사의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던 홍 감독은 축구협회의 설득으로 내년 1월 아시안컵까지 사령탑을 맡기로 했지만, 악화되는 여론 속에 결국 축구협회의 유임 발표 1주일 만에 감독직을 내려 놓았다.



지난해 7월, 동아시안컵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시작한 홍명보 감독은 브라질월드컵까지 5승 4무 10패의 초라한 성적표를 남긴 채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게 됐다.

선수로서 월드컵 4강 무대를 밟았고, 지도자로 올림픽 동메달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홍 감독 역시 국가대표팀 사령탑 잔혹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셈이다.

▶ 월드컵 4강 주역, ‘아시아의 리베로’ 화려했던 선수생활

“1990년 선수로 처음 국가대표에 들어가 24년 정도 대표팀에서 시간을 보냈다”

1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대로 홍명보 감독은 20년 넘게 선수로, 지도자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누구보다 화려한 시간을 보냈다.

고려대 재학 중이던 1990년 2월 성인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홍 감독은 6개월 만에 이탈리아월드컵에 출전했고, 4년 후 미국월드컵에서는 스페인·독일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98년 프랑스월드컵을 거쳐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네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홍 감독은 총 135회 A매치 출장에 10골을 넣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했고, '영원한 리베로'라는 별명과 함께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 됐다.

▶ 한국·일본·미국 프로무대 경험...K리그 드래프트 파동 주인공

프로축구에서도 홍명보 감독은 한국과 일본, 미국 무대를 두루 거치며 활약했다.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現 포항스틸러스) 유니폼을 입으며 프로무대를 밟은 홍명보 감독은 데뷔 첫 해 한국프로축구연맹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는 첫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91년, 프로구단의 신인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단 건 프로축구 31년 역사에서 최초의 드래프트 거부 사건으로 남아있다)



상대의 공격을 미리 차단하는 영리한 수비와 주특기인 중거리슛을 무기로 팀의 주축이 된 그는 1992년 K리그 우승, 1996년 FA컵 우승, 1997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팀의 화려한 시절을 함께 했다.

국내 리그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홍명보 감독은 1997년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다. J리그 벨마레 히라스카(現 쇼난 벨마레)를 거쳐 1999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한 그는 2000년 J리그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주장 완장을 찼고, 만년 하위권이던 팀을 리그 3위로 올려놓았다. 2002년 다시 포항으로 복귀했다가 200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갤럭시 유니폼을 입으며 일본에 이어 미국 진출에도 성공했다.

▶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원팀’ 깨뜨린 ‘의리축구’ 논란

2004년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 홍명보 감독은 국가대표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감독 체제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대표팀에서 수석코치를 거쳐 2009년 처음 사령탑을 맡은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을 18년 만에 세계 대회 8강에 올려놓았다.

특히 2010년 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첫 동메달을 따내며 국민적 지지를 한 몸에 받았는데, 당시 KBS 스포츠다큐 <공간과 압박>을 통해 지도자로서 면면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홍명보 감독은 브라질월드컵 지역 최종예선이 끝난 후 팀을 떠난 최강희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다. 당시 축구협회가 2018 러시아월드컵까지 임기를 맡기려 했지만 "임기가 보장되면 스스로 느슨해질 수 있다"며 2년 임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의 대표팀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취임 초부터 대표팀 일부 선수의 ‘SNS 파문’으로 홍역을 치렀고, 올 초에는 박지성 선수의 대표팀 복귀를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을 겪으며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무엇보다 월드컵대표팀 선발과 팀 운영과정에서 스스로 내걸었던 원칙을 깨뜨리며 이른바 ‘의리 축구’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6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홍 감독이 내 걸었던 ‘원 팀, 원 스피릿, 원 골’(One Team, One Spirit, One Goal) 슬로건에 기대를 걸었던 축구팬들의 여론이 결정적으로 돌아선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우려와 기대 속에 출범한 홍명보호는 평가전에서의 잇단 부진에 이어, 월드컵 본선에서도 전술 부재라는 비판 속에 1무 2패의 부진한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 귀국길에는 축구팬들의 엿세례를 받기도 했다.

지난 3일 축구협회의 유임 발표가 나온 후에도 악화된 여론은 가라앉지 않고, 급기야 '훈련기간 동안 땅 구매', '술판 회식' 등의 보도가 언론을 통해 나오면서 홍명보 감독은 24년간의 ‘국가 대표’ 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마무리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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